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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김대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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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엽 [simjy] 쪽지 캡슐

2003-01-08 ㅣ No.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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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7월 7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다.
김대건 신부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복자가 되기까지 성인의 일대기를 그린
이 그림들은 고 탁희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20여 장 가운데 그 첫 그림은 이렇게 시작한다.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다. 소년 시절은 마카오에 유학, 신학과 외국어 등 근대학문을
배워 외국과의 문호개방을 주장한 선각자이다. 김해김씨 김제준의 둘째아들로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내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제준의 조부 진후(비오)는 조선교회 창설기부터 입교 십 년 옥고로 순교하였다. … 
유년에 조부에게 수학하고 천주교 문답 교리를 배웠다.
쉬는 때면 뒷산 노송바위에서 동네아이들과 놀며 조부께 배운 것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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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6년 12월 9일
모방 신부의 선발로 신학생이 된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은 정하상, 현석문 등의 인솔로 출발,
연말 의주 변문을 무사히 통과, 중국 옷으로 변장하고 샤스탕 신부댁으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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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5년 8월 17일
김 부제, 구사일생으로 오송에 도착하다. 이상한 모습과 파선된 배를 보고 부두에는 구경꾼이
인산인해고 관헌의 감시는 심하다.
8월 17일(일요일)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25세 김 부제의 서품식을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거행,
11명의 선원과 신부 몇 분이 참석한 조촐한 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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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5년 8월 21일
상해에서 선박을 수리하여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다.
같은 배, 같은 항로였고 폭풍우마저 똑같이 뒤따랐으므로 처음 목표인 연평도와는 엉뚱히 제주도에
 표착. 다시 북상하여 황산포에 도착하여 교우가 미리 준비한 상옷으로 변장 상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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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6년 4월
경기도 용인 골배마실을 중심으로 은이, 텃골, 은다리의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며 성직자로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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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6년 4월 8일
용인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교우들과 최후 미사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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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6년 6월 5일
김 신부는 만주에서 방황하는 최양업 부제를 모실 계획으로 1846년 5월 14일 마포에서 출발,
황해도에 이르러 주교의 편지와 자신이 그린 근해지도를 중국 어부에게 전하였다.
6월 1일 중국 배를 쫓아내기 위해 배를 빌리려는 관장의 명을 김 신부가 불응하였다.
결국 김 신부의 신분이 밝혀져 체포되다.

 

+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 오색이 찬란하게 하늘을 누비고 12명의 희광이가 미친 듯이 칼춤을 춘다.
웅대한 그 자세 그 얼굴은 관중을 보고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 영원한 복락을 누리려면 반드시 천주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선 당신을 알아 공경하는 이는 영원히 저버리지 않고 영원한 불가마에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 최후 유언의 설교를 남기고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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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 집전 아래 병오 교난에 순교한 79위 복자 시복식이
거행되다. 복자 안드레아여, 모든 치명자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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