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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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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0-31 ㅣ No.185958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4,1-6: 안식일에 대한 논쟁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보여 주신 참된 자비와 사랑을 통해, 율법의 본래 정신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한다. 바리사이들은 주님을 시험하려고 초대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 자리를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를 가르치는 장으로 바꾸신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수종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주님은 율법 교사들에게 물으신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3절)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은 단순히 율법을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참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안식일은 단순한 규율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주신 자유와 구원의 날이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드리는 날이다(신명 5,14-15; 이사 58,13). 
 
주님께서는 또한 질문하신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이는 안식일이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날임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하느님은 사랑이 멈추는 분이 아니시며, 인간을 위해 계명을 주셨다. 따라서 안식일을 문자적·법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그 본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본문을 해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은 안식일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참뜻을 밝히러 오셨다. 인간을 위하여 주신 날에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율법의 의미를 완전히 잃게 된다.”(루카 복음 강해 47,2) 성 아우구스티노는 덧붙인다: “안식일의 규정은 인간의 영혼과 몸을 쉬게 하여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를 회복시키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다.”(설교집 45,3) 
 
주님의 모범처럼, 안식일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기쁨과 구원의 날이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랑과 자비를 나누고, 약자를 돌보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참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시키시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율법의 문자적 규정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뜻과 인간 사랑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자. 그리하여 우리는 자유롭고 은총 가득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진정한 구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법에 너무 집중하면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찬미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십니다.
율법 전문가들이 모인, 그야말로 '법'의 심장부입니다. 
그런데 그분 앞에 '수종'(水腫)을 앓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습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가, 법을 어기는가?'
그들의 머릿속은 '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법의 도사들이었습니다. 
눈앞에 고통받는 생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법만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들이 침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데려다가" 병을 고쳐주시고 "보내셨습니다." 법을 '생각'하는 이들은 얼어붙었지만, '사랑'만 생각하시는 분은 행동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강론의 핵심 주제입니다. 
"왜 법에 관심이 많을수록, 오히려 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게 될까요?"  
 
우선 '법'이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법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먹이를 찾아, 모였다 흩어지는 모기 떼에게는 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유지되려면 서로 간의 약속, 즉 '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수직과 수평의 사랑으로 나뉩니다. 
나라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사회의 법은 그 사회 일치의 중심을 향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가르칩니다. 가정의 법은 어떻습니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그 근간입니다.  
 
하느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 '사랑'의 정도가 강할수록 더 강력한 공동체가 됩니다. 
그 공동체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 희생을 통해 우리는 더 행복한 '소속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의 가정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라 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하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수많은 실제적인 방법이 ‘법’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속속들이 안다고' 해서 잘 지킬 수 있을까요? 
법을 모르는 네 살배기 아이와, 법전을 통째로 외우는 법관 중에 누가 더 법을 잘 지킬까요? 
운전을 오래 해서 교통법규를 잘 아는 사람이 교통법규를 잘 지킬까요, 아니면 교통법을 잘 모르는 초보자가 더 잘 지킬까요? 
금융 사기범이 금융법에 대해 더 잘 알까요, 아니면 죄 안 짓는 철부지 아이가 금융법에 대해 더 잘 알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초보자나 아이가 법을 더 잘 지킵니다. 
전문가들은 법을 '알기 때문에' 신호위반이나
과속을 해도 걸리지 않는 방법을 압니다. 자신들이 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감옥에 가지 않을 만큼 법을 어기는 방법을 압니다. 
혹은 그 법으로 타인을 감옥에 넣기 위해 법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충만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법'을 몰라도 법을 지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법을 지키는 '에너지', 즉 '부모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가정에서 해야 할 의무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을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법의 근간은 사랑인데, 그 '사랑'은 받아야만 채워지는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비극입니다. 
그들은 '법'을 연구했지만, 정작 그 법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사랑을 '에너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법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법을 '지킬 힘'이 없는 대신, 법을 '판단할 힘'만 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 미제라블’의 경우를 봅시다. 여기, '법'을 '생각'하는 사람의 정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베르' 경감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법'을 어긴 죄수였기에, 평생 '법'을 지키는 의인이 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는 법을 알았고, 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장 발장입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사랑'의 에너지가 고갈된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리엘 주교를 만납니다. 
주교의 은그릇을 훔쳤음에도, 주교는 그를 '법'으로 고발하지 않고 '사랑'(자비)으로
덮어줍니다. 
"이 사람은 내가 준 것입니다. 
이보게, 내가 준 촛대는 왜 안 가져갔나?" 
 
장 발장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받았습니다'. 
이 에너지가 그의 얼어붙었던 영혼을
녹였습니다. 
자베르는 '법'을 알았기에, 시장이 되어 선행을 베푸는 장 발장을 '법'대로 체포하려 합니다.
그는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범죄자 취급합니다. 
 
반면 장 발장은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을 줍니다. 
그는 '사랑'을 받지 못해 '법'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코제트'를 만납니다. 
그는 코제트에게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받은 '부모의 사랑'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사랑'(에너지)을 받은 코제트는, '법'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타인을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아는, '법을 지키는' 고결한 여인으로 성장합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장 발장이 자신을 평생 쫓던 자베르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사랑'으로 그를
살려 보내는 장면입니다. 
자베르는 '법'만 알던 자신의 세계가, '사랑'이라는 더 큰 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을'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법'을 어기지 못해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과 사회에 가장 큰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법’을 추종하던 자베르는 파멸했고, ‘사랑’만 생각한 장 발장과 코제트는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법은 그 사회를 만든 '부모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받아들여,
그 '부모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할 때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좋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이고, 더 나아가 '하늘에 사시던 분'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만 '하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교사들은 '법'을 배우느라, 그 법을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법이 지켜지라고 주신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만 하늘의 법을 지키는 존재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법'을 배움으로써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너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사랑에 '순종'(응답)함으로써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미사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미사는 '사랑'을 받는 자리입니다. 
이 제대 위에서 쪼개어지는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나는 수많은 법을 다 외우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자리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할 때 그 가정에서 지켜져야 하는 법에서 벗어남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수많은 법을 공부하기보다는 그 모든 법을 잘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살아가면 됩니다. 
법의 정신은 사랑이기에, 법을 지키게 만드는 힘은 법을 아는 것이 아닌 사랑을 받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 들어가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14,3) 

 

'매일이 안식일!' 

 

오늘 복음(루카14,1-6)은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지켜보고 있는데에서 근육이나 피부조직의 병인 수종병을 앓고 있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14,3)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14,5)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이 물음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면서 잠자코 있습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을 만나는 날, 주님과 함께하는 날, 그래서 영과 육이 함께 부활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안식일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이렇게 묵상해 보니, 우리의 매일은 안식일이 되어야 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매일 만날 수 있고, 매일 만나야 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삶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은 안식일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들려오는 주님 말씀에 율법 교사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침묵하지 말고,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본기도)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도 떠오르고 ...

이 좋은 가을에 도종환(진길아우구스티노) 시인의 '단풍드는 날'이라는 시도 생각나게 합니다.z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도. ㅎㅎ 

 

"복된 날 되소서!" 

 

(~ 1열왕19,2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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