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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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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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20-12-24 ㅣ No.2373

 

2020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서울대교구 

춘천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대구대교구

부산교구

청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성탄을 축하합니다!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은총과 평화를 청하게 됩니다. 곤경 속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성탄이 희망과 위로의 빛으로 다가오기를 기원합니다. 북녘 신자들도 신앙의 자유를 얻어 함께 주님을 찬양하게 될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환자들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며 많은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는 의료진과 봉사자들에게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생활고에 시달려 고통의 나락으로 내몰리는 많은 서민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참 아픕니다.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형제적 사랑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도 많이 힘들고 혼란스러워서 앞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위로부터 오는 빛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어려울 때일수록 하느님께 의탁하며 그분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도 고난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께 눈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구원 업적을 기억하면서, 이제 그분께서 빨리 ‘하늘을 찢고 내려오셔서’(이사 63,19) 자신들을 비참한 상태에서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간절한 청원에 응답하시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던 것처럼 권세가 당당한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립 2,7) 이런 점은 예수님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던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셉은 황제가 명한 호적등록을 위해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서 방을 구할 수가 없게 되자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아들을 낳아 구유에 눕힙니다(루카 2,1-7).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 세상의 구원자이신 분이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초라하고 누추한 곳에 몸을 누이신 것입니다.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을 낮추어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낮은 곳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빛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낮은 곳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분을 만나려면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동방박사가 ‘별빛의 인도를 받아’ 자신의 고향을 뒤로하고 길을 떠났듯이(마태 2,1-12),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천사의 지시를 따라서’ 자신의 일터를 떠나 마구간을 찾아갔듯이(루카 2,8-18), 우리도 일어나 그분께로 향해 가야 합니다. 자신의 자리에 머물고자 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소유, 내 신념, 내 지식, 내 경험, 내 편을 고집하면, 구세주를 만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이웃과 하느님께로 향해 걸어가야만 참 빛(요한 1,9)이신 구세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참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동방박사들이 누렸던 큰 기쁨과 천사들이 목동들에게 선포하였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어서 자기 기준대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욕심’(창세 3,5)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자 하는 욕심, 세상의 중심인 절대자가 되어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조정하고 싶은 욕망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도한 욕심과 욕망으로 인해서 세상은 점점 더 어지럽고 힘들어집니다. 성경이 경고하듯이 그릇된 욕망의 종착점은 결국 죽음뿐입니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하느님은 잘못된 욕망에 빠져 죄와 죽음의 굴레에 갇혀있는 인간을 구하시려고 당신 아들을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끝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구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종의 모습이지만, 사랑과 자비를 가득히 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을 만나면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갈 힘과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 곁에 머무르면 자신이 받은 힘과 희망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마음 안에 모시고, 이웃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사랑의 손길을 내밀도록 합시다. 그러면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는 기쁨과 평화가 들어서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은총에 의탁하고, 그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면서 우리 모두 하느님을 향한 길을 꿋꿋하게 걷도록 합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평양교구장 서리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춘천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사랑하는 춘천교구민, 수도자, 사제 여러분! 세상 구원을 위하여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주님 성탄의 은총이 모든 교우와 그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 성탄의 이 놀랍고도 완전한 사랑의 신비는 온 세상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모든 이들 안에 주님의 현존을 새기는 기쁨의 축제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번 성탄은 우리가 마음껏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제를 지내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미사도 축소되고, 성탄 축제도, 함께 나누는 잔치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성탄을 맞이하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처럼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하다 하여 실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2천 년 전에도 가장 혼란하고 어지러운 때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강생의 신비가 완성되었고 세상에 참된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완성인 강생의 신비는 과거에 있었던 지나간 일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작은 빛도 큰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이제 주님 강생의 신비를 체험한 교우들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어둡게만 느껴지는 이 세상에 한 줄기,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 세상을 희망으로 바꿀 큰 힘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작으로 우리 교구에 사랑이 많고, 어질고, 열심히 실천의 삶을 살고 있는 김주영 시몬 주교를 새 교구장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비록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지만 새로운 주교와 교구민 모두가 이 어려운 시기에 세상의 빛이 되는 강생의 신비를 완성하도록 열심히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춘천교구 주교로서 저는 참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사제들과는 따뜻한 형제의 정을 나누었고, 교우들께서는 부족한 저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목자로서 따라주셨고 기쁘게 함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형제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그리고 교우들의 참 행복을 위해 작은 밑거름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새로 나시는 주님의 은총이 모든 교우와 그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2020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춘천교구 교구장 김 운 회 루카 주교

 

 

  

[대전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사랑하는 대전교구 하느님 백성 여러분,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초라하고 어두운 마구간 안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빛이 온 세상을 비추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 희망의 빛이 여러분 모두에게 위로와 평화,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성탄 때 울려 퍼졌던 천사들의 찬미처럼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와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성탄을 보내고 싶은가?”라는 질문 보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떤 성탄을 보내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과 함께 성탄을 맞이합시다.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살펴보면 주인공인 예수님은 이야기 전개의 배경에 있고 중심에는 목자들이 있습니다. 이 목자들은 들에 살며 밤에도 양 떼를 지켜야 하는 힘겹고 가난한 삶을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느님의 천사는 이렇게 전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이는 성탄에 있어 그 중심의 자리에 가난한 이들이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준 것이 곧 당신에게 해준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마태 25,31-46 참조). 그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도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성탄의 모습일 것입니다.


  올해 초에 시작된 코로나19로 많은 이가 고통을 겪었고, 지금도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재난이 왔을 때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복지 단체를 찾는 봉사의 발걸음이 줄어들고 무료급식소의 운영이 여러 곳에서 중단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기도 합니다. 코로나19의 전염을 막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점점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거리 두기를 핑계로 서로의 대화와 협력 또한 줄어들고 있습니다. 부유한 국가들이 곧 생산할 것으로 예상되는 백신의 대부분 물량을 이미 차지해 두었고 정치지도자들은 이를 자신의 공적으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이처럼 코로나19라는 폭풍은 그동안 겉습에만 연연하며 병든 자아는 감추는 데 급급했던 우리의 온갖 거짓된 허울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무너뜨리고 있습니다(『모든 형제들』 32항 참고).

  이제 우리는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변화해야 하고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것인지 엄중한 선택을 해야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했던 하느님의 똑같은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 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코로나19를 예방하고, 또 치료하는 백신만 개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우리 삶의 병폐들을 치료해

줄 새로운 차원의 치료제가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tutti: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을 통하여 코로나19를 이겨내고 교회가 새롭게 나아갈 모습과 인류가 더불어 사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 모두 같은 배를 탄 공동체이므로,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때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모든 형제들』 32항 참조). 『모든 형제들』 67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오직 착한 사마리아인을 닮는 길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의 상태로 길에 쓰러져 있는 이가 어느 민족이고,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신분인지를 묻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루카 10,29-37 참고). 이처럼 “우리를 고립시키고 분열시키는 사슬들을 끊고 그곳에 다리를 건설하는 사랑”(『모든 형제들』 62항)이야말로 코로나19의 극복을 위한 진정한 치료제인 형제애입니다.

  특별히 이 형제애는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며,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조건 없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모든 형제들』 140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괴로움은,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이요 슬픔과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모든 형제들』 56항).

  우리는 지난 대림 제1주일부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살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쇄국정책과 엄격한 신분질서 하에 있던 조선 시대에 보편적 인류애와 만민평등 사상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덕을 전파하신 분이십니다. 유네스코는 이런 면을 높이 평가하여 김대건 신부님을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세상이 점점 단절되고 이기주의와 차별이 심해져 가는 위기의 시대에 맞은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은 우리에게 큰 은총과 함께 중대한 사명을 전해 줍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김대건 신부님의 정신을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고 전하는 것이 바로 그 사명입니다. 이 중요한 사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국경을 넘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돕고, 북녘과 세계의 형제들에게 코로나19를 치료하는 백신을 보내는 운동”을 희년 기간 실시하고자 합니다. 이 운동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희년의 은총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덕의 실천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이요 행복입니다.


  많은 이들이 선물을 받는 성탄으로 여기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기 예수님처럼 세상에 우리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일에 주저하지 맙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는 말씀을 살면서 더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당신의 소중한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구원자로 기꺼이 내어놓으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안내하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 모두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평화 가득한 성탄 보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20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인천교구]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였습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쁨이 넘치는 이 거룩한 날을 우리 모두 함께 기뻐합시다. 또한,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온 세상에 알리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이 거룩한 날을 보냅시다.

 

오늘, 이 기쁨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예고된 구세주의 탄생이 이루어진 날의 기쁨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은 하느님은 더 이상 인간의 생각 안에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우리와 같은 모습의 인간으로 오셨음에 대한 기쁨입니다(1요한 1,1 참조).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당신의 친교로 초대하셨습니다. 하지만 태초의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하느님과의 끈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인간에게 다가오시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인간이 맺은 끈이 끊어질세라, 당신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고자 구세주를 약속하셨으며 그분을 통해 이제 끊어지지 않을 사랑의 끈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그것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탄생하시어 사랑의 끈을 엮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다”라고 주님 성탄의 의미를 전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는 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는 친교의 한가운데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강생하신 신비를 경축함이 주님 성탄 대축일의 의미인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457-460항 참조).

 

하느님과 인간과의 연결이자 구원의 도래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뜻의 실현이며 완성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찾아 헤매는 인간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해 주시는 임마누엘, 사랑의 끈이 되어주셨습니다. 더 이상 인간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탄생하셨다는 이 사실이 어찌 큰 기쁨이며 위로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임마누엘의 탄생으로 하느님과의 끈을 맺고 있는 우리는,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뻐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함께’라는 끈으로 서로를 연결하기보다는 다른 이들과 자신을 단절하고 분리시키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기술 개발의 가속화로 사회적 관계를 연결한다는 끈(SNS)이 발달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정작 서로의 얼굴을 가리운 가상의 세계에서 더 큰 고립감과 단절감을 느끼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실의 세계에서도, 서로 함께 있어 주며 이해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생각을 앞세우며 분열하는 모습이 자주 드러납니다. 자신만의 생각이 옳음을 극단적으로 내세우고 강요하며,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장벽을 세워 분리시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여 마음을 나누는 상생(相生)의 삶이 아니라, 마음속에 불만을 가득 품은 채 타인을 향한 불만족을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표현하며 상극(相剋)을 야기하는 모습들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드러나는 이러한 모습들은 하느님께 죄를 범하여 하느님과의 친교 관계를 상실하고, 서로를 향해 죄의 책임을 돌리며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과 우리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묵상하며 사랑과 친교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겠습니다.

 

또한 함께 살아가는 친교의 관계는 비단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공동의 집’이라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코로나-19 사태로 혼란스러운 이 시점에서 환경과 인간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자연에게 인간의 편리를 강요하며 벌어지는 자연과 인간과의 친교의 상실은 ‘함께함’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라시고, 우리도 그것을 깨닫기를 바라셨던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강생하셨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으로 우리는 구원을 보았습니다(루카 2,30 참조).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하느님께로 연결하는 사랑의 끈이시기에, 우리 또한 서로 함께해주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셨던 그분의 사랑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을 가져다주신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은 우리 와 함께 계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이웃과 세상을 향해 우리 각자의 손을 내밀어 사랑의 온기를 전해줄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성탄 대축일은 단절과 고독으로 친교를 잃은 이들에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탄생을 알리는 날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의 관계를 잃어버린 그곳에, 단절과 고독이 자리한 그곳에, 자연을 지배하며 자신만을 앞세우려는 그곳에, ‘임마누엘’, 주님 탄생의 기쁨을 전합시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그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인천 교구장

정 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께 달려가 경배드립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요한 1,14). 그리고 마침내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인류 구원을 알리는 강생의 신비는 생명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손수 빚어내신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

에게 내려주신 창조의 축복이 계속해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신비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신 뜻은 지금도 여전히 생명의 빛이 되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의 확산은 전 인류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비단 질병의 고통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경제

적 위축은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에게 직접적인 생명의 위기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구나 할 것없이 어려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 생명의 빛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향하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가난과 굶주림에 떨고 지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생명의 존엄이 심각하게 도전받는 세상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을 희생해도 된다는 죽음의 문화와 가치관이 만연합니다. 힘

없고 나약한 태아를 살해해도 된다는 법안이 지금 국회 심의를 앞두고 있습니다. 만약 성모님의 순종과 희생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탄생도 없었

을 것이고, 인류의 구원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순

종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서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입니다.


  성탄의 신비는 또한 우리를 창조 질서의 회복에 눈뜨게 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은 기후 위기,

식량 위기, 환경 위기 등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환경과 생태를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공동의 집’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마태 7,21-26 참조).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환경을 지키고 생태를 보존하는 습관을 들이고, 나아가 당연한 문화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감염병 대유행의 전례 없는 위기는 국제 관계의 흐름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하였습니다. 각 나라는 자국의 실리만을 추구하던 방식으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 협력하고 나누는 상생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75년간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의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과 북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비추시는 생명의 빛이 화해와 평화의 길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밤 9시 주모경 바치기’ 기도 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께서는 지속해서 이 기도 운동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대림 제1주일에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는 질문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천주교인으로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 나는 천주교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천주교인이어서 기쁘고 자랑스러운가? 특별히 우리에게 허락된 은총의 희년을 천주교인답게 보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한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고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경배하며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나아가 경배드리며 기도합시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할 수 있기를,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기를, 환경을 지키고 생태를 보존할 수 있기를,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떳떳하게 응답할 수 있기를 다짐하면서 기도와 선행에 온갖 힘을 기울여 주시기를 빕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0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온 세상의 기쁨인 성탄

 

  형제 자매 여러분, 어둡고 불안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평화와 기쁨을 주시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알리는 천사가 두려움으로 가득한 목자들에게 전한 말은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온 백성에게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였습니다.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두려워하지 마라’는 위로가 담긴 기쁜 소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해 말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거센 속도로 번져, 이제는 전 세계가 코로나로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었으며, 감염을 막기 위해 여러나라가 도시 안에서의 이동을 금지하거나 국경을 폐쇄하기도 하여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어려움들이 생겨났습니다.

 

  생활 속에서는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생활화하면서 예전의 활기 넘치고 친밀

했던 인간관계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적 긴장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긴장을 해소해 줄 여러 만남이 차단되거나 제한되어 버렸습니다. 또 집단감염을 우려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문화시설이나 학원, 유흥업소나 식당들이 정지되거나 제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작은 규모의 기업이나 소규모 공장들을 비롯한 상점들도 문을 닫는 곳이 늘어, 직장을 는 사람들이 늘어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무엇보다 코로나19의 심각함은 우리 신자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던 미사마저도 일시적으로 중단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습니다. 박해시대 때도 계속하였다는 미사였지만,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집단 감염의 위협 앞에 세상 속에 사는 교회도 모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최근 집단 감염이 늘어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됨에 따라 극소수 제한된 인원만이 미사에 참여할 수 있어, 부활 대축일에 이어 성탄 대축일의 기쁨도 거룩한 미사로 함께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느닷없이 찾아온 코로나19는 우리가 살아온 그동안의 일상과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가난과 절망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극심한 고통속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도 만나지 못하는 가운데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그리고 중환자실 등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청년들이 취업난으로 겪게 되는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맞게 된 코로나19는 그들의 삶을 심하게 압박하여, 그들에게 우울증만이 아니라 극단적인 선택에 대한 충동이 몇 배로 증가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청년들뿐 아니라 삶의 어려움을 겪는 모든 세대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누가 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어둠에 잠긴 세상에 빛이 되어 주며, 그 누가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길이 되어 줄 수 있을까요? 바로 성탄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두움으로 가득 차고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에 빛과 참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보잘것없는 고을 베틀레헴, 초라한 말구유에 아기 모습으로 태어나신 그 분이 세상을 구할 구세주이십니다. 이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러 갑시다. 목자들처럼 가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구유에 누워 계신 구세주께 경배드립시다. 그 

분께서는 작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우리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실 분이십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코로나의 거센 위협이 언제 멈출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고, 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걱정스러운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의 위험과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

  예수님을 만나고 신앙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성체조배는 무엇보다 좋은 기도입니다. 감실 안에 모셔져 있는 성체 앞에 앉아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며 하염없이 기도하는 성체조배는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화를 맛볼 수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기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태 11,28)는 말씀을 듣는 듯한 성체조배를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본당 사목자들이 권장해준다면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둘째, 교회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가지의 좋은 기도는 성당을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집에서도 얼마든지 사사로이 바칠 수 있습니다. 평소 많이 해 보지 않았던 기도들은 새로운 기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셋째, 최근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코로나의 어려운 시간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독서로 위안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라는 너무나 훌륭한 보물 같은 책이 있고, 영적인 성찰을 하게 해주는 영성 서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보내는 시간은 우리의 신심을 키워 줄 것입니다.

  넷째, 우리 교구 평협에서 코로나19 이후를 준비하는 교회라는 지향으로 설문조사를 한 바 있었는데, 미사 중단 후 경험하게 된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미사에 대한 간절함이 커졌다는 것’과 ‘가정에 대한 소중함과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 사랑 실천에 관심이 커졌다’라는 점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교회로서의 가정’을 실천하며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모두 함께 모여 성전에서 거룩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2020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이 놀라운 신비는 이천 년을 넘게 이어 온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며 이 기쁨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하지만 마냥 성탄의 기쁨을 나누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이 매우 암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위기 상황 속에서 올 한 해를 보냈습니다. 사람 사이의 전염력이 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사상 초유의 비대면 문화가 생겼습니다. 특히 성당에 모여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우리 신앙인들이 느끼는 충격은 더 큰 것 같습니다. 파스카 성삼일과 부활 대축일마저 성전에 모여 함께 미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온라인으로 중계되는 미사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를 짓고도 고해성사를 통해 화해하지 못하고, 주님의 성전에 모여 목청껏 성가를 부르며 성체를 모실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편하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이 멈춰 버린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변에 누가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고, 마스크를 제대로 썼는지, 감염자는 아닌지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사람들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이런 상황이 끝나고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코로나19의 상황 아래에서 추운 겨울을 맞았습니다. 올겨울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더욱 혹독한 계절이 될 것입니다. 경제 활동이 얼어붙어 경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거리두기 단계의 강화로 서민들은 생계 활동을 이어 나가는 것조차 버겁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들의 올 겨울나기는 더욱 힘들 것입니다. 연말의 다양한 자선 활동도 위축되어 복지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외된 사람들의 삶은 더 힘겹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적극적으로 자선에 앞장서며,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사랑의 봉사 행위를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어두운 세상, 암울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았습니다. 한 줄기 빛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비칩니다. 이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그 빛은 바로 ‘말씀’이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살고 계십니다. 그 말씀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요한 1장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는 이 엄청나게 놀랍고 ‘기쁜 소식’(福音)은 오늘 천사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기쁨 가운데 희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시 사랑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 교구는 교구 설정 120년을 바라보면서 10년간의 장기 사목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저는 이번 ‘사목교서’를 통해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말씀, 친교, 전례, 이웃사랑, 선교라는 다섯 가지 핵심 가치를 2년마다 하나씩 실천하며 살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첫 2년 동안 ‘하느님 말씀을 따라’ 라는 주제로 복음 말씀 안에서 힘과 희망을 얻어 다시 일어서자고 독려했습니다.


  말씀은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내 안에, 내 마음속에 계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내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 안에 뿌리 내린 말씀의 씨앗을 싹 틔워야 하겠습니다. 물과 거름을 주고 햇볕을 잘 받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길바닥에 떨어져 새가 쪼아 먹지 않도록, 돌밭에 떨어져 말라 버리지 않도록, 가시덤불에 떨어져 숨 막히는 일이 없도록 살피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잘 자라나 어떤 새도 쉬어갈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마태 13,1-8 참조) 그것이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길이고,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다시 한 번,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리며, 말씀의 힘으로 이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 내어 희망과 기쁨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합시다.

 

 

2020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 환 길(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고통을 넘어 희망을 주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

 

 

  또 한 해가 저물고, ‘주님 성탄 대축일’이 다가왔습니다. 2,000년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과 같은 처지가 되시기 위해 비천하게 이 땅에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하지만 이 대축일은 과거사만

을 기념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새롭게 태어나신 그분을 맞아들이고 기뻐하는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를 공동체와 더불어 봉헌하게되어 더없이 기쁘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대축일인데, 2020년 성탄 대축일은 어딘지 모르게 비어 있는 것 같고 조금 허전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올 한 해 우리가 너무 움츠리며 힘겹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지 열달이 더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더 창궐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힘들다’ ‘어렵다’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 ‘백신’ ‘방역수칙 준수’ 등의 말들을 하도 들어서 이제는 지겹기도 하고, 마음에 와닿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지쳐있고, ‘이 어려운 시기가 끝나기는 할까?’ 걱정하면서도 얼른 끝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삶은 물론 온전한 신앙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평일과 주일 미사는 물론 성주간과 성삼일, 부활 대축일 미사도 공동체가 함께 봉헌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구 신앙 공동체는 이 비상시기 동안 방송 미사, 성경 읽기, 선행과 자선 등을 통해 신앙의 길을 찾으며 지내 왔습니다.

 

  이 어려움은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온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인간의 욕심과 오만 때문에 저질러진 많은 어려움이 산재해있습니다. 우선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산업화, 과학화라는 미명 아래 지구의 온난화와 더불어 인간의 기본권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국가 이기주의가 극에 달하여 이웃 나라의 어려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국의 이익만 바라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징표의 의미를 찾고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도 주십니다. 그에 앞서 우리 스스로 먼저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삶을 계속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올해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탄 밤 미사 복음의 한 구절인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라는 말씀이 강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천사가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일러준 말씀입니다. 오늘 탄생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주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다. 너희가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오로지 나만 믿고 나에게 의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아파하고 그 고통에 함께 하겠다.” 이 말씀이 바로 아기 예수님의 성탄 선물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는 이 어려움을 이겨낼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풍성한 성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는 더 큰 빛이 비추리라는 희망을 안고 힘차게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

갑시다. 아멘.


<성탄>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 헨리 나웬 - 


■ 교구장 손삼석 요셉 주교

 

 

  

[청주교구]

 

 

 


 

 








   

[마산교구]

2020년 성탄 담화문

 

 

 

 올해 2020년은 중국 우한(武漢, 무한)에서 시작된 맹독성 폐렴이 코로나바이러스-19 팬데믹 사태로 번져 온 지구촌이 수라장이 되어버린 한 해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그런대로 잘 대처해 왔는데 겨울 들어 백신(VACCINE) 소식이 들리기가 무섭게 귀신들이 발악이나 하듯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마치도 예수님께서 악령을 꾸짖으시니 고함을 치고 난동을 부리며 쫓겨나는 마귀들의 마지막 발악처럼 보입니다. 꼭 그렇게 되리라 굳게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 마음의 구유가 되어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림절이 깊어지면서 성탄 개그가 등장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코로나 때문에 구유에 격리 조치되어 보름 후에나 성탄 발표가 있을 거라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주님 공현 대축일(옛날엔 1월 6일이었으나 지금은 1월 2일~8일 사이에 오는 주일)도 바이러스 천지인 낙타 오염으로 동방박사들이 코호트 격리되어 음압병동에서 고난을 겪은 다음 비실비실 경배하러 오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런 개그야말로 가짜 뉴스임에 틀림없습니다.

 의로운 청년 요셉이 인간적으로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내 될 사람의 임신 소식을 알고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받아들인 일, 믿음의 처녀 마리아가 신랑 따라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왔는데 출산은 임박하고 받아줄 방은 없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고 짐승 먹이통 구유에 뉘였다는 이 기막힌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치 앞도 캄캄한 자신들의 운명을 오직 주님께 의탁하고 있는 믿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믿음의 백신이야말로 부작용 제로의 완벽한 백신이기에 예수 아기는 뱃속에서부터 코로나 감염이 완벽하게 보호되었고, 따라서 제아무리 맹위를 부리는 코로나 속에서도 예수 아기는 따로 격리되지 않으신 채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며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성탄 시리즈의 주요 멤버인 산타 할아버지 얘기를 곁들일까 합니다. 어릴 땐 산타 할아버지보다는 그 선물에 침 흘리고 살았는데, 일찍부터 담배를 피웠던 나에게는 크면서 또 다른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왜 산타 할아버지는 꼭 굴뚝을 통해 오시는가? 나는 최근에야 그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이긴 합니다만, 아마도 담배 냄새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이들이 산타를 기다리는데 담배를 즐겨 피우시는 산타로서는 담배 냄새가 아이들에게 역겨울 것 같아서 굴뚝에서 나는 연기 냄새로 살짝 위장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왜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소외된 자를 위해 오셨다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소외된 자는 담배 피우는 영감님들인 것 같아서입니다. 집에서는 할머니에게 매일 구박 당하고 성당에 와서도 이 추운 날 저 바깥 외진 구석에 숨어서 피워야만 하는 가련하고 소외된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견진을 하러 본당을 가게 될 때 미사 후 단체 사진 촬영을 준비하는 짧은 시간 동안 성당 뜰 외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피우시는 할아버지께 얼른 다가가 담배 한 대 주시라고 청합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마치 일제시대 만주 허허벌판에서 독립군을 만난 양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사는 유일한 주교인 저는 저의 약점을 훌륭한 복음 정신(소외된 자를 위함)으로 위장하면서까지 이렇게 살아갑니다. 아마도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이 된 분들 혹은 알코올 의존도가 높은 분들도 저와 비슷한 부끄러움을 안고 사실 겁니다. 신앙인이면서도 믿음이 부족하여 이렇듯 부끄럽게 변명하며 살아가는 우리 의지박약한 사람들은 우리 힘으로, 우리 의지로 이겨내지 못하는 오랜 습성을 인정하고 믿음이 강한 분들보다 더 깊이, 더 간절하게 성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란 아무도 스스로 자기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 모습입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서 이러한 인간을 가엾이 보시고 마음이 아프셔서 인간의 처지가 되셨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성탄의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우리 천주교 마산교구 신앙공동체는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갈수록 훌륭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목소리 큰 사람들로 꽉 차가고 있습니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덜 훌륭하고, 덜 똑똑하고, 그저 삶의 일선에서 허덕이는 분들을, 하느님께서 예수 성탄을 통해 그리하셨듯이, 우리도 따뜻이 감싸고 어루만지며 보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2020년 성탄절에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지친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지친 세상에 기쁨과 희망’으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한 1,9)’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경축하며, 이 기쁨과 희망의 빛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밝게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1) 고통은 믿음을 확인하는 자리


사상 유례없는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불안감, 불신과 신앙생활의 제약, 그리고 건강에 대한 염려가 일상화된 삶에서 하루빨리 이 거센 풍랑을 이겨낼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맞바람을 거슬러 노를 젓느라 애쓰는 모습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혼자 뭍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안쓰러운 나머지 호수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습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담긴 말씀은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예수님의 행적에서도 발견됩니다.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오자,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오른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결을 잠잠하고 고요하게 만드시고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8,25)라고 물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 시험받고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신앙이 머물러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물으십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고(필리 1,29),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0,31).


2) 코로나19로 가중되고 있는 어려운 현실


빅터 프랭클의 자전적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인간성과 품위를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참한 현실 속에서는 삶의 의미와 희망이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만 급급해지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친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문제점들이 만연되어 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양극화 현상, 물신주의의 팽배, 갑질 문화, 끼리끼리의 배타적인 진영 논리, 이주민들에 대한 배척,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제, 환경 파괴, 불안정한 일자리, 기술 발전에 따른 노동력의 소외 등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의 근간에는 경제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보다 탐욕과 욕망을 우위에 두는 ‘무분별한 자유주의’와 소수 집단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냉혹한 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토대 위에 발생한 ‘코로나19 대유행’은 경제구조를 더욱 취약하게 하고 불균등을 심화하게 합니다. 또한, 지속되는 사회적⋅물리적 거리 두기가 타인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과 심리적 거리 두기로 발전하여 이웃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더욱 팽배하게 만들지나 않을지 걱정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맹자는 이상적인 인간, 즉 대인(大人)은 갓 태어난 아기 때의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의 대인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는 본질적으로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천지와 덕을 합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아니한 이를 지칭합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유학 사상이 주장하는 대인(大人)의 면모가 예수님 안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아기 예수님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6,22; 묵시 21,1)이라는 새로운 장(場)이 세상에 펼쳐졌고, 시작이며 마침(묵시 21,6)이신 분이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당당히 외치는 당신의 권능과 위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과 호수까지 당신께 복종하게 만드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진리로 거룩해질 수 있게 됩니다(요한 17,17).


4) 지친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고통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향하는 온갖 조롱과 치욕과 비웃음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라고 외치면서 더욱 힘차게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하느님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표시로, “우리 성당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교종의 뜻을 현실에 맞게 이해하자면, 정부의 방역 수칙에 따라 성당 개방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회의 구성원인 신앙인 각자가 ‘선교하는 제자요 자비의 선교사’라는 인식을 가지고 개방적이고 주체적인 기쁨과 희망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임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복음의 기쁨」, 14항)이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기일수록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품고, 지역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여정을 통해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의 소금과 빛(마태 5,13-16)이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코로나19 대유행의 완전한 종식을 위해서는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연대와 공동체성의 회복을 통한 영적인 치유가 함께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이 어찌 되었든 코로나19가 대유행으로 급속하게 확장될 수 있었던 다양한 요인 중에, 이웃들에 대한 책임을 도외시한 채 주님의 영광이 아닌 이기적인 영광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우리 안에 있는 ‘정신의 세속성’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5) 낯선 사람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거룩한 탄생이 우리 모두의 기쁨이요 희망인 까닭은 그 분의 오심으로 버림받은 이들의 세상이 그들을 환대하는 세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웃에 배타적인 세상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친구들의 세상으로 변모되었기 때문입니다(루카 10,29-37 참조). 타인에 대한 배척과 지배가 만연했던 세상이 타인을 위한 아름다운 희생의 세상으로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마침내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마태 5,3-12 참조).


코로나 19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이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낯선 사람들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요한 15,15 참조)처럼 우리도 낯선 이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 안에서 하나 되는 형제애, 인류애입니다.


6) 지금은 형제애, 인류애의 물결을 일으켜야 할 때


지금은, 형제애, 인류애의 물결을 일으켜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살필 때가 아닙니다. 서로 희망이 되어야 할 시간입니다. 형제애의 물결은 바로 우리 가까운 이웃사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이며 기초입니다. 우리 이웃 중에서 소홀히 했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들,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낯선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환대합시다. 주변에서 굶주리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몸소 가장 작은 이로 오시어(루카 2,12 참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분이 되셨으니(이사 52,7 참조), 그 기쁨과 구원의 희망이 세상 모든 이들의 빛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구민 여러분!

가장 미천한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참 평화와 위로로 여러분 모두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용기 내시기 바랍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2020년 12월 25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전주교구]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다집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모든 사람들을 환히 비추고 계십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교우 여러분 모두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여 평화를 가득 누리기를 빕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이민족들의 억압과 침략으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 하고 예언했습니다. 장차 구세주가 오시어 백성을 억압과 감금과 죽음 등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암울한 하느님의 백성에게 분명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었고,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을 충실하게 믿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약속은 오늘 예수님의 탄생으로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과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9). 이 빛은 어두운 세상만이 아니라 우리의 어두운 마음속까지도 환히 비춥니다. 아무도 이 빛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탄은 어둠을 몰아내시는 참빛을 경배하는 날이며, 그러기에 구원의 희망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는 축제일입니다.


이 성탄절에 저는 아기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원의 희망을 굳게 간직한 분들을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했습니다. 마리아는 구세주 탄생 예고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하고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천사의 말을 듣고서 믿었고, 희망의 불씨를 전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셉도 마리아의 잉태를 알아차리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지만 천사의 말을 듣고서 희망을 간직한 마리아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은 여관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그 애처로운 밤중에도 희망을 지키기 위해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탄생하신 아기가 바로 희망이심을 믿었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지켜냈습니다.


그 이후 그들은 성전에 올라가 아기가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 될 것이라는 예고를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아기에 대한 희망을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는 천사의 전갈을 듣고서 희망을 지키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나아가 마리아와 요셉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려 사흘 동안 애를 태웠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하며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마리아는 골고타의 어두운 오후 시간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아드님께 모든 희망을 걸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요셉 두 분은 그야말로 ‘희망의 지킴이’로서 하느님 백성에게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희망의 빛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물질만능주의, 극심한 개인주의, 소비주의, 상대주의 등의 그릇된 가치관들이 만연하고 있고, 경제적·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올해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더불어 어려움을 더욱더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탄은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부모님에게서 희망하는 법을 배우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보여주는 모범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기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는 일입니다. 사실 갓난아기는 그 부모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많은 기대와 더불어 희망을 안겨줍니다. 아기 예수님은 참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속이시지 않는 분이며, 또 언제나 성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다른 모든 희망이 기인하기 때문에, 그분은 절대적인 희망이십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 예수님을 자기 마음속에 온전히 모셨습니다.


둘째, 십자가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예수님 곁에 머무는 일입니다. 인생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더러 있습니다. 그야말로 캄캄한 어둠의 시간, 원망과 절망만이 난무하는 혼란의 시간입니다. 신뢰했던 사람의 배반이나 사업의 실패, 예기치 않은 불치병이나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 등이 그러한 절망에 이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때야말로 예수님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서 그분께만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고통의 이유로 그분을 멀리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다지고 키웠습니다. 십자가의 시간에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힘들 때마다 더욱더 자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당신 아들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두셨던 마리아는 혼인잔치의 곤경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알림으로써 잔치주인을 도와주었습니다. 희망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신 아기 예수님이 분부하신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댕기기를 원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빛을 환히 비추고 계십니다. 그 빛을 따라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절망을 물리치고 희망의 길로 나갑시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주교 김선태 (사도요한)

  

  

[제주교구]


형제애로 이웃을 바라봅시다.

 

 


  코로나19로 인한 불안한 현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신 개발 등으로 코로나 시대가 끝난다 해도 결코 예전 생활로 돌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감염성이 무서운 이 바이러스는 교회가 전례뿐만 아니라 소공동체 모임과 레지오를 비롯한 여러 만남을 가로막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자신에게는 올바른 시대적 징표를 바라보며,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소명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성전에서만 이루어지던 사목이 개개인의 일상 안으로 구체적으로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우리의 손과 발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과 귀가 그들을 향해 있고,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형제적 사랑”으로 가득 차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 안에 있는 연민과 사랑을 건드려 깨웁니다. 바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을 다시 보도록 합시다. 

  지난 한 해 동안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리 인간들이 저지르는 비인간성의 행태를 무수히 접할 수 있었습니다. 성 차별적인 문화 안에서 폭력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저질러진 범죄들, 엽기적인 살인사건들, 가정 파괴로 일어나는 죄악들,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에 대한 외면, 각종 재해에도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 개발론자들의 탐욕이 부른 환경 파괴들, 일부 종교인들조차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일들, 국민을 돌보지 않는 여·야 정치 세력의 자기중심적인 모습 등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 인간이 이러고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죄 많은 우리 인간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강생육화(降生肉化)의 참 의미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다시금 새로운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그러진 모든 상황을 당신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구원받은 은총의 존재로 되돌려 놓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 상태가 아니라 참된 자유의 사람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새롭게 되었으니, 우리 사이에서도 이를 새롭게 하는 관계로 만들어가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닙니다. 내 가족, 내 지역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특히 제주 사회는 아직도 풀어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최근 제2공항 갈등을 비롯하여 여러 개발에 따른 후유증을 경험하면서 어떻게 지혜롭게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가 우리 미래의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역사 안에서 제주4.3의 온전한 해결을 위한 후속 조치로 국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4.3특별법의 개정을 통해 제주도민의 오랜 아픔과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찾는 일도 중요한 우리의 책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게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권력과 명예, 재산과 지식, 업적과 재능 등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다운 것들에만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찬찬히 바라보며 이 아기가 바로 우리의 식별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면서도 비천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낮추고 비우신 모습처럼 우리의 진정한 사랑이 하느님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보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진정 다른 사람의 삶도 행복한 사랑을 누려야 한다는 “형제애”로 우리는 타인을 대하고 더욱 더 사랑해야 합니다. 고정된 잣대로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눈길을 우리 눈에다 담고, 그분의 자비하신 마음을 우리 안에 품으며 이웃들을 받아들입시다. 그리하여 인간이 되신 하느님 은총을 되새기며, 우리 자신이 기꺼이 다른 이를 돕고자 뻗는 손과 발의 수고로움에 동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구원의 시간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경황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삶을 잠시 멈추고 마음을 고요히 합시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인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 이웃들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선한 마음의 “형제애”로 받아들여 진정한 하느님 자녀 공동체로 가꾸어 나갑시다. 

모든 분들께 “사랑의 형제애”로 기쁜 성탄의 축복이 내리시길 기도합니다. 


                                            2020년 12월 24일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창우 비오

 

  

[군종교구]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I

사랑하는 군종교구의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마침내 2020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대축일이 다가왔습니다. 지난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일반생활과 경제생활만이 아니고 신앙생활에도 큰 아픔과 어려움을 겪었고, 상황이 좀 나아졌다 해도 아픔과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탄생의 큰 기쁨이 우리 마음에 깊이 느껴지기 힘든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새워 양 떼를 돌보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전해 준 다음 소식은 온갖 아픔과 어려움을 넘어 크나큰 기쁨을 갖게 해 줍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II

성탄 대축일을 맞으면서 전 세계의 모든 이가 반드시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위에서 읽은 성경 구절,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천사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가 예수 성탄의 의미를 가장 잘 요약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가 탄생하셨는가?” 바로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왜 탄생하셨는가?” 죄로 인한 멸망으로 향하던 인류를 구원하시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천사만이 아니고 훗날 예수님께서 복음전파의 삶을 시작하셨을 때 당신 친히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마태오복음사가나 루카복음사가와 달리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입을 빌어 탄생의 의미를 명확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당신 탄생의 의미를 가장 가까운 열두 제자들이 아닌, 주님을 알고 싶지만 이목이 두려워 밤에 몰래 찾아온 의회 의원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니코데모는 오늘로 치면 평신도, 아니 예비 신자에 불과한데, 그에게 당신 탄생의 의미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신 당신 탄생의 의미에 관한 다음 말씀은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복음말씀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예비 신자 니코데모는 주님의 열두 제자들도 미처 듣지 못한 예수님 탄생의 의미와 신비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특별한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날 밤 이후 니코데모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고,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신앙생활을 한 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직후 나타나 주님의 유해를 내려서 묻는 아름다운 봉사를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함께 수행합니다(요한 19,38-42 참조).

III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무엇보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이 최고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외아들을 보내시어(혹은 파견하시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외아들을 내주시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내주다”는 단순히 “보내다”보다 그 의미가 훨씬 더 넓고 깊습니다. “내주다(혹은 내어주다)”는 맡겨진 사명을 단순히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고 사명 수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명 수행을 위해 모든 수고와 고통과 희생을, 심지어는 죽임까지 당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는 깊은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으로 나아가는 동정심, 따뜻한 마음 자세,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 등을 포함하는 친절의 덕을 지니게 해주고,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겸손의 덕을 낳아 주며, 더 나아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희생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주시어”는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고, 특별히 인류 구원을 위해 아들이 겪어야 할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까지도 포함된 희생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 탄생의 의미를 말씀하실 때, 미래에 오게 될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까지도 예고하고 계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외아들을 내주시어”라는 표현 전에 하신 말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결과,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위한 속죄와 희생 제물로도 바쳐지도록 곧 고통과 죽임을 당하도록 내어주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이 크신 사랑을 묵상하면서, 이 사랑을 충만히 누리기 위해, 내가 알게 모르게 범하는 여러 가지 죄들과 갖고 있는 크고 작은 악습들을 깨닫고 겸손히 뉘우치고 통회하는 자세를 갖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래서 보다 깨끗해진 영혼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경축하도록 해야겠습니다.

IV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각자는 현재의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여 탄생하신 우리 주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지니면서 방법을 찾도록 합시다. 무엇보다 주님의 탄생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를 내어주는 사랑”의 실천 방법을, 현 사회 상황과 나의 개인 상황을 고려하는 가운데 찾아내도록 합시다. “나를 내어주는 사랑”은 자연스레 나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고, 나의 수고의 땀을 흘려주고, 나의 소유물을 어려움에 처한 이들과 나누도록 하며, 나의 가족이나 나와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지니는 이들만이 아니고 세상 모든 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많은 이들이 함께하는 모임 참석을 자제하는 것과 다른 이에게 감염의 위험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등을 고려하면서 나에게 합당한 “나를 내어주는 사랑”의 실천방향을 찾도록 합시다. 아마도 올해 성탄절 미사는 음식을 함께 나누며 성당 가족 모두가 웃음 가득한 가운데 갖는 형제적 친교를 갖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잘 참고 기다리다가 내년 성탄절 미사 후에는 성대한 친교의 잔치를 갖는 축복을 누리시게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히 내리길 기도합니다.


2020년 주님 성탄 대축일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F.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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