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관련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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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엽 [simjy] 쪽지 캡슐

2005-02-14 ㅣ No.205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4)
아우구스티노 (상)

1. 생애
"님 위해 우리를 내셨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내 영혼이 평안하지 않나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유명한 좥고백록좦을 시작한다. 젊은 시절의 방황에서 벗어나 참 사랑이며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기나긴 회심의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한 그의 좥고백록좦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영성여정을 살펴보며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를 금할 수 없다. 실로 이 저서는 세계의 문학사에서 큰 획을 이루며 오늘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파스칼, 키엘케고르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서들 못지 않게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는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 중 근원에서 사유한 3대 철학자로 플라톤, 칸트와 함께 아우구스티노를 꼽는다.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플라톤이라면 아우구스티노는 가장 위대한 라틴 사상가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의 신학 및 영성적 권위는 오늘까지도 우뚝 솟아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문화를 옛 세계의 문화와 융화시킨 큰 공헌자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관리였던 아버지 파트리시오와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354년 11월 13일 로마의 북아프리카의 식민지인 누미디아(지금의 리비아)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례성사를 받지 않았으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16세 때부터는 카르타고 대학에 들어가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떠나 방황하게 된다. 그는 수년간 여러 종교와 사상의 요소들이 통합, 절충된 교의를 지닌 마니교에 심취되었고 나중엔 철학자 플로티노의 학설에 매력을 느끼며 전향하여 그의 저서들을 탐구하였다.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한 여정 중에 헤매지만 한가지 집념 즉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늘 그의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그는 383년 카르타고를 떠나 수사학 교수로 로마를 향하여 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실망하게 되고 이듬해 밀라노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그의 인생의 대전환의 계기를 이루게 하는 암브로시오 주교를 만나게 된다. 암브로시오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그를 다시 교회의 품으로 데려와 큰 일꾼이 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예비해 두신 사람이었다(고백록 5, 13 참조).

아우구스티노는 밀라노에서 지내던 어느 날 숙소의 정원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좬집어라, 읽어라(Tolle, lege!)좭라는 신비로운 음성을 반복해서 듣게 되고 뭔가 예사롭지 않은 직감에 주변에 있던 바오로 서간집을 집어 펴서 읽었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다음의 구절이었다. 좬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로마 13, 13∼14)좭 이 말씀에 그는 철퇴를 맞는 듯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 대목은 바로 그에게 직접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으로 영감을 받으며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도록 했다. 그의 마음 자세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로 인해 개종을 결심했고 새로운 태어남을 준비하여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387년 부활 전야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는 36세에 사제품을 받았고 5년 후 주교로 축성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가 하느님을 벗어나 살아왔다는 비참한 현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그 순간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전향할 수 있는 회심의 은총을 받았다. 하느님을 떠나 그토록 방황하던 그를 한 순간도 결코 포기하시지 않은 그분의 사랑과 섭리의 고마움을 가슴 저리도록 깨닫게 된 것이다. 좬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좭

아들의 방황, 진리의 추구, 하느님과의 만남과 회심 등 영성여정 가까이엔 어머니 모니카의 인고와 사랑 담긴 기도, 희생의 모정이 늘 동행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모니카의 삶은 누군가를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정성스런 기도와 희생이 언젠가는 반드시 응답 받는다는 신비를 깨닫게 해주며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바라는 때와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우구스티노는 백성을 가르치고 성화시키며 헌신한 좋은 목자로서, 호교론자로서, 교회의 학문을 발전시킨 학자로서 그리고 뛰어난 영성가로서 40여년간 봉사하던 중,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그가 교구장으로 있던 히포를 포위한 상태에서 즉 로마 제국의 붕괴와 몰락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사유를 철학적 체계 안에 정립한 철학자인 동시에 신학자였으며 굵은 선의 영성가였다. 그는 좥신국론좦, 좥삼위일체론좦, 좥자유의지론좦 등 100여권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서간과 설교문을 쓴 초기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며 저술가로서 그때나 지금이나 늘 당대의 인물같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좬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있다(삼위일체론 15, 8)좭고 규정한 그는 사상적 방황을 하면서도 숨겨진 진리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데 지칠 줄 모르던 좥진리의 연인좦이었다. 그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좬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좭(고백록 10, 27) 아우구스티노는 이단을 대면하여 사랑하는 교회의 정통성을 합리적으로 지키고 가꾸어 나간 훌륭한 호교론자였다. 그는 교회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주장하는 광신적 자세를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교회를 대적하는 이들에게 인내와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본분을 교회에 일깨웠다. 그것은 그들을 정복하려는 정략적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들도 구원의 대상임을 잊지 말고 보살펴야 하는, 좥구원의 보편적 성사좦로서 교회의 본성에 맞갖게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사도 바오로 다음가는 큰 준봉을 이루는 신앙의 회심자였다. 그는 성서 말씀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가 존경하던 철학자들이 발견한 진리가 뛰어난 것일지라도 성서 저자들이 전해준 거룩한 계시에 관한 가르침과 비교할 때 무한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특히 바오로 사도의 글 안에서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에 대해 열정을 지닌다(고백록 7, 21 참조). 어느 날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예사롭지 않게 대면한 바오로의 로마서(13, 13∼14)의 일득은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바오로에게 일어났던 사건만큼이나 그에게 극적인 회심의 전환점이 되었다. 좬이 말씀을 읽고 난 찰나, 내 마음엔 법열이 넘치고 무명의 온갖 어두움이 스러져 버렸나이다(고백록 8, 12)좭

아우구스티노는 서방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 규칙서를 썼다. 그것은 사도행전 (4장, 32∼35)에 나타난 좥사도적 생활좦의 서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양식의 수도생활을 구상하고 수도원을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먼저 시작되어 서방에 소개된 동방의 수도 생활을 단순히 이식한 것이 아니었고 성서적 바탕 위에 문화와 환경에 맞게 적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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