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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고 믿고 맡겨야 합니다

145846 김동식 [kurbanus] 스크랩 2009-12-25

 
 

El Greco / St. Francis in Meditation

 

 

 

 

 

                    키우고 믿고 맡겨야 합니다


                                                                          


제겐, 30년 전께 사목회 봉사를 함께 했던 멤버들이 그때 그 본당 신부님을 모시고 아직도 계절마다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만남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재미있게 활동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여러 본당, 여러 신부님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겪은 사목회를 회상하노라면 즐거움보다 아린 회포가 더 큽니다.



전국 1543 여개 본당에 사목회의 현황은 어떨까?

아예 없는 본당,

있어도 겨우 몇 명 정도 명색만 걸려 있는 본당,

있긴 있어도 티격태격 불목하여 마비되어 있는 본당,

해산명령으로 공중분해 된 본당,

사임으로 깨진 본당........

이런 본당이 태반이 넘는다고 하면 심청 사나운 자의 객소리일까?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그나마 아무 탈 없이 조용하다 싶은 데는 대개 김밥집이 틀림없습니다. 순명이라는 이름의 복지부동, 무사안일주의입니다.



그렇지 않고 임기를 채운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이 역시 가자미눈을 가진 자의 시각이라고 핀잔을 받을까? 아닙니다. 아무 문제도 불거지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잘 하고 있는가싶은 데를 알고 보면 자동거수기, 무사여일, 유야무야 지나는 성당입니다. 따지자면 문제가 불거진 성당보다 더 심각한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교회의 어느 연구기구나 언론에서도 이 중요한 통계를 시도해 본적이 없습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건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반적 현상은 원천적으로 구조적, 역학적 모순을 배태하고 있는 우리 교회 공동체의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언젠가 잘못되고야 만다.(If anything can go wrong, it will)’는 ‘치숌의 법칙’을 도리 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16세기 교회 분열 이후 개신교 운동이 민주적인 교회 체제를 택하자 가톨릭교회는 소위 반종교개혁이라 불리는 대개신교(對改新敎) 반작용으로 교계제도의 권위가 하늘에서 주어진 것임을 더 강조하게 된다.


유럽 국가들은 절대군주들이 통치하고 교황은 교회를 위한 절대군주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된다. 교황을 거슬러서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과거 특수 교회론의 정점이다.

트렌토 공의회(1545-1563) 이후 교회의 이런 표상들이 법제화된다.

교회에 대한 모든 권한은 로마 교황에게, 교구에 대한 모든 권한은 주교에게, 본당에 대한 모든 권한은 본당신부에게 집중된다.

19세기에는 이탈리아 중부를 차지하던 교황령의 상실과 근대사회의 출현을 거슬러서 교회는 피라미드식의 교회조직을 더욱 강화한다.

교회는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조직된 절대군주 사회이며, 주교들은 각 교구에 임명된 교황의 총독들이고 신부들은 이 총독들이 먼 들판에 있는 양떼들을 위해 임명한 대리자들이다.

교회에 대한 이런 표상을 정당화한 것은 성령이 교회의 저변에까지 일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교계제도의 봉사직무 안에만 성령이 일하신다는 착각이다.

또 한 가지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가 정의한 교황 무류권(無謬權)을 교회 내 질서 확립의 원리로 착각한 데서 비롯한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가 된다. 신앙은 낮은 계층이 높은 계층에 순종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교회의 의사결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목적 배려의 대상일 뿐이다. ● - 서공석 ‘교회의 쇄신, 또 한번의 말 잔치?’2. -



이와 같은 권위주의의 전형의 고착이 21세기 교회에 그대로 고스란히 존속되고 있음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광신, 맹신자를 총알로, 방패로 양산하고 있습니다.

본바닥 유럽의 뒤를 이어 전세계(아프리카를 제외한)의 교회는 날로 비어갑니다. 양식 있는 지식인을 선두로 자유롭게 성령을 만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세기적 대 엑서더스를 뉴스로 숫자로 알면서도 속수무책인 것은 권위주의가 회복불능으로 고질화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현재 교회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이니 구구리고 닥치고 있으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사제와 평신도의 ‘갈등’구조의 주범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이 공의회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갈등의 원인은 개인 대 개인의 인격적인 상충으로 비추어지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모순을 안고 있는 체제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1906년에 반포된 교황 비오 10세(1835~1914) 의 회칙 Vehementer Nos(?)의 한 문장 속에는 이런 문구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교계의 여러 등급에 속하는 사목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평신도 무리이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명확하여, 교회의 목적을 촉진하고, 그 목적에로 모든 구성원들을 지도하는데 필요한 권리와 권한은 오직 사목자들에게 속하고, 평신도 무리의 유일한 의무는 사목자들의 지도를 받고 순한 양들처럼 그들을 따르는 것이다.」

갈등의 원인은 이와 같은 중세의 잔재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헌장의 틈새에서의 신음입니다.



교구차원에 있는 ‘평신도사도직협의회(평협)’과 ‘사목협의회’의 두 기능을 한데 뭉뚱그린 것이 본당의 ‘사목회’ 또는 ‘사목위원회’ 혹은 ‘사목평의회’입니다.

교구마다 사목회 회칙 규범 예규가 있지만 이를 포함해서 각 일선 본당이 실제로 갖고 있는 회칙들이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은 지 4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대로 한 장짜리 친목회 회칙을 연상할 정도로 빈약할뿐더러 회원, 회의, 재정 등 비합리적인 규정이 여실히 인정되는데도 방치되고 있는 것은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성속이원론의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입니다.



총회를 해도 고만, 안 해도 고만입니다. 입법, 사법, 행정이 사제 1인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선입니다. 그 독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식정보화시대에 희화(戱畵)처럼 남아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 대표가 회장이면서도 의장은 본당주임사제입니다. 의결기구가 아니면서 의결을 합니다. 보필과 자문을 위한 의결입니다. 만장일치 의안이라 할지라도 주임사제가 비토하면 고만이요, 명색이 평신도 대표이면서도 그 구성원의 임명권과 해산권을 주임사제가 행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목회가 신심단체나 봉사단체와 같은 ‘단체’ 반열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굳이 ‘사제의 사목을 자문 보필 협조하는 모임’ 정도로 어정쩡한 명패를 붙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조적, 역학적 모순을 내포한 사목회가 하나의 유기적인 구성체가 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 한 일입니다.



1970년 전후에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구와 본당에 사목회라는 걸 들여 놓았으나 아직까지도 애물단지입니다.

성속의 기득권자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문화로 성장한 평신도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은 장래에 오늘날의 갈등의 역사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사목회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기구가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 안하느냐, 잘하느냐, 잘못하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반듯이 있어야합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가 정립으로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 그래서 열두 사도가 신도들을 모두 불러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놓고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내시오. 이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습니다."

모든 신도들은 이 말에 찬동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파노와 필립보와 브로코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르메나와 또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유다교로 개종한 니골라오를 뽑아 사도들 앞에 내세웠다.』-사도6,2~6-



사목활동 즉 교회의 사목적 사명을 다하는 활동은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는 모든 지체들의 다양한 활동으로 나타나겠으나 이를 성직자들의 활동과 평신도들의 활동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의 사목활동은 그들의 사회성(社會性)과 현세성(現世性)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 활동은 그들이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분야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충실성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전문적으로 활약하는 모든 노력입니다.

한편 성직을 통한 사목활동은 특히 신앙생활에 대한 봉사와 전례 집전으로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봉사는 설교, 교리교육 및 영적 대화 등으로 구체화되며 전례행위를 통한 봉사는 여러 성사 집행에서 드러나고 미사성제를 중심으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이러한 사목활동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는 수단이 바로 교회 운영입니다.



사목권의 행사인 교회 운영은 지상 여정의 교회가 갖는, 사회적 조직을 구성하고 교회의 사목행정의 능률을 높이며 재정과 인사를 관리합니다. 직무와 은사, 사랑과 법률 사이의 긴장은 순례하는 교회의 본질에 속합니다.

급변하는 세상의 다양한 생활환경 때문에 행정 당사자는 구체적으로 타당성 있는 지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규정에 따른 사목회의 등을 충실히 운영하여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고 결정하고 실천하도록 운영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공의회가 제시하는 변화들에 대하여 얼마나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도모하고 나섰나?

새로운 전통을 위하여 한국교회는 얼마나 분골쇄신 하였나?

애초부터 공의회의 개혁조치들이 인사권 ․ 의결권과 같은 종교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을 주교나 본당신부에게 여전히 위임해 두고 있었으므로 해서 개혁은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열린 교회로서의 민주적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운영자의 재량에 따라 성패는 좌우됩니다.

문제는 낡은 문화가 새로운 제도를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제도가 낡은 문화에 ‘굴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바뀔 때 마다 본당의 위상은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추락하기도 합니다.

주교는 교구에서 선출되지 않고 로마에서 비밀지령처럼 이루어집니다. 사제에 대한 주교의 인사권도, 평신도 봉사자에 대한 사제의 인사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모습입니다.



공의회를 계기로 한국교회에서 진행된 일련의 제도적 개혁들은 숱한 변화를 이루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자생적 개혁이 아니라 도입된 개혁으로서의 거부반응이 성직자와 평신도간에 갈등과 부작용으로 불거지고 있는 것입니다.

갈등이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대표적인 부서가 본당 사목평의회(사목회)입니다.

왜냐하면 사제와 평신도의 대면이 가장 긴밀하게 이루어지므로 본당의 살림살이 사정을 제일 많이 알고 공동체로서 갖추어야할 조건의 허실을 실제로 부딪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제와 거품이 제거된 인격으로 만나는 사목회장은 노출된 타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봉사자라 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사제와의 접촉이 많지 않은 분들 그리고 멀리서 제대를 바라보며 미사만 드리고 가는 일반신자들은 사제와 평신도의 갈등사안에 대하여 알지를 못합니다.

이 분들에게는 갈등의 원인은 모르는 채 밖에서 보이는 시시비비가 하극상의 볼썽사나운 꼴로만 보입니다.



금세기에 있어 평신도의 교회 운영 참여는 불요불급 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세속적인 권력 다툼이 아니라 교회운영의 합목적성입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는 사제의 권위주의에 가로막혀 평신도의 상처와 의욕 상실을 낳고, 신부들은 ‘마마보이’가 된 평신도의 ‘수동성’과 ‘의존성’을 빌미로 더욱 독단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러한 성직주의적, 귄위주의적, 그리고 평신도의 노예근성의 양상은 근본적으로 천주교 일반 혹은 세계교회 공통의 특성이라기보다 한국교회의 특유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목회 운영의 성패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사제에게 있습니다.

사목회 구성원들이 반드시 일반신자보다 신심이, 인격이, 능력이 또는 재력이 더 큰 분들은 아닙니다. 신학이나 교리 등을 전공한 분들도 아닙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통독은커녕 평신도사도직 교령이란 말을 처음 들어보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동체는 이 분들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키우고, 믿고, 맡겨야 합니다. 무엇을 했느냐 보다 어떻게 함께 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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