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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주간 토요일]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2,1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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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1-16 ㅣ No.143775

 

 

2021년 1월 16일 토요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2,13-17)

   2021년 1월 16일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1독서<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4,12-16)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화답송 시편 19(18),8.9.10.15(◎ 요한 6,63ㄷ 참조)

◎ 주님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저의 반석저의 구원자이신 주님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제 마음속 생각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복음<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4,12-16)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4-15)

 

히브리서 전반부인 1장 1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시고 완성시키신 예수님께서 구약에 나오는 여러 신분들에 대한 우월성을 지니고 계심을 증거한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4장 13절까지는 특히 예수님의 신분과 구원자로서의 우월성을 증거한다. 구체적으로 당시 유대출신 성도들이 능력의 존재로 섬기기까지 했던 천사들 보다 우월함을 증거한다.

또한 하느님의 율법을 수여받았으며, 가장 탁월한 민족의 영도자로 여김을 받았던 모세보다 더 뛰어난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예수님의 대사제로서의 지위와 사명과 일의 우월성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 가운데서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7장 28절은 예수님께서 레위계통 사제들보다 더 뛰어나신 대사제되심을 밝힌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6절은 이러한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서론 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사제임을 밝힘과 동시에, 본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성도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사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권면하는 부분이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우리에게는 ~ 계십니다'로 번역된 '에콘테스'(echontes) '가지다'(have),'취하다'(take)등을 뜻하는 동사 '에코'(echo)의 현재 분사 1인칭 복수이며, 문장 서두에 나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대사제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대사제되신 예수님이 우리 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제사로 하느님께 나아 갈 수 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3장 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지칭한 바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사제직을 비중있게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에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 완전한 제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속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음 히브리서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가 불가피했던 것은 히브리서의 일차 독자인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적 제사, 즉 율법 중심의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서 저자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대사제'라는 단어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서 '위대한'에 해당하는 '메간'(megan)의 원형 '메가스'(megas)는 지위 및 품위과 관련하여 인격적인 존재에 대해서 쓰일 때에 '높은', '위대한', '큰'등을 뜻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리스도의 대사제직이 구약의 레위 계통의 대사제보다 훨씬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쓴 것이다. '대사제'로 번역된 '아르키에레아'(archierea)의 원형 '아르케이류스'(archiereus) '첫째', '시작', '우두머리' 를 뜻하는 '아르케'(arche)와 '사제'를 뜻하는 '히에류스'(hierues) 합성어로서 '대사제'(우두머리 제사장)라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 Herodotus가 이집트의 주요한 사제를 나타낼 때, 그 사제는 왕 다음의 지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 철학자 Philo는 유대 사회의 대사제란 백성을 대표하며, 속죄시에는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또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들이 히브리서 저자에게 대사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영향을 끼쳤다 볼 수 있다.

 

대사제는 자신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려고 하면, 하느님과 인간을 완전하게 아는 자여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고,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인간에게 보이며,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이 역할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위대한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 저자는 본서에서 밝히고 있다.

 

이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레위 계층의 사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그분이 '하늘 위로 올라가신'(승천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디엘렐뤼토타 투스 우라누스'(eielelythota tus uranus)를 직역하면, '하늘들을 통과하여 지나간'(who has gone through the heavens)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들을 지나가신, 즉 통과하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저자가 '하늘'(uranus)을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은, 하늘이 3층 혹은 7층으로 되어 있고, 그 하늘들의 정상에 하느님의 옥좌가 있다는 유대 사상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믿는 하늘들의 정상에 올라가신 것이다(마르16,19; 사도1,10).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했던 일이요, 동시에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놀라운 일이다.

 

두번째로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요한14,9.10).

특히 본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의 이름만을 기록함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위한 대사제의 직무를 수행하실 수 있는 완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던 하느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요한1,1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으로서(요한1,3),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본문에서 '고백하는 신앙'으로 번역된 '호몰로기아스'(homollogias) 원형 '호몰로기아'(homollogia) '신앙 고백'을 뜻한다. 이것은 내적으로는 마음에 품어지고, 외적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되는 신앙,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 신앙을 말한다(로마10,9.10).

 

'우리가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로 번역된 '크라토멘'(kratomen)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굳게 붙들다'를 뜻하는 '크라테오'(krateo)의 현재 가정법이며 권유를 나타낸다.

 

이 동사 '크라테오'(krateo)는 '힘', '권능' 등을 의미하는 '크라토스'(kratos)에서 유래했으며, '강하다', '힘을 소유하다', '승리하다' 라는 의미외에도 우위를 점함으로써 붙잡는 행위 나타내는 단어로서, 꽉 잡는 것, 간직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고수했는데, 이러한 습관을 잘 아는 저자가 히브리 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승으로 신앙 고백을 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여기서 '연약함'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이스'(astheneiais)의 원형 '아스테네이아'(astheneia) '약함'(weak), '허약한'(infirm), '연약한'(feeble)을 의미하는 형용사 '아스테네스'(asthene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신체와 영혼과 심령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의학 및 종교적 용어이다(루카13,12; 요한11,4).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목마름 등을 느낀다든지 또 다른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이중 부정문('우 ~메'; u ~ me)을 사용해서 저자는 예수님께 대해 동정심이 많은 분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동정하지'로 번역된 '쉼파테사이'(sympathesai) 원형 '쉼파테오' (sympatheo) '같은', '동일한'을 뜻하는 전치사 '쉰'(syn)과 '겪다', '고난을 당하다'를 뜻하는 동사 '파스코'(pascho)에서 유래한 합성어로서, '다른 이와 동일한 느낌을 받다' '공감하다', '동정하다' 라는 뜻이다.

 

이 동사의 어원이 나타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가지셨으며, 우리에 대해 동료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지니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일하게 느끼셨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정을 공유하신 분이라고 증거한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해주는 내용이다. '유혹을 받으신'으로 번역된 '페페이라스메논'(pepeirasmenon)는 어떤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다', 혹은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다' 는 뜻을 가진 '페이라조'(peiraz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저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유혹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당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유혹은 그분으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불순종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철저히 계산된 술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도로서 우리가 당하는 것은 대부분 유혹(temptation)의 경향을 띠고 있어서(야고1,14), 아담처럼 단지 인간의 연약한 의지와 감정으로서 이에 대응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유혹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함으로써 사탄의 세력에 대응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혹을 이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죄는 짓지 않으신'


예수님의 무죄성과 흠이 없음 보여주는 경험적인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 떄, 세례자 요한이 말린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마태3,11-14).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기 때문에 죄인들만 그 대상이 되었는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요청하셨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격렬한 유혹들은 내적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고, 단지 밖에서 온 것들일 뿐이다. 이 점이 인간이 당하는 유혹(야고1,14)과 다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어떤 경험을 하셨다 해도, 그것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는 것과 달리 단지 밖에서 즉 사탄에게서 오는 것일 뿐이므로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으면 촉발되는 잠재적인 본성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죄의 습성도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1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흔들리지 맙시다. 세상과 함께 비틀거리지 맙시다.

(마르 2,13-17)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 다시 예수님께서 풍파의 세상으로 오셨다. 그러자 믿겠다고 찾아온 그들을 가르치셨다. 입니다.

성경은 세상에다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 속에서 믿겠다고 찾아온, 세례를 받은 그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 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심입니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 지나가시는~세상,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시간 그동안을 뜻합니다. 또한 우리의 회개(하마트리아-돌아섬) 그 예수님에게 돌아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남, 버림을 위한 지금 일어남으로~입니다.

곧 (세상)의 삶에서 일어나 하늘의 삶을 위해 지금 따르는 것입니다. 세리가 죄인으로 판단 받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자리 그 세상을 버리고~ 죄인을 의인으로 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 그 자신의 목숨으로 죄인들을 섬겨 주시는, 그분을 지금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죽어서는 못 받는 구원입니다.)

 

(마르10,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그래서~~

(로마3,24-25)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세리, 그 죄인의 음식을 예수님께서 잡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다는 겁니다. 그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죄인되심, 곧 죽음의 세례 받으시는 그 모습을 한번 더 보여 주심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의 죗값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다 이루어 졌다하신(요한19,30)~

그래서 다 이루었다-테텔에스타일 계약의 완성 그 영수증을 뜻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자는 예수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이 판단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마음, 심정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성경을 도덕과 윤리 읽지 않으면~~

그런데 윤리 도덕의 수준으로 읽으면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나요? 아니요 자신부터 해야지요.

선악의 그 뱀의 말을 먹은 아담 처럼 자신부터 판단합니다. (창세3,6)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수고, 종교 행위로 그 죄를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는 죄가 없다고 만족해 합니다.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추려 더욱더 열심을 부리게 됩니다. 아담이 자신의 죄를 가리려고 무화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어보지만 그 행위의 옷으로는 죄를 가릴 수 없기에~


(창세3,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이 죽어 남긴, 그 가죽 옷입니다. 대속의 죽음, 그 피의 옷입니다. 새 계약의 피 입니다인간의 선행, 그 의로움으로는 죄가 씻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이사64,5참조)


(마태23,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 죄인들을 위해 오신 그 예수님을 모르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그리고 신안의 목적을 모르기에 하는 소리입니다오늘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거든 알아들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의인으로 고쳐주시기 위해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 구원자를 만나기 위한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 묵상 했듯이 그 구원자를 만나는 길은 네 사람-4복음 안에 있습니다.

 

(요한3,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속죄 제물)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14,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많은 이들이 세상과 함께 자신의 선행을 진리로 알고 살아갑니다그것이 그릇되다 말씀 하셨는데도(요한16,8), 착하게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진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지는 내 죗값을 다 이루었다하신 그 골고타입니다. 오늘 그 대속의 죽음 그 십자가의 의로움의 옷을 입읍시다내 행위의 속세 그 옷을 벗고 받아들입시다.(히브4,12) 그러면 오늘 내가, 나에게 속고 있는 그 양심까지 깨끗해져 자유 할 수 있습니다.(히브9,14~참조)


(시편16,7-9)  7 저를 타일러 주시는 주님을 찬미하니 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일깨웁니다. 8 언제나 주님을 제 앞에 모시어 당신께서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9 그러기에 제 마음 기뻐하고 제 영혼이 뛰놀며 제 육신마저 편안히 쉬리이다.

= 흔들리지 맙시다.

 아멘 -*^^*-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마르2,13~17)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7)

 

마르코 복음 2장 17절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 땅에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말씀이다.

 

여기서 '건강한 이들'에 해당하는 '호이 이스퀴온테스'(hoi ischyontes; the healthy)라는 표현은 은유적 표현인데, 자기식의 의(義)를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doctor)도 은유적 표현으로서 죄에 빠진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예수님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속에는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셔야 했는가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 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외적 조항을 가지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단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교만과 위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를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건강한 척하면서 당신을 외면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위해 오시지 않고, 자신의 영적 건강을 걱정하던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의사이셨다.

특히 마르코 복음 2장 17절의 전반부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유행하던 속담으로 알려졌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속담을 이용해서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위선을  지적했던 것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여기서 '부르러'에 해당하는 '칼레사이'(kalesai; to call)의 원형 '칼레오' (kaleo)는 구원에로의 초대나 제자로의 부름(마태4,21; 1베드2,9)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동사 하나에 두 개의 목적어 '의인'과 '죄인'이 동시에 사용되어서 서로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진정한 의미의 의인이 아니고, 본인이 자신을 생각하는 관점에서의 자칭 의인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 10~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인'이라는 개념 역시 꼭 어떤 죄를 지은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응답할 수 있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루카5,8).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초대를 받을 자격은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정확한 자기 의식이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복음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 생활에서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1요한 2,6)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시고 주님께서는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다닐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하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그러기에 병든 사람들은 자기 힘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제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구원을 베푸소서의로운 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시편 12,2)라고 한 것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죄인인 채로 그냥 남아있게 하시려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투박한 돌이 아니라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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