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관련

천국과 지옥

인쇄

심재엽 [simjy] 쪽지 캡슐

2005-02-14 ㅣ No.242

천국과 지옥
가진 사람일수록 만족을 모른다

백화점에서 하루를 보낸 일이 있다. 이곳 구리의 산골마을로 이사오고나서 거의 백화점 갈 일이 없었다. 요새 웬만한 동네는 다 백화점 버스가 와서 고객을 훑어가는데, 우리 마을은 지방도로에서 1Km나 산골짜기로 들어와야 하는, 70여호 정도의 작은 마을이라 수지가 안맞을 것 같아선지, 그런 마을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건지, 안들어온다. 그 대신 온갖 잡상인들이 차에다 별에 별 걸 다 싣고 와서 사라고 외친다.
채소나 과일 생선은 물론 순대나 젓갈류까지 안팔러 오는 게 없다. 다들 미리 녹음한 걸 반복적으로 틀어놓고 다니기 때문에 시끄럽긴 하지만 단골 아저씨도 생겨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는 맛도 나쁘지 않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상냥한 여자 목소리로 여러 가지 채소 이름을 외치는 트럭을 불러 세웠더니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조수석에라도 아줌마가 있겠거니 하고 들여다보았으나 비어 있었다.

아저씨는 씩 웃으며 마누라 목소리라고 했다. 거칠어 보이는 인상을 마누라 목소리로 커버한 그 아저씨는 참 착하다. 어제 산 참외가 안달더라고 말하면 죄 지은 것처럼 쩔쩔 매면서 오늘 것은 달거라면서 부득부득 거저로 한 두개를 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소리 안한다.

싱싱한 채소 값이 그렇게 쌀 수가 없다. 이것 저것 한보따리를 사고나서 만원짜리를 내도 몇천원은 거슬러 받게 된다. 왜 이렇게 싸냐고 하면 물건 사고 싸다는 사람은 할머니 밖에 없을 거라면서 그의 얼굴에 연민이 어린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게 안돼보이는 모양이다.

그에게 동정 받는 게 싫지 않다. 이렇게 집에서 쇼핑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데 뭣하러 백화점에 가겠는가. 앉아서 살 수 없는건 고기밖에 없는데 딸들이 친정 나들이 올 때 엄마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으면 고기나 사오라고 말하면 해결된다. 딸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건 내 노후대책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살다보니 백화점에 갈 일이라곤 없었는데 내리 삼년을 옷을 안사고 사니 외출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옷에 신경이 써지기 시작했다. 옷에 대한 내 신조는 어느 장소에서나 눈에 안띠게 입는 것이다. 너무 멋있거나 비싸 보여서 눈에 띄는 것도 싫고, 너무 초라하거나 유행에 뒤져서 튀는 것도 싫다.

삼년째 옷을 안사고 지내고 나니 슬슬 초라해서 튄다는 걸 의식 하게 되었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혼자서 백화점 나들이를 갔는데 월요일이라 그랬는지 세일기간인데도 한산했다. 일부러 혼자서 간건 단시간 내에 여러 가지를 사고싶어서였다. 같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말이 많아서 그게 잘 안된다.

단시간 내에 필요한 여름살이를 대충 장만하고 차를 한잔 마시려고 식당가로 갔더니 마침 여학교 동창 둘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리는 호들갑스럽게 반가와하면서 합석을 했다. 차 뿐 아니라 점심도 같이 먹고나서 또 수다를 떨었다. 냉방이 잘 되고 너무 붐비지도 않는 백화점 속은 그렇게 쾌적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앉았어도 일어나기가 싫었다.

나는 자연과 순박한 인심이 늘 가까이 있는 우리 집이 천국인줄 알았는데, 하루만에 마음이 바뀌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고, 이 세상의 온갖 진귀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아양을 떨며 손짓하는 백화점이야말로 바로 현대의 천국이다 싶었다.

문득 옛날 사람들이 그린 천상낙원은 어떤 것이었을까,궁금해진다. 고궁을 보면 임금님도 지금의 아파트 생활보다 훨씬 더 불편하게 사셨을 것 같다. 한중록에도 겨울이면 빈궁의 거처 벽에 성애가 낀 얘기가 나온다.

웬만한 아파트는 집집마다 적어도 한 대씩은 에어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밖에서 쳐다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여름에 덥기를 한가, 겨울에 춥기를 한가, 고기는 비싸서가 아니라 살 찔까봐 안먹고, 사시장철 온갖 과일과 채소가 먹고 넘치게 풍성하고, 하루만에 지구를 한바퀴 돌고 올수도, 심심해서 미녀를 부르면 제까닥 미녀가 대령하고, 미남을 부르면 미남이 나오는 상자까지 집집이 방방이 있는 세상은, 옛날 사람한테 마음대로 천국을 그려보라해도 아마 그리는 못그렸을 것이다.

그럼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가진 사람일수록 만족을 모른다. 아흔아홉냥 가진 이가 남의 한냥 가진 걸 뺏고 싶어 마음은 늘 걸신이 들려있다. 아귀(餓鬼)가 따로 없다. 마음이 곧 아귀지옥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지으셨다면 이렇게 불공평할 리가 있다고들 하지만 삶의 속내를 알고 보면 섬칫하도록 공평한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박 완선/ 엘리사벳. 소설가>


15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