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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리오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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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엽 [simjy] 쪽지 캡슐

2005-02-14 ㅣ No.211

로사리오의 기도
요즈음 사람들은 예전보다 아는 것도 많고 꽤나 똑똑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책임 아래 판단하기를 싫어한다. 남이 대신 생각하고, 대신 말해주는 것을 그냥 보고 듣기를 좋아한다. 편안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엉터리 프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보상자인 텔레비젼에 중독된다. 멍청하니 라디오를 마냥 틀어놓는다. 정신과 마음의 양식이 되는 책을 고르지도 않고, 진지한 자세로 읽지도 않는다. 고작해야 남들이 많이 읽는다는, 상업주의로 제작한 흥미본위의 베스트셀러에나 가끔 손을 댄다. 줏대도 없고, 소신도 없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좬외롭다좭는 것이다.
수천만 명이 구더기처럼 모여 살아도, 아니, 그렇게 바글바글 모여 살면 살수록, 현대인은 더욱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지능이 발달하고 지식은 풍부할지 몰라도, 자기 머리를 써서 생각하고 가치와 보람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좋은 친구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모두가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을 치료하는 약은 비아그라가 아니라 좋은 책이다. 책이란 원래가 사람의 친구, 애인, 스승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좋은 책의 경우다. 나쁜 책은 나쁜 친구, 못 믿을 애인, 고약한 선생이 된다. 어떤 종류의 친구나 애인이나 스승을 만나는가는 책을 선택하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대형 서점에 들어가 보면 문자 그대로 책의 홍수다. 거기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포장만 잘 된 채, 좋은 책인 듯이 유혹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는가! 얼굴이 반반하고 화장을 잘 한 여자를 조심해야 하듯이, 책도 표지만 번드르르하고 광고를 많이 하는 것일수록 빈 껍데기라고 일단 의심하는 것이 현명하다. 몸과 마음이 참으로 멋진 여자가 드물 듯이, 내용이 충실한 책도 역시 그리 흔하지는 않다. 그래서 좋은 책을 만나면 그렇게도 기쁜 것이다. 책의 홍수, 사실은 쓰레기의 홍수 속에서 정말 오래간만에 책다운 책을 발견했다. 좬로사리오의 기도좭(나가이 다카시 지음, 조양옥 옮김, 베틀 북 출판사)가 그것이다. 이 책에는 원폭 마을의 성자가 보내는 평화의 기원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원자폭탄이 사람의 머리 위에서 폭발한 것은 단 두 군데 즉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뿐이다. 히로시마에서 10만, 나가사키에서 8만 명이, 현역 군인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눈 깜짝할 순간에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원자병이라는 새로운 병이 지상에 나타났다. 좬일본 제국주의가 수십 년간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고 전쟁을 일으켰으니까, 그 대가로 천벌을 받은 거다! 자업자득이지!좭 우리가 아무리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기억한다고 해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말이 된다. 전쟁의 책임과 생명의 존엄은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원자무기가 인간을 대량으로 말살하는 식으로 두 번 다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인류의 간절한 염원을 우리는 비웃을 자격이 없지 않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방사능 연구 전문의사인 나가이 박사는 원폭이 떨어지기 이전에 이미 백혈병에 걸려 죽어 가는 몸이었다. 그러나 원폭이 떨어진 직후 사흘간이나 집에 가지 못하고 환자들을 치료했다. 폐허로 변한 집에 돌아가서 아내의 뼈를 추려내는 장면에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좬3일째, 죽거나 부상당한 학생들의 처리도 대충 마무리되어 저녁에 집으로 돌아갔다. 온통 잿더미였다. 아내를 이내 찾았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새까만 덩어리…다 타고 남은 골반과 허리뼈였다. 곁에는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묵주)가 있었다. 시꺼멓게 그을린 물통에 아내를 주워 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내 품안에서 아내가 죄송해요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좭

이 책에서 나가이는 국경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치고 있다. 좬(미국인) 딜 선장이 내게 보낸 커피는…국경을 넘어, 승전국 국민과 패전국 국민의 차별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 알지도 못하면서…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행한 것 뿐이다좭

또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전쟁책임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좬이 선량한 한 가족을 이다지도 엄청난 역경에 빠뜨린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일본을 속인(전국 각지 신사의) 800만 신들은 애당초 가공의 신들이다좭

소설가 한수산이 나가사키를 여행한 체험으로 적은 서문도 감동적이고, 번역자 조양옥이 이 책을 구해서 출판할 때까지의 기기묘묘한 곡절도 재미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눈을 번쩍 뜨게 된 것은 일본인이 속이 좁은 섬나라 조무래기라고 오만하게(또는 열등감에서) 깔보려는 우리의 고정관념 자체가 속 좁은 우물 안 개구리의 소견이라는 사실이다. 한일간의 국민감정이 해소되기에는 앞으로도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도 일본에도 사람다운 사람,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교훈을 주는 이 책은 참으로 좋은 친구라고 믿는다.


<이동진 (비오. 시인. 소설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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