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창4동성당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홍) 2024년 3월 29일 (금)주님 수난 성금요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창4동성당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용서 (마태오 18,21-35)

55 김종업 [rlawhddjq] 2017-03-21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용서 (마태오 18,21-35)

 

 

다니엘의 세 동료 가운데 하나인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희생 제물로 받아 달라고 기도한다. (다니엘 3,25.34-43)
그 무렵 25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34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35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36 당신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7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38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39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40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41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42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43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냐는 물음에, 자기 종들과 셈을 하는 임금의 비유를 드시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신다. (마태오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불 속의 다니엘의 세친구(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와 주님의 천사 (다니3,49~50)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다니3,25.34~43)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38~40) 

 

히브리어로 '다니엘''하느님께서 나의 심판관이시다' 뜻이다. 다니엘서의 작중 연대(글 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네부카드네자르바빌론 왕좌에 오른 B.C.605년 이후부터 이고, 그의 통치 시절에 예루살렘 공략과 바빌론 유배가 크게 B.C.597년과 B.C.587년에 두 번 있었던, 여호야킨남부 유다를 다스리던 때였다(2열왕24,10~16; 에제1,2).

 

다니엘이란 한 인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적이다.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저자가 기록한 시점)는 마카베오 항쟁을 불러 일으킨 안티오코스 4세(BC175~164년)의 박해 때이다. 본문 자체가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가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다니엘8,9~13; 9,27; 11,31참조). 

 

그런데 기원전 164년에 있었던 성전 정화는 언급하면서도, 같은 해에 있었던 박해자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의 저작 연대 기원전 164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서 1~6장에 나오는 여섯 가지 이야기는 박해 상황에 걸맞지 않게 유머스럽고 긴장감이 덜하다. 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출중한 인물들이 고대 근동의 궁정안에서 벌인 활약상을 전하는 3인칭 궁정 설화의 전형적 예들이다.

 

이 궁전 설화들은 마카베오 항쟁 훨씬 이전에 디아스포라(Diaspora; 본국이 아닌 곳에서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 해외 거류민 혹은 교포의 뜻) 유다인들이 이방인 왕궁에서 겪었던 갈등과 성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이 궁정 설화들을 입수해서 마카베오의 박해 상황에 맞게 편집했을 것이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의 세 동료가 우상 숭배를 거절한 탓으로 불가마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이다. 다니엘서 2장과는 달리 다니엘서 3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어리석고 잔인한 폭군이다. 그는 금신상(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을 만들어 놓고, 문무대신들에게 거기다가 절을 하라고 명령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능과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내 제국의 힘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는 불가마에 던지게 한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아 세 젊은이를 보호한다.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그리스어 역본에만 나오는 '아자르야의 노래'(다니3,24~45) '세 젊은이의 노래'(다니3,52~90)이다. 

 

이제 이러한 노래가 나오기까지의 전개 과정을 좀 살펴본다.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다니3,15) 

 

다니엘서 3장 15절 서두에 나오는 '이제라도'에 해당하는 '케안 헨'(kean hen)'만약 지금이라도'로 직역되며,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자신이 직권으로 부여하겠다는  뉘앙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 세 유다인들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 (다니1,19.20), 과거 그들의 간절한 중재 기도로 인해 자신이 꿈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다니2,49). 이와 같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로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금신상에 절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세 사람이 남는다는 것은 왕으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돌려  다시 주어진 기회에 금신상에 절한다면, 네부카드네자르는 한 번 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도록 상당히 이례적인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악기소리가 날 때에'에서 '날 때에' 해당하는 '베잇다나 띠 티쉬메운'(beiddana di tishmeun)은 문자적으로 '너희가 듣는 바로 그 때에'(at the time you hear)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곧 바로 절해야 한다는 즉각성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즉시)에 해당하는 '빠흐 샤아타'(bah shaatha)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임금인 자기의 명령에 거역하면, 조금의 가차도 없이 즉각 불가마(풀무불)가운데 던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불가마가 금 신상 가까이에 있었고, 그 세 사람을 그곳에 던져 넣을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다니3,15)

 

 네부카드네자르의 이 말은 실상 유다인들이 믿던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다. 그는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신'이라는 말은 분명 '하느님' 염두에 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자기 손에서 이들 유다 사람들을 건져 낼 수 없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에 해당하는 '엘라흐'(elah)는 아람어에서 '하느님'지칭하는 단수형 명사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에 의하면, 그 하느님은 일전에 자신에게 꿈을  계시해 주시고 그 꿈의 모든 비밀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전지하신 신이셨지만, 자신의 권한 하에서 불가마에 떨어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건져낼 능력이 없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그의 판단은 부분적이었고 불완전했으므로,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력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만일 이 세 사람이 네부카드네자르의 명령을 따른다면,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 되고 만다. 

 

이같은 임금의 제안이 담긴 이면의 의미를 그들이 알고 있었기에 이들 세 명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불사하고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3장 15절에서 '내 손'에 해당하는 '예다이'(yedai)는 사실상  네부카드네자르 자신의 무소불위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위치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신들보다 높은 최고의 신적 위치에 올려 놓고 있다. 이것은 네부카드네자르 뿐 아니라 타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낸 다른 인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교만의 함정이다.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자는 자신의 근본과 한계를 쉽게 망각해버리고 자신의 능력이 무한한 것인 양 착각하며, 자신의 존재를 종종 신격화하려는 과대망상과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의 그러한 오만방자한 신성모독적 언사가 세 젊은이들이 소유한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가마를 여는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다니3,19) 

 

'일곱 배' 해당하는 '하드 쉬봐'(had shibah) '칠 배'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가능한 한 최상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불가마(풀무불)벽돌을 굽거나 금속을 녹이는 등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온도로 가열을 했지만, 그 날 만큼은 이러한 용도와 관계없이 온도를 극대화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 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킨 세 사람이 당할 혹독한 시련의 강도를 묘사한 것이며, 동시에 네부카드네자르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극한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도 자기 내면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도리어 분노하는 파격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네부카드네자르를 신격화하고, 그가 가진 권세와 권력을 통하여 그를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 생활을 할 때 다니엘의 세 동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이러한 우상 숭배를 거부하다가 불가마 속에 던져지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자르야가 불 한가운데에 우뚝서서 공의로우시고 진실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인 것이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다니3,38~40)  

 

주 하느님을 무시하고 배반하며, 황제를 신격화하여 우상으로, 신으로 섬기고 절하라는 명령에 대하여 주 하느님께 대한 절대 신앙과 충절을 드러내고, 순교할 마음으로 불속에 던져져 죽음의 극한에서 바치는 절체절명의 기도인 것이다. 여기에는 주 하느님을 위해 장렬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죽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남의 나라 땅 바빌론에 유배와서 불가마 속에서 하느님께 남부 유다 민족이 집단적으로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을 바칠 수도 없고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으니, 자신들을 제물로 받아달라는 기도이다.  

 

특히 다니엘서 3장 39절은 시편 51장 19절의 다윗의 통회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죄를 참회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는 자신들의 속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아자르야는 친구들을 아니 선민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자신들은 이렇게 순교해도 좋지만, 하느님의 이름과 권위를 무시하는 저 네부카드네자르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이름과 권위가 실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과 권위 때문에 자신들에게 수치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시고, 참된 신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니라 하느님 당신 밖에 없음을 드러내 달라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이다. 

 

아자르야의 간절한 기도, 불가마 죽음 속에서 드리는 절체절명의 기도는 하늘에 닿아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조금도 상하지 않으며, 불가마 속에서도 세 젊은이는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칭송하고 영광을 드리며 찬미하고 (다니3,31~90), 드디어 온전히 구제받아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증거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 아니라,  다친 곳 하나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다니3,92)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마태 18,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원형 '아피에미'(aphiemi)'~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근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3월 5일 복음말씀[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매일 독서와 복음을 올리겠습니다,

진정한 신앙이 임하시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173 0

추천  0 반대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