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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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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엽 [simjy] 쪽지 캡슐

2005-02-14 ㅣ No.204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3)
3-4 선교 영성
바오로는 하느님이 직접 부르신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 소명의식에 언제나 철저했고, 실로 그 사명 수행에 혼신을 기울이며 일생을 바쳤다. 한편 그에 앞서 하느님은 그에게 요청되는 적성과 카리스마를 태워주셨고 또한 맞갖은 자질을 키워주셨다.

3-4-1 적성.자질

은총이 본성을 파괴하지 아니 하고 완성시킨다는 원리는 바오로 사도의 영성 여정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실로 은총은 그의 천부적 능력, 성향, 기질 그리고 감성을 희생시키지 아니하면서 잘못된 부분은 지배하고 예속시키며 좋은 것은 고무하고 거양하여 발전시켰다. 바오로의 총체적 인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천부적 재능, 기질과 함께 은총의 생활로 높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혈질적이며 불같은 성격을 타고난 바오로가 유다교인이었을 때 광신적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활동한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일 수 없었듯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면서 이번에는 어떠한 역경이나 박해 그리고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외치는(로마 8,35-39 참조) 열정적 사도가 된 것도 그의 성품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은 빗나간 방향에서 저항하던 바오로의 본성적 재능과 자질을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로 전환시켜 주셨던 것이다.

바오로는 우선 그러한 기질, 성품상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적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 전진하는 성격이었으므로 보수적인 성향을 띤 예루살렘 모교회나 그 주변에 안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그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좥아버지좦시라는 진리를 확신하였기에, 모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하느님, 빛의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그는 교회의 건설(1고린 3,1-17 참조)과 공동 유익을 위해(1고린 12,7 참조) 좬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좭(1고린 12,11) 베풀어 주시는 카리스마들 중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 특히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선포가 그의 몫임을 절감했던 것이다(갈라 1,15-16 참조).

또한 그의 성장과정의 문화 배경과 교육 여건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 자질의 기초를 닦도록 하였다. 그리스 디아스포라(다르소)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주변의 지배적 상황인 그리스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그의 서간에서 자주 그러한 문화적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로마 1,19; 2,27-3,8; 2고린 4,16-5,9; 1고린 9,24-27 등 참조). 또한 히브리 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 간 예루살렘에서 정규 성서교육 과정을 통해 익힌 그의 상당한 성서지식은 미래의 선교활동을 위해서 가장 유익한 기본갖춤이 되었다.

3-4-2 소명의식과 사명수행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극적인 만남은 은총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회심의 정점이었지만, 교회 역사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전환점을 이루게 한다. 바오로는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사도로, 특히 이방인의 사도로 불렸음을 여러 차례 표명하면서(갈라 1,15-16; 로마 1,5; 사도 22,21 참조) 자신이 좥사도좦로 호칭되어야 함을 강력히 주장하고 열두 사도에게 유보되어 통용되던 사도의 사명에 관한 신학적 체계에 의의를 제기한다(1고린 15,9-11 참조). 이같이 자기의 입장과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는 합법적 권리 및 자유를 변호하던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두 번이나 사도들을 만나 결국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갈라 1,18; 2,9 참조).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다마스커스 사건 이후 본격적인 선교 활동하기 전까지의 아라비아 사막의 은거생활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본인의 서간에서 직접 술회한다. 학자들은 그가 그곳에서 은거한 기간을 약 3년 정도로 본다. 은거의 시간들은 그가 그리스도와 친교, 우의를 두터이 하면서 성령께로부터 주님의 사도로 양성되는 은총의 때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오로는 자신을 가르친 교사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갈라 1,11-12 참조). 그가 선교 활동 장소를 옮기는 것이나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이끌어 주신 분은 그리스도의 성령이셨으며 그는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다(사도 16,6-8 참조). 그러므로 그의 선교 활동은 기도와 통합되어 하나의 실재를 이루면서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도록 하였던 것이다. 바오로가 숱한 역경과 시련 그리고 혹독한 박해 중에도 복음선포 사명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좬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좭(1고린 9,16).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불가분의 두 진리를 사명 수행의 기본 척도로 삼았다. 하나는 그에게 선교사명을 맡기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좬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좭(요한 15,5). 다른 하나는 체험을 통한 그의 신념 고백에서 나타난다. 좬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좭(필립 4,13). 이것은 그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부당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끼는 이중적 자기의식이었다. 혹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것은 바로 바오로의 사도직 영성의 기초이며 핵심이었다.

3-5 완성 위한 인간의 협력으로서 수덕

바오로는 인간의 의화와 성화가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인한 율법이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자주 강조한다. 실로 성성(성덕)은 그리스도인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선물이며 단순한 피조물인 인간을 천상적 존재로 들어 높이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은총이다. 본래 하느님만이 거룩하시지만, 그분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피조물은 거룩해질 수 있다. 좬거룩하신 분좭(사도 3,14; 묵시 3,7)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을 믿는 이들과 성성을 나누며 그들을 성화시키신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세례성사를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1고린 1,30; 6,11 참조).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자주 그리스도인을 곧장 좥성인좦(성도)이라 지칭한다(2고린 1,1-2; 히브 3,1; 필립 1,1; 에페 5,3 등 참조).

이같이 그리스도인이 새로 태어나면서 받는 무상적 선물을 존재론적 성성이라 한다. 이러한 성성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협력하면서 구체적인 선행을 통해 더 높은 단계의 성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받기 위한 인간편의 협력으로서 체계적이고 항구한 노력을 제외시키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한편 은총은 그러한 노력을 가능하게 해준다(필립 2,12-13 참조). 그리고 그는 이렇게 가르친다. 좬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처럼 살지 마십시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좭(에페 4,17; 22,24). 이로 인해 성성은 이제 개별적인 것이며 은총에 대한 각자의 생활 자세에 따라 정도에 있어 다른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이를 일컬어 학자들은 윤리적 성성이라 한다.

성화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성장하면서 지향해야 할 목표는 완성적 성성 즉 완덕이다. 좬나는 이 희망을 다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좭(필립 3,12. 15).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종이 된(로마 6,18-22 참조)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느님께 적극적으로 위탁하며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을 바오로는 운동선수의 신체단련과 연관시켜 수덕의 영성을 전개한다(1고린 9,27 참조). 그리고 그는 이러한 수덕의 자세를 경기장에서 우승하려는 운동선수의 훈련에 비교하여 설명한다(1고린 9,24-25 참조).

인간은 충만한 자기 완성을 하늘 나라에서 얻게 되는데 거기서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며 그분의 진선미를 영원히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 여정 중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성은 상대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인간이 은총에 협력하며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지만 이 세상에선 은총에 대해 인간의 응답이 한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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