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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왕 대축일]최후의 심판 (마태25,31~46)

66 김종업 [rlawhddjq] 2017-11-26

 

 

 

 

[그리스도왕 대축일]최후의 심판 (마태25,31~46)    

 

미켈란젤로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올해는 오늘부터 12월 2일까지)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실 것이라고 한다. (에제 34,11-12.15-17)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12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15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6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17 너희 나의 양 떼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바오로 사도는, 종말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이라고 한다. (1코린 15,20-26.28)
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8 그러나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와서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가를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이홍구

 

그리스도왕 대축일 제1독서(에제 34,11~12.15~17)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15~16절) 

 

에제키엘서도 유배를 겪은 다른 예언서들처럼 바빌론 유배라는 민족적 재앙의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한다. 유배는 하느님의 공정과 자애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를 유배로 징벌하시지만, 징벌 기간이 끝나면 이스라엘을 유배에서 풀어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백성 가운데 남은 자들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 불러들이시고, 그곳의 중심부인 예루살렘 도성에 새 성전을 세우셔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드높이실 것이다.

 

에제키엘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24장)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고, 둘째 부분(25~32장)이스라엘의 원수 이방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며, 셋째 부분(33~48장) 유배자들에게 보낸 구원의 말씀이다.

 

에제키엘서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사상을 갖고 있다. 바빌론인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것은 하느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신 일이라는 것이다(8~11장).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잠시 동안만 떠나 있을 뿐,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의 기간이 다 채워지면, 적절한 때에 그분의 영광은 새로 마련되고, 성별된 성전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누가 참다운 이스라엘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바빌론에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이들임을 밝힌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민족을 재건하고 회복할 것이라고 한다(11,14~21). 

 

한편,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목자와 양떼의 비유로 묘사된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여기서 잃어버린 양울타리 밖을 벗어난, 보이지 않는, 목자의 시야에서 사라진 양을 말한다.  흩어진 양울타리 안에 있으나, 제 자리를 벗어나 목자의 시선을 피해 따로 혼자 놀고 있는 양을 말한다.

 

부러진 양혼자 까불거나 헛디뎌서 움직이지 못하는 양을 말한다. 아픈 것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양을 말한다. 기름지고 힘센 양 자기 멋대로 자라나서 목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양, 다시 말해서 자신이 목자가 된 양, 교만한 양을 비유적으로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양을 없애 버리겠다고 말한다.

 

야고보서 4장 6절에도, 잠언 3장 34절에도,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고 되어 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영적으로 철이 들지 못해 다시 과거의 어둠으로 돌아갔으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용서와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고, 더욱 더 겸손하게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사랑으로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만왕의 왕, 우주의 왕, 마음의 왕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교회의 달력으로는 한해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의 영적 자세로 한 해를 봉헌하자.

 

 

 

 

그리스도왕 대축일 복음(마태25,31~46)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히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엇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31~40참조)

 

마태오 복음 25장에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사람의 자세와 관련된 세 가지 비유가 있다. 1~13절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사람의 준비성을 강조하고 있고, 14~30절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주님의 소명에 대한 성실성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31~46절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심판하시는 주님이 오셔서 그 옥좌에 앉는 장면이 서두에 묘사된다. 그 심판주는 '사람의 아들', '인자'(人子)로 번역된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ho hyos tu anthropu; the Son of Man)이다. 

이 호칭은 다니엘서 7장 13절'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는 표현으로 최후의 심판 때에 오실 심판주로서 '사람의 아들'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사람의 아들'을 이러한 개념으로 사용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이 때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제1차 수난 예고(마태16,21~26) 직후에 나온 것으로서, 예수님 자신은 비록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지만, 장차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모든 사람의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도입하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

 

이것은 최후 심판에 대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유사한데, 마태오 복음 26장 1~2절에 의하면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3일 전에 행해진 이야기이며,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시지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이고, 당신 자신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사랑을 베푼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절(ㄱ)에서 3인칭 소유격 단수 대명사 '아우투'(autu; his, him)가 두 번 쓰였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그의 영광으로,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천사들이'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인 자신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심판주의 엄격하고 공정한 권위를 한층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기법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광'에 해당하는 '독세'(dokse; glory)의 원형 '독사'(doksa)는  어떤 권세나 명예 따위를 소유할 자의 내부에서 발산되어 그 배후에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그 어떤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독사'(doksa)하느님께 속한 특성으로서, 성부 하느님에 의해서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은 세상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전우주적 구원자, 전우주적 심판주이시며 재판장의 자격으로 오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강생(육화)때 베들레헴 마굿간에 초라하게 오신 것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전우주적인 심판주의 자격으로 위엄과 권세를 떨치시면서 오신다는 것인데, 그것이 '모든 천사가 함께 온다'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5장 32절에는 '모든 민족들이' 주격이 되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여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 24장 31절에는 '천사들은 사람의 아들이 선택한 이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라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민족들이 영광의 옥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방 곳곳에서 모여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에 해당하는 '판타 타 에트네'(panta ta ethne; all the nations)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그리고 심판의 때에 재판장은 세상 가운데 서로 뒤섞여 살던 의인과 악인을 철저하고 확실하게 분리해 낼 것이다.

 

여기서 '가르다', '분별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 '아포리세이'(aphorisei; will separate)의 원형 '아포리조'(aphorizo)둘 사이에 경계를 지어 철저하게 분리하고 구별짓는 을 뜻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이 동사가 미래 시제인 '아포리세이'(aphorisei; will separate)현제 시제 '아포리제이'(aphorizei; separates)로 각각 쓰였다.

현재 시제양과 염소를 구분짓고 따로 세우는 그 당시의 목축 관습을 묘사한 것이며, 미래 시제최후 심판의 날 재판장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양과 염소가 같은 들판에서 뒤섞여 풀을 뜯는데, 밤이 되면 양은 양의 우리에서, 염소는 염소의 우리에 각각 들어감으로써 두 무리 사이에는 양을 치는 목자에 의해서 철저한 분리가 이루어진다.

또한 본문의 양과 염소는 각각 의인과 악인을 대표하는 상징적 매체인데, 그 당시의 양과 염소는 각각의 무리에 들어감으로써 분리되었지만, 여기서는 재판장의 오른쪽과 왼쪽에 세위짐으로써 분리될 것으로 진술된다.

 

여기서 '자기 오른쪽'에 해당하는 '덱시온 아우투'(deksion autu; his right)'재판장의 오른편'을 의미한다. 또한 '덱시온'(deksion)의 원형 '덱시오스'(deksios)는 오른쪽(right)을 의미하나 반드시 장소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고대 희랍 세계에서는 명예롭거나 좋은 쪽오른 쪽이라고 했고, 플라톤이나 유대 랍비들의 서적에서는 구원이나 은총의 자리 오른 쪽으로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도 영도자와 구원자로 하느님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사도5,31)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사도2,34~35). 

이것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지니셨던 당신의 영광과 권세와 명예를 회복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양을 재판장의 오른쪽에 세울 것이라는 말씀은 의인으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가지신 영예로운 자리,  혹은 구원과 은총의 자리에 세우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 34절의 '복을 받은 이들아'에 해당하는 '호이 율로게메노이'(hoi eulogemenoi; who are blessed)앞으로가 아니라 과거에 이미 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율로게메노이'(eulogemenoi)수동태 완료 분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인데, 이들이 복을 받은 시점은 이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희생적인 사랑을 베푼 바로 그 시점이다.

 

동시에 마태오 복음 25장 41절의 '저주받은 자들아'에 해당하는 '호이 카테라메노이'(hoi kateramenoi; who are cursed)과거에 이미 저주를 받았다는 뜻이며, 저주받은 시점도 그들이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그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을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고 베풀지 않은 그 시점부터 이미 마음으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상태를 심판의 시점까지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여기서 '내 형제들인 이'에 해당하는 '투톤 톤 아델폰 무'(tuton ton adelphon mu; these brothers of mine)'나의 이 형제들 중에'라는 뜻이다. 

'내 형제들'에 대해서 '고난받는 모든 사람','주님의 제자들','주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지만, 세번째인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가장 작은 이들'로 번역된 '톤 엘라키스톤'(ton elachiston; of the least)에서 '엘라키스톤'(elachiston)의 원형 '엘라키스토스'(elachistos)'작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미크로스'(mikros)최상급으로서 '가장 작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관사와 함께 복수형으로 쓰여서 일반 명사의 의미가 되었다. 여기서 '가장 작은 이들'이란 키가 작거나 나이가 어린 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참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도 전혀 끌 수 없을 정도로 간과되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마태10,42; 18,6).

 

의인들'사람들이 자칫 소홀히 여겨 간과하기 쉬운 사람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그것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자비를 베푼 자들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고난받는 형제들을 동일시하신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 10장 40~42절에도 나타나는데,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가 곧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보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잠언 19장 17절에도 나타나 있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

 

주님께서는 고난받는 형제들이 당하는 그 고통을 같이 나누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 형제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머리이시고, 당신의 교회가 다름아닌 당신의 몸이기 때문이다(에페1,22.23) 

따라서 지극히 작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푼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비를 베푼 것과 같은 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왕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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