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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본당소개
교구/지역/지구
서울대교구
중서울지역 / 제4 종로지구
( 지구장 : 홍기범 신부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57 (가회동)
전화번호
☎ 02-763-1570
설립일
1949-09-17
주보성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임신부
윤종국 (마르코) 신부 (부임 : 2020-02-18)
수녀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 02-763-1423
팩스번호
☎ 02-762-7758
신자수
1,375 명
역사 및 연혁

 ▶ 여명기(1945년-1949년)

 

<8.15 광복의 기쁨과 본당 설립 사명>

 

  1945년 8월15일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에 울려퍼진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는 종소리와 함께 조국은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당시 서울에는 명동(종현), 중림동(약현), 혜화동(백동) 세 본당만이 있을 뿐이었다.

  감격스런 조국 광복의 흥분된 열기 속에서 명동 본당의 구역 회장단 13명은 명동 성당 회의실에 모였다. 무엇보다 일제의 종교 탄압에서 풀려난 당시, 지하에 감추어 두기만 했던 “복음의 씨”를 밝은 태양 아래 뿌려야 하는 과제를 절감했다.

 

  그들은 12사도들의 행함을 본 받아, 각자의 담당 구역에 본당을 세워 신앙의 터전을 굳히고 복음 전파에 헌신하고자, 맨 주먹이나마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이 사업에 뛰어들 것을 다짐하였다. 그들 중 임병팔(林秉八)회장은 지금의 가회동 본당 구역(광화문 네거리에서 동으로 종로3가, 권농동을 돌아 북으로 삼청동에 걸치는 북촌 19동)을 맡았다. 암담하기만 한 전도를 앞에 두고 수년간 궁리하였으나, 결국 적산가옥(일본인 소유였던 집)이 없었던 북촌에는 건물이나 토지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중엔 무일푼이었다. 임(林)회장은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는 말씀에 따라 우선 기도회나마 가질 수 있는 장소라도 구하여 놓고 차차 뜻 있는 교우 몇 명이라도 모여 주님께 매달려 보고자 하였다.

 

<성전 건립의 태동>

 

  그리하여 현 본당 터에 거주하던 전마리아 집을 방문하여, 매주 한번씩 방 하나를 세전(貰錢)없이 제공 받기로 승낙을 받았다. 둥지를 얻은 기쁨에 이 소식을 명동성당 이토마 신부님에게 보고하였다. 이 신부님은 격려와 함께 배수산나를 소개하여 함께 노력 할 것을 당부하였다. 신심과 사명감이 투철한 배 수산나는 전 마리아의 수양딸로서 전 마리아에게 살고 있는 집을 팔도록 권하였다. 전 마리아는 집을 내어 주면서, "영혼과 육신이 다 천주께서 주신 것이고, 이 집 역시 천주님의 것인데, 당신께서 당신의 것을 쓰시겠다니 기꺼이 내어드릴 뿐이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가회동 본당 “설립”의 꿈은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 창설기(1949년-1950년)

 

<가회동 본당의 첫 미사 봉헌>

 

  1949년 4월 1일 현재의 성당자리에 있던 가옥을 매매 계약하고, 2개월 후 교우들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잔금을 치렀다. 방 두 개와 그 사이에 놓여있던 마루를 트고 방 아랫목에 제대를 꾸몄다. 드디어, 1949년 6월 명동 본당 주임 장금구 신부님을 모시고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가회동 본당 설립 인가를 받았다.

 

  당시 본당 교세는 전 가족이 신자인 가정 5세대를 포함하여 약 30세대로 신자수는 40여명였으며, 주일미사에는 25명 정도, 평일미사에는 4-5명 정도 참례할 정도로 조그마한 성당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성당 용도로 구입한 토지와 건물은 가회동 30-3번지의 대지 209.3평에 건평 목조와즙/ 양철집 58.50평에 목조초가 23.25평이었으며 총 매입금액은 400만환 이었다. 초기 가회동 본당 설립기금에 기여한 분으로는 전 마리아, 배 수산나, 이 요안나, 이 우술라 등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전 마리아의 미사예물 100만환, 익명의 찬조금 70만환, 교우들의 성금 230만환으로 구입하였다.

 

  본당을 설립하였지만 신자 수는 적고 유지비용 조달도 어려운 처지여서 초대 윤형중(마테오) 주임신부님은 2년간 명동에서 통근을 하시며 미사 집전 및 본당 운영을 하셨다. 뒤이어 복자수도회 방유룡 레오 신부님께서 주임신부님으로 겸임하시던 중 한 달만에 6.25사변이 발발하여 본당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 시련기(1950-1953년)

 

<6.25사변>

 

  6.25사변 동안 오랜 피난살이로 버려진 본당건물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에 의하여 접수되었고, 괴뢰군의 “인민일보”신문사로 사용되었다. 인민군이 철수한 다음 본당 건물은 재사용이 불가능 할 정도로 초토화 된 상태였다.

 

<폐허의 성당을 가꾸며>

 

  서울 수복 전에 임병팔 회장은 미리 도강하여 본당에 찾아왔다. 뒤이어 황해도 사리원에서 사선을 넘어오신 제3대 박우철(바오로)신부님께서 주임신부님으로 오셨다. 파손된 본당 건물을 이곳저곳 손길 닿는대로 수리를 하였으나 그대로 사용하기란 도저히 불가능 한 상태였다. 박 신부님은 파손된 성모상을 손질하여 현 사제관 터에 있던 고목나무에 기대놓고 주위를 정돈하였다. 제대는 없어진지 오래고 마당 여기저기에 뒹구는 해골들과 유골들을 정리하여 산에 묻어주며 시간을 기다렸다.

 

 

▶ 재건기(1953년-1954년)

 

<성당 재건 준비>

 

  얼마 후, 박 신부님은 교회나 학교를 짓는 데 무상으로 원조해 준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1953년 임 회장과 이 아오스딩 형제님이 현재의 헌법재판소에 주둔하고 있던 미8군 담당관을 찾아가서 성당의 실정을 설명하고 미8군의 주선으로 주한미군민간원조단(AFAK)에서 원조로 물자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연로하신 박 신부님을 대신하여 백민관 데오도로 보좌신부님께서 AFAK를 수없이 왕래하며 수고하셨으며, 임 회장과 실무진들은 노임과 시설비 염출을 위해 노력한 끝에 결국 성당 신축허가 절차를 마쳤다.

 

<성당 신축공사 착공>

 

  백 신부님은 1954년 신학교로 전임하시고, 후임으로 박병윤 토마 보좌신부님께서 부임하셨다. 건축물자를 들여올 자금 조달이 안되어 착공을 못하던 것을 1954년 6월 6일 헌집부터 헐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자금도 없이 큰 공사를 시작하는 것은 무모하다”하여 교우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전이니 반드시 이루어 놓아야 된다는 박 토마 신부님의 사명감에 감동한 이 마리아(배 수산나의 모친)가 부자유한 몸을 이끌고, 본당에 찾아와 금가락지를 빼어 희사하였고 이어 이 수산나가 돌제대를, 배 수산나와 최 말따가 전기 시설비를 희사하였다. 이러한 일이 신축공사 착공 추진의 자극제가 되어, 서 수산나, 이 막달레나, 박 리도비나, 이 요안나, 박 마리아, 이 베로니카, 이 우술라, 이 엘리사벳 등 부인회에서 당시 총회장을 맡게 된 이일 아오스딩을 도와 본당 관내 신자들의 가가호호 방문하고 다른 본당까지도 순회 방문하여 성금을 모으는 한편, 따로 100만환의 계를 모아 헌금하여 착공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구역외의 본당들에서도 본당 모금액과 맞먹을 정도의 성금을 모금해왔다. 교우들 중, 이 아우구스띠노와 서정식 형제님은 사재를 담보로 하여 120만환을 대부받아 공사비에 융통해 주기도 했다.

 

<성당 준공 봉헌>

 

  어떤 이들은 하늘에 먼저 부르심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외국으로 이민하여 지금은 본당을 떠나고 없으나 이들 열성적이었던 유지들을 중심으로 주임신부님의 지도 아래 초대교회적 소명감으로 주님안에 하나로 뭉친 교우 자매들의 희생과 노력은 마침내 그 열매를 맺게 되었다.

 

  1954년 12월 3일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본당 주보성인 대축일날에 성당 신축 숙원 달성의 기쁨과 감격 속에 성직자와 교우들은 자재원조를 해준 AFAK 미군장교들과 구역외에서 찬조해 준 은인들을 내빈으로 모신 가운데 노기남 대주교님의 집전으로 축성미사를 봉헌하였다.

 

<성전 건축공사의 규모>

 

  준공된 건물은, 벽돌집 함석지붕으로 1층 81.77평, 2층 14.77평, 3층(종탑) 2.77평 4층(종탑) 2.77 지하실 32.77평으로 연건평 134,85평이었다. 공사비로 교우성금 및 잔여 자재 운용 300만환, 계 모금 100만환, 은행대출 120만환, 익명 찬조금 30만환 등 총550만환이 들어갔다.

 

 

▶ 성장기(1954년부터-현재)

 

<단체조직 및 신심활동 시작>

 

  성당 신축으로 안정된 본당 교우들의 신심생활은 그때까지 큰 몫을 해왔던 구역회장단(부인회)과 사목위원회를 뿌리로 새로운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한편 본당 행정사무의 원활한 업무를 위해 1965년 9월부터 사무장직을 개설하여 초대 사무장으로 이학수(바오로)형제가 취임하였다.

 

  1959년에 중년 여성교우들을 단원으로 한 레지오 마리애 “상아보탑”쁘레시디움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62년에는 남자대학생 및 고등학생을 단원으로 하는 “다윗의 적루” 쁘레시디움을 조직하였으며 여대생과 여학생을 중심으로 한 “샛별” 쁘레시디움을 조직하여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1965년 복사단이 발족하여 김 미카엘을 초대 단장으로 하여 복사활동을 하였으며, 1964년 학생들의 자질 향상과 본당내 신심활동을 목적으로 창립된 학생회가 1968년까지 활동하였다. 또 학생회의 발족에 앞서서 성인들로 구성된 성가대가 조직되었으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 ‘소화회’라는 어머니 성가대로 개편하여 내실을 기하였다.

 

<다목적 용도의 사제관 신축>

 

  1966년 12월 제7대 조인환(베드로) 주임신부님께서 부임하셔서 현 사제관 자리가 빈터로 있는 것을 보시고 이곳에 2층 건물을 신축하여 유치원과 사제관으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본당신부님의 의견을 받아들인 교우들은 신축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서 수산나, 박 마리아, 김 헬레나, 노 루시아, 김 마리아 자매님 등 부인회를 중심으로 모금 및 건축에 관한 실무에 착수하게 되었다. 특히 서 수산나 자매님은 두 차례에 걸쳐서 150만환을 헌금하여 모금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67년 7월 공사가 한창 진행중 조인환 신부님은 교구 당가신부로 전임하였다.

 

  사제관 신축은 제8대 최익철(베네딕도) 신부님께서 설계를 일부 변경하시고, 교우들의 계속적인 정성어린 성금에 힘입어 1968년 6월 8일 준공됨으로 비로소 현재의 본당건물의 전체 윤곽이 잡혔다. 건축내용은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식 4층 건물로 연건평이 179.16평, 지하실 4.45평이였고, 소요된 총공사비용은 대략 7,544,300원 이었다.

 

<유치원 및 주일학교 개설>

 

  1969년 1월 17일 유치원 인가를 받아 신축된 사제관 1층에 원아 47명으로 성바오로 수녀원 수녀님을 모시고 1969년 3월 유치원(초대 원장 : 최익철 신부)을 개원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복자회 수녀원에 위촉했던 주일학교를 윤 니로나오 등 5명의 평신도가 맡아 새로운 체제로 주일학교 운영을 시작하였으며 6개 학급으로 증설시켰다.

 

<본당묘지 마련>

 

  본당은 교우가 사망하여 장례를 치를 때마다 타 본당의 묘지를 얻어 쓰는 불편이 많았다. 최 신부님께서 제5대 주임신부님이셨던 신인균(요셉) 신부님으로부터 벽제 소재의 묘지 5만평을 260만원으로 인수 계약하고 계돈 100만원, 은행융자 70만원 및 묘지를 일부 예매한 대금으로 전액을 충당함으로서, 본당의 구색을 하나 더 갖추게 되었다. 묘지 구입에는 사목위원 지휘정 요셉, 박태일 시몬, 황석흥 베드로와 이 막달레나, 김 헬레나, 황 마리아, 박 마리아 등 여러 교우들의 노력이 컸었다.

 

  현재는 기존에 예매했던 분들의 보유분에 한하여 사용이 제한되며 신규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또한, 지목이 임야인 땅의 활용을 위하여 여러 가지 안(案)들이 제시되곤 하였으나 아직 실행에 옮겨진 것은 없다. 또한, 묘지의 일부가 인접지역의 소유주와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여 수년에 걸쳐 소송이 진행되었으며 이 문제로 당시 이종기(토마스) 사무장이 수시로 법원과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는 고충을 격기도 하였다. 묘지문제의 역사를 알고계시는 전 총회장이셨던 박인환(요셉) 회장님과 이종기(토마스) 사무장께서 부단히 노력하시고 고생하신 결과 좋은 결과로 무난히 타결되었다.

 

<수녀원 개원>

 

  1966년 울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소속 권금순 아우구스티나 수녀님이 파견되시어 전교수녀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본당에 정식으로 수녀원 분원을 설치한 것은 1970년 7월 26일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유 울바노 수녀님이 부임하여 성당 지하실에 분원을 마련하고 부터이다. 이후 1984년부터는 다시 울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에서 분원을 운영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전 부분수리>

 

  사제관은 신축건물이지만, 성당은 15년간 수리없이 지냄으로써 비만 오면 지붕이 새고 건물자체가 퇴락하여 있었다. 제9대 주임신부 최석우(안드레아) 신부님은 "이런 건물에 주님을 모시는 것은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차라리 신부도 성당 제의실에서 자야 마음이 편하겠다." 는 말과 함께 성당 수리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에 교우들은 자체 성금 200만원을 모아 성당 지붕을 다시하고 외벽을 화강암으로 붙이는 대공사를 시작하였다.

 

<내실면에 주력>

 

  제10대 이창숙(그레고리오) 주임신부님께서 부임할 즈음에는 사제관 신축, 유치원 개설, 묘지확보, 수녀원 분원설치, 성전대수리 등 웬만한 중요사항은 완성된 때 이였다. 또한, 신심단체 조직 및 활동도 상당한 진척을 이루고 있었다. 이를 파악한 이 신부님은 영신지도에 더욱 힘을 기울이시고 검소하고 온유한 사목활동을 하시고자 솔선수범 하였다.

 

<유치원 학급증설 및 실내수영장 개설>

 

  1973년 1월 현대식 유치원으로 발돋움 하고자 실내수영장도 개설하였으며, 한 학급이던 것을 두 학급으로 증설하였다. 원장 수녀님과 보모교사들의 노력으로 유치원은 지역사회의 새로운 선교수단 및 장소로 발전해 나갔다.

 

<신심활동 활성화 >

 

  건강 사정으로 쉬게 된 이창숙 그레고리오 신부님의 후임으로 은경축을 지낸 이계광(요한) 신부님께서 1973년 5월 제11대 주임신부님으로 부임하셨다. 이계광 신부님은 풍부한 사목 경험에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본당 각 단체의 신심 활동의 안정화를 가하였다. 이어 1978년 9월 5일 제12대 임응숭 요한 주임신부님께서 부임하시자 본당이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중년부인들로 구성된 성모회가 조직되었으며, “평화의 모후”, “하늘의 문” 등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조직되었으며, 1978년 연말에는 정 요한, 이 요아킴, 김 알렉시오 등이 주축이 되어 청년회가 구성되었다. 새로 입교하여 영세 받는 신자수도 상당히 증가하였다.

 

<노인대학 설립과 골롬바의 집 운영>

 

  1991년 제14대 박순원 이냐시오 주임신부님께서 부임하셨다. 본당 관할지역 내에 노인의 수가 상당한 것을 주의깊게 여기신 박 신부님은 노인들의 여가선용과 신앙지도를 겸한 프로그램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박 수산나, 박 마리아 자매님과 몇몇 신자들을 교구 주관 교육에 파견하여 우선 요원 양성을 시작하였다. 이후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한솔노인대학”을 설립하여 지역사회에 기여는 물론이며 선교활동의 중요한 장을 만들었다.

 

  또한, 삼청동 산 3-4번지의 단독주택을 매입하여 홀로 오갈데 없는 노인들을 돌보기 위한 봉사사업의 일환으로 “골롬바의 집”을 개설하였다. 가옥을 매입하였으나 원체 낡은 집이여서 수리를 위해 박 신부님께서 직접 사목위원들과 함께 등짐을 지어 나르며 노동을 하였으며 자재만 구입하고 전문 기술자 한 명을 고용하여 한 달만에 집수리를 완성하는 집념을 보이셨다. 1991년 8월 일곱분의 할머니들을 모시고 ‘골롬바의 집’을 개원하였으며, 빈첸시오 회원들, 본당 각 단체 봉사자들과 수녀님들께서 보살펴드렸다. 현재는 돌아가신 분과 요양시설로 옮기신 분을 제외하고 두분만을 성당 인근의 ‘계동빌라’로 옮겨 모시고 있다.

 

<본당 여름휴가 “어우러지” 실행 및 종탑 보수공사>

 

  1994년 제17대 소원석 가브리엘 주임신부님께서 부임하셨다. 프랑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자마자 부임을 하신 젊은 사제를 본당신부님으로 맞이한 가회동 본당은 모든 면에서 대단히 활동적이였다. 주일학교의 등록제를 실시하고, 본당신자 모두의 여름휴가인 “어우러지”를 2년 주기로 1, 2회 성공적으로 실시하였으며, 그것도 한참 나라 안 밖으로 어려웠던 “IMF” 시절에 치뤄내는 등(1회 속리산 수련원. 2회 의정부 한마음 수련원) 대단한 추진력을 보이셨다.

 

  또한 낡은 성전 지붕을 동판으로 새로 씌우고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종탑 상단부위의 마무리 작업을 완성하여 사각뿔 종탑을 완성하였으며, 손수 공구통을 들고 다니면서 성전 건물 구석구석을 고치시는 적극성을 보이셨고, 성전 내부의 승압공사와 조명시설까지 마무리 하셨다.

 

<레지오 재정비 및 교육관, 사무실 신축>

 

  소원석 신부님은 이어서 1996년 가을 꾸리아 ‘아치에스 행사’날을 기하여 전 레지오 단원들의 새로운 각오를 표명하는 선서를 새롭게 하였으며, 이때 각 단원은 레지오 활동중에 1명이상의 전교를 하겠으며 신앙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표시하는 각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 각서를 제출하는 사람에 한하여 레지오 단원으로 받아들이고 쁘레시디움을 새로 조직하도록 하여 상당수 각서를 제출하지 않은 사람은 이때 레지오를 떠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쁘레시디움의 단원 수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레지오의 활동은 꾸준히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8년 가을에 본당 입구 옆에 있는 몇 채의 가옥이 도시계획으로 정리되면서 토지 소유주와 성당간에 이들 짜투리 땅의 매매 협상이 시작되었다. 몇 차례의 협상을 거쳐 매매가 성사되었다. 이 로마노, 서봉도 토마스아퀴나스, 하영주 벨라뎃다 자매님 등의 봉헌으로 우선 토지 매입을 하였고, 전 신자를 대상으로 자발적인 참가를 위해 소원석 신부님은 상업은행에 봉헌계좌를 개설하여 교육관 및 사무실 신축 모금에 들어갔다.

1999년 3월 지하 1층 지상 1층의 아름다운 교육관과 사무실이 완성되었다. 소원석 신부님 재임 말년에 가회동 본당 숙원사업으로 지칭되어 온 교리실, 사무실 신축을 달성한 것이다. 때 마침 종로구청에서 실행한 가회동 삼청동간의 도로 확포장 공사 계획에 맞물려 성당 문 앞이 넓은 대로로 시원하게 포장되어 좋은 마무리가 되었다. 부지매입 및 총공사비는 7억원에 이르렀다. 건물모양은 가회동 지역이 한옥보존지역임을 감안하여 지붕은 기와형식으로 했고, 기존의 성당 건물과도 조화를 이루도록 건물 높이며 벽돌 색상까지 안배하였으며, 물받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온갖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고생하신 소원석 신부님은 신축건물 축복식을 후임 주임신부님에게 미루고 99년 4월 5일 압구정동에서 분리 신설된 압구정1동 신설 본당 주임신부님으로 떠나셨다. 소원석 신부님은 서품 후 첫 번째 주임사제로 부임하신 가회동 본당에서 열과 성의를 다하여 사목에 온 정성을 쏟았다. 가회동 신자 모두는 인간적인 모든 아름다운 추억들을 기억속에 간직한 채 소원석 신부님께서 고생하신 모든 공로가 하느님 대전에는 영광이 되고 신부님께는 하늘에 쌓아둔 당신의 월계관이 되기를 기도하며 송별 미사를 봉헌하였다.

 

<본당설립 50주년 행사 및 성서100주간 시작>

 

  1999년 4월 5일 가톨릭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로 계시던 이문주 프란치스코 신부님께서 제17대 본당 주임신부님으로 부임하셨다. 새로 부임하신 이문주 프란치스코 신부님은 신축 교육관 및 사무실을 1999년 4월 21일 축복하셨다. 신앙의 활성화를 위해 전 교우를 대상으로 “성서100주간”을 시작하셨고, 특별히 ‘성목요일’ 주님 나눔의 정신으로 설립된 “성목요회”는 매주일 신자는 물론 이웃과 함께 하는 나눔의 잔치를 통해 비신자들이 부담없이 신자들과 함께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당에 출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전 신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신자 개개인의 면담을 통한 영성지도에 착수하였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으며 50주년 기념미사와 함께 다양한 행사를 실시하였으며, 본당 역사와 현재의 본당을 후세의 교우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마당에 타임캡슐을 매장하였다.

 

<베트남에 성서보내기 운동>

 

  2001년 베트남에 성서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여 자유화 바람과 함께 성서를 필요로 하는 베트남의 성당과 수녀원, 신학교에 성서를 구입할 후원금을 보냈다. 2003년 7월에는 현재 추기경이 되신 베트남 호치민 대교구장이신 팜민만 대주교님이 본당을 방문하시기도 하였다.

 

<장년회 활동 활성화>

 

  2002년에는 본당 장년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장년회(일명 약종회)를 설립하여 본당의 장년신자들과 비신자들이 함께하는 족구, 축구를 통해 화합과 전교의 틀을 만들어, 본당 행사에 장년들이 많은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각 본당에서 축구단을 설립하는 추세에 맞추어 2005년 9월에는 장년회 축구팀을 ‘하비에르축구단’으로 새로 창단하였다.

 

<본당 가정간호사업 실시>

 

  2004년 3월 이문주 프란치스코 신부님은 양재동성당으로 부임하시고, 오류동성당에 계셨던 최승정 분도 신부님께서 제17대 주임신부님으로 오셨다.

 

  최승정 신부님은 오셔서 본당 야외미사 및 친교행사(경기도 광주시 ‘성분도복지관’)를 개최하였으며, 본당바자회 및 장기대회, 연도대회 등을 개최하여 본당 신자들간의 화합과 친목을 위해 많은 애를 쓰시고 계신다.

 

  삼청동의 고지대에 있던 ‘골롬바의 집’을 성당 인근의 계동으로 옮겨 할머니들의 성당 미사참례 및 활동에 불편을 덜어드리고, 노인 신자들이 많은 지역적인 특성을 감안하여 2005년 1월부터 가톨릭성모병원과 연대하여 가정간호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가회동 신자 모두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지내고, 기쁘고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60주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새롭게 가다듬어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사회속에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매일 미사전에 한마음으로 기도 바치고 있다.



1.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출구로 나오셔서 나오신 방향으로 1) 도보 : 7-8분 거리가 되며, 2) 마을버스 : 안국역 2번출구 앞에서 2번 마을버스 탑승하시고 3번째 정류장(돈미약국, 전통병과앞)에서 하차하시면 길 건너편에 성당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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