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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깨어 있으라 (마르코 13,33-37)

67 김종업 [rlawhddjq] 2017-12-03

 

[대림 제1주일] 깨어 있으라 (마르코 13,33-37)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나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한결같이 기억하시고 아버지의 풍요로운 은총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 모두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며,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아드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립시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 당신 종들,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시라고 한다. (이사야 63,16ㄹ-17.19ㄷㄹ; 64,2ㄴ-7)
16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17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19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64,2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 3 당신 아닌 다른 신이 자기를 고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하였고, 아무도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4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5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6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이 풍요로워져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1코린 1,3-9)
형제 여러분,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마르코 13,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대림 제1주일 제1독서(이사63,16ㄹ~17.19ㄷㄹ; 64,2ㄴ~7)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63,16ㄹ)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64,7)

 

'이사야'의 이름의 뜻은 '야훼는 구원이시다' 또는 '야훼께서 구원을 주신다'이다. 이사야는 유다 임금 우찌야가 죽던 해(기원전 740년)에 예언자 소명을 받았다. 

이사야 예언서는 1~39장(제1 이사야), 40~55장(제2 이사야), 56~66장(제3 이사야)로 나뉘어진다. 

제1 이사야 팔레스티나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던 기원전 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제2 이사야 기원전 550~519년 바빌로니아 유배생활을 배경으로 하며,

제3 이사야 바빌론 유배이후(기원전 538)부터 에즈라 느헤미야시대(B.C. 5C 중엽)이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사야서의 최종 편집은 이르면 기원전  5세기 중엽, 늦으면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제3 이사야로도 불리는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56~66장)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상황을 겨냥한다.  

이 대목 역시 저자 한 사람이 쓴 것이라기 보다 다양한 역사적 삶의 배경에서 나온 여러 신탁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 대목에 모아진 신탁들은 몇 가지 공통된 주제를 계시하는데, 이 주제들은 1장에서 언급된 이사야서 전체의 중심 주제, 곧 구원의 보편주의를 재천명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당신께 충실한 남은 자들을 구원할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참다운 예배의 중심이 될 것이다.

셋째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경계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미칠 것이다(64,1-3).

넷째 주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확장된다. 

특히 이사야서 58,6~7과 61,1~2은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청사진을 그려내는 데 결정적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오늘 제 1독서는 제3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56~66장)에 해당한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상황을 겨냥하고 있다. 유배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유배생활을 하지 않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때문에 성전 재건과 성벽 재건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런 여건에서 익명의 제3 이사야는 귀환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신앙의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이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하느님께 충실한 '남은 자들'은 자기들을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유배생활을 하지 않은 자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과 성벽 재건이 난관에 부딪혀 지연된다.  

그래서 다시 주 하느님을 아버지로 절절히 부르며 지나온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회상하고 뉘우치며 비통어린 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자식을 결코 버릴 수 도 없고 버리지도 않으시는 부자(父子)관계이므로, 난관과 역경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기도를 바친다.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63,16)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64,7)  

이것은 이사야서 63장 8절의 설교 주제를 재론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정녕 그들은 나의 백성,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자녀들이다'고 말씀하시고 모든 곤경 가운데 그들에게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 

하느님께서 항상 아버지처럼 돌보아 주셨던 옛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후의 자기들에게도 적용되어야 마땅하다는 바램이 들어 있다. 

하느님'옹기장이'(토기장이: yocher: 요체르), 말하자면 '형성하는 자, 빚는 자' (one who forms), 이스라엘'진흙'으로 묘사하는 것은, 옹기장이가 언제든지 진흙으로 만든 작품이 잘못 되었을 경우 다시 해체하여 작품을 새롭게 만들듯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곤경에서도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신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소망을 간절히 외친다. '아, 당신께서는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63,19) 

이 구절은 '간절히 바라오니, 주님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는 뜻이다. 시편 62장 2절, 122장의 말씀대로 '구원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오기 때문이다. 

지금 현 상황에서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하느님의 역사(役事)와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므로, 하느님의 초월성 안에서 극적이고 초자연적인 개입(기적)만이 크고 중압감을 주는 '산들'같은 현세의 세력들과 권세들을 진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대림절을 맞이했다. 작년에도, 몇년 전에도 대림절은 있었고, 내년에도 우리가 살아 있다면 대림절은 어김없이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베틀레헴, 마음의 구유에 예수님은 어떤 주님과 구원자로 태어나시는가? 를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선행도, 애덕의 실천,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속마음의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주님 대전에 모두 개짐처럼, 바람에 휘날려가는 나뭇잎처럼(64,5)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거룩하신 사랑의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구유, 우리 가정의 구유, 우리 단체의 구유에 구원자로, 주인으로, 주님으로 모시기 위해 먼저 청소해야 할 것들, 크고 작은 것들이 많이 있다. 

이번 대림절은 얼마만한 성찰과 통회, 보속과 새로운 삶의 결심(정개)의 빗자루가 필요한가?


 

 대림 제1주간 복음(마르13,33~37)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3)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4)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5)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6)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37)

 

마르코 복음 13장 33절'조심하고'13장 5절'너희는 조심하여라', 13장 9절'조심하여라', 13장 23절'너희는 조심하여라'동일하게 '블레페테'(blepete; be on guard)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기서 13장 33절은 예루살렘 멸망과 종말의 징조, 종말에 가져야 할 성도들의 자세에 관한 교훈들을 다루고 있는 13장 마지막 경고 구절로서, 이어서 나오는 13장 34~36절의 문지기 비유를 통해 주어지는 영적 각성의 교훈을 도입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13장 33절'깨어 지켜라'에 해당하는 '아그뤼프네이테'(agrypneite; be alert; watch)13장 37절'깨어 있으라'로 번역된 '그레고레이테'(gregoreite; watch)가 다른 단어이다.

전자의 원형 '아그뤼프네오'(agrypneo)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영적으로 주목하고 집중하는 상태를 말한다(히브3,17). 따라서 대개는 기도하라는 명령과 함께 사용된다(루카21,36).

그런데 후자의 원형 '그레고류오'(gregoreuo)육체적 수면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로서, 마지막 때가 될수록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거짓 그리스도에 의해 유혹당하거나(마르13,5~6), 재난으로 인해 좌절하지(마르13,7~8)말아야 한다는 경고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13장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나 거짓 예언자 등에 대해서 말씀하신 목적이 제자들로 하여금 깨어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모든 지혜의 참된 근원이신 하느님의 말씀에만 귀기울이며, 올바른 분별을 위한 기도에 힘쓸 때, 악한 자들이 흘리는 말들에 유혹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르코 13장 33절'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는 말씀은 앞의 13장 32절의 반복인데, 재림 시기를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은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능력의 차등이나 제한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일의 질서와 기능적 측면의 구분만을 의미한다. 

'삼위'의 차원에서는 성부 하느님만이 재림의 시기를 아시지만, '일체'차원에서는 성자도 하느님이시므로 재림의 시기를 아시는 것이다.

여기서 초점은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재림 시기를 아시느냐 모르시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조차도 '일체'의 차원이 아니고 '삼위'의 차원을 강조하시며 모르신다고 하신 재림 시기를, 인간이 알려고 하거나 안다고 나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지적하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부 하느님께서는 재림 시기를 정하신 분이시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재림하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며, 그때 성령 하느님께서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려는 마음을 부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 마르코 복음사가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세지는 성부 하느님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종말의 때가 아니고, 종말을 대비하는 자세인 것이다.

 

이제 마르코 복음 13장 34절의 문지기 비유를 살펴본다. 여기서 중점은 주인의 여행 자체가 아니고, 주인의 여행으로 말미암은 주인의 부재 상황이다. 종들에게 있어서 주인의 부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만들어진 공백 기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주인은 기약이나 의미없이 떠난 것이 아니고, 다시 올 날을 기약하고 갔으며, 종들에게 각자 할 일을 모두 분담시키고 떠났다. 이것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는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준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불시에 다시 오시는데(마르 13,35), 믿는 이들은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13장 34절에서 '종들에게'로 번역된 '토이스 둘로이스 아우투'(tois dulois autu; to his servants)는 직역하면 '그의 종들에게'이다. 

원문은 '아우투'(autu)라는 3인칭 소유격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어 하느님 나라의 권한이 주어진 것은, 그 종이 예수님께 속해 있을 때에, 즉 자신의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인격과 생명과 의지까지도 종속시키고, 그분의 뜻과 계획에 따라 살기로 한 종에게만 권한이 주어짐을 나타낸다.

여기서 '권한'으로 번역된 '엑수시안'(eksusian; authority)마르코 복음 전체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마르1,22), 마귀를 복종시키는 (마르1,27; 3,15; 6,7) 말씀의 권한이고 죄사함의 권한이다(마르2,10).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종으로서 삶을 살기를 다짐함으로써 그분의 권한을 가진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졌던 권세를 가지고 병을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고, 말씀을 선포하는 권한을 행사하면서(마르16,15~18), 하느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이다.

또한 주인은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떠나는데, 여기서 '각자'에 해당하는 '에카스토'(ekasto; each; every man)는 일의 분배적 측면보다는 '한 사람씩'이라는 단위 주체의 개별성이 더 강조된다.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일일이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맞는 일들을 맡겨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할 일을'에 해당하는 '토 에르콘 아우투'(to ergon autu; his assigned task; his work)는 직역하면 '그의 일들'이다. 종은 주인에게 예속된 자들이기에, 그들의 맡은 일은 그들 자신의 일이 아니고, 주인의 일이다. 

그러니까 종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집사(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고 임해야 하는 것이다. 종들은 다만 주인의 일을 대신 맡아 행할 뿐이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나 기분에 따라 맡은 일을 처리하면 안된다.

더욱이 주님께로부터 일을 맡은 제자들은 늘 깨어 기도로 묻고, 말씀으로 인도받으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선한 청지기라면, 주인이 먼 길을 떠나서 지금 자신과 함께 있지는 않지만, 마치 주인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특히 이방인인 로마인들을 주 대상으로 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에, 밤을 세 단계로 구분하는 유대인들의 시간 구분과 달리 밤을 네 단계로 구분하는 로마인들의 시간 기준을 따르고 있다.

 

 

11.30. 대림 제1주일

 

<깨어 있어라.>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3-37).”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은 

경계 근무를 하는 보초병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비슷한 점은 겉모습뿐이고, 깨어 있는 이유는 다릅니다. 

보초병이 깨어 있는 것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이지만, 

신앙인은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리기 때문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조심하여라. 깨어 지켜라.”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 구원이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으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의 건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에는, 

“그날은 너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심판결과에 대해서 함부로 장담하지 마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해서,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24,50; 루카 12,46).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재림을 기다린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왜 이제 오십니까?” 라고 인사하면서 반가워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왜 이렇게 빨리 오십니까?” 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또 자기는 지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만해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만심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에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오기 때문에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모른다고 해서, 또는 계산할 수 없다고 해서, “종말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말이 있다고 믿어도 당장 실감나지 않는다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일부 이단 종파 사람들이 종말에 관한 성경 말씀들을 

많이 왜곡해서 전파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 일들도 우리가 늘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 간격이 길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인데,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갑자기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종들은 주인이 먼 길을 떠났으니 당연히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상보다 빨리 돌아와서 종들이 당황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라는 말씀에서, 

‘종들’과 ‘문지기’가 구분되어 있는 것은 특별한 뜻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은, ‘탈렌트의 비유’와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사도들에게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 임무는 사도들만의 임무가 아니라, 

사도들과 한 몸을 이루는 교회 공동체 전체의 임무입니다. 

즉 모든 신앙인들의 임무입니다.)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과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또는 “깨어 있어야만 복음을 제대로 선포할 수 있다.”, 

또는 “신앙인의 깨어 있는 삶 자체가 복음 선포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어야 다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내가 먼저 그 길을 가고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방심하고 있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온다는 것은, 

종말과 재림은 미리 예고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대비하지 않고, 즉 회개하지 않고, 방심한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말과 재림이 갑작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갑자기 재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잠자는 것을 주님께서 보신다는 것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님께서 선언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일 자체가 곧 심판입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상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총을 주시는데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를 희망한다면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구원받기를 바라면서도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희망을 ‘죽은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야고 2,17), 실천 없는 희망은 죽은 희망입니다. 

죽은 믿음과 죽은 희망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 재림, 심판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라고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깨어 있어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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