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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일] 회개의 세례 (마르코 1,1-8)

69 김종업 [rlawhddjq] 2017-12-09

 

2017년 12월 10일 주일

[대림 제2주일 회개의 세례 (마르코 1,1-8)

 

이사야 예언자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고,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길을 곧게 내라고 한 소리가 외친다고 한다. (이사야 40,1-5.9-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는 주님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2베드 3,8-14)
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9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11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12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고 선포한다. (마르코 1,1-8)
1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2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대림 제2주일 제1독서 (이사40,1-5.9-1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1~2)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를 간 이유 야훼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을 배신할 때, 주변 이교 강대국(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등)을 통해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 잃은 설움을 주거나 유배를 보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들의  죄의 벌에 대한 (죗값; 갑절의 벌; 복역)을 치루고 정신차리게 하며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한다.


오늘 이사야서  40장 1~2절을 살펴보자.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여기서 '나의 백성' '예루살렘'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바빌론 유배지에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복역의 때'가 끝났음을 외치라는 소명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의 지위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다.


 요새화된 성인 예루살렘은 다윗의 전투시 군사적 중심지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전쟁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전쟁은 국가 존립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는 더 이상 국가로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주변 이교 강대 제국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은 자유롭게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사야서  40장 3~11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과 삶의 터전과 공동체에 주님으로 찾아오시고 통치하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길을 닦으라는 말씀이 선포된다.


성전 전승에 의하여 잘 알려진 주님의 길 시나이 산이나 에돔에서 나와 (이사 34장; 63.1~6 참고) 사해 남쪽의 사막(아라바)를 지나 동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다(Diaspora가 거주하는 길).


 선포의 핵심,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에 좌정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임금의 행차를 준비하라고, 한 외침(소리)이 촉구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마르1, 2~3)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준비하도록 구약과 신약의 교량 역할을 하는 예수님의 선구자이신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사막에 길을 곧게 내는 것, 골짜기를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하는 것, 거친 곳을 평지로,  험한 곳을 평야로 만드는 것"

이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정지작업 높은 것을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메우는 작업이다.


하느님 위에 올라간 영적 교만 겸손으로, 죄악과 분열의 깊은 계곡회개를 통해 은총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다.

거칠고 험한 곳 주님께 반항하고 대들고, 제 마음대로 하던 마음인데, 그 마음을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주님의 영광'(이사40.5)이 드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함께 보게 된다고 한다.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와 능력의 표징을 예루살렘에서 다시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며,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시고 (이사40.9ㄹ~10ㄴ)상급과 보상이 무상으로 내린다(이사40,10ㄷ).


'상급' '보상' 승리한 전사가 집으로 가져오는 노획물과 공물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주 하느님의 예루살렘 귀환 승리의 행사로 묘사된다.


그분은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양무리)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이스라엘 백성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지도자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이사40.11).


 목자와 양무리에 대한 시구 시편 23.1~3과 유사하다. 목자는 대개 '임금'을 위한 비유로 쓰이며, '그의 양무리, 어린 양, 암컷들'은 하느님의 백성 넓은 의미로 묘사한 것이다.


남부 유다의 성읍 그들의 지도자들과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후에 수십 년동안 외면과 고통스런 상황으로 고난 받아온 사람들을 묘사한다.

예루살렘에로의 하느님의 귀환 그들 모두, 특히 약한 자와 곤궁에 빠지고 궁핍한 자를  위한 목자의 외투 속 사랑을 가리킨다.

'젖먹이는 암컷들' '갓난 어린양들' 함께 지내며 돌보는데, 양떼가 이동할 때마다 어린양들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 제 2독서(2베드3,8~14)에서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오며, 그날에 지구는 불에 의해 녹아버리며 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주님의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

(1)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생활 개선; 경건 생활)

(2) 티없고 흠없는 사람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 상태

(3) 평화로이 그분 대전에 설 수 있다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주님 대전에 거리낌없이 설 수 있는 (주님 만날 수 있는) 자세. 

우리는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 마음의 구유, 마음의 베들레헴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준비해야 한다

 

 

 대림 제2주일 복음(마르1,1~8)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2~4)

 

마르코 복음 1장 2절에서 8절까지는 세례자 요한의 등장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그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루카가 길게 기술한 족보나 탄생 기사를 완전히 생략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묵묵히 하느님의 일을 하며 고난받는 종으로 부각시키려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서술 의도와 잘 부합한다.

 

종은 현재의 위치에서 주인의 명령에 충실하면 되기에 그의 족보나 탄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의도적으로 이것을 생략하고, 곧바로 예수님께서 성년이 되어 공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예수님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소개하는 본단락에 있어서도, 세례자 요한과 갈등을 빚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에 대한 묘사(마태3,7~10)와 세리와 군인들과의 대화(루카3,7~14) 등을 생략하고 있다.

 

이것 역시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메시야 출현 예고에만 국한시켜서 오직 독자들의 관심을 예수님에게만 집중시키려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의도적인 전개 방식이다.

 

마르코 복음 1장 2절에 기록된 글은 탈출기 23장 20절말라키 3장 1절에서 복합적으로 인용된 것이고, 다음절인 3절이사야서 40장 3절의 인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 전체를 이사야의 글로 소개하는 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구약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니고, 3가지 책을 언급하기보다는 이사야서만을 대표적인 책으로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예수님 당시에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공적으로 자주 읽혀졌으므로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했던 성경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본문은 탈출기 23장 20절과 말라키 3장 1절의 복합적인 인용이다. 탈출기 23장 20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라고 한 구절과 거의 동일하다.

원문에는 대명사 '에고'(ego)칠십인역(LXX) 탈출기 23장 20절에는 있지만, 여기는 없다는 점외에는 동일하다. '에고'(ego)는 강조를 위한 대명사이므로 없어도 된다.

 

또한 말라키 3장 1절에는 본문의 '네 앞에'라는 말이 없고, 본문의 '보내니'에  해당하는 '아포스텔로'(apostello)'엑사포스텔로'(eksapostello)보다 의미만 강조 것일 뿐, 인칭과 시제가 동일하다. 

그리고 '앞에'에 해당하는 '프로소푸'(prosopu)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이 자신이 떠나온 도시로 돌아가기 전에 선발대를 앞서 보내어, 먼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알렸던 사실과 관련된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메시야의 오심을 위해 어떤 특별한 활동을 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메시야가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준비하게끔 하는 데 국한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본문의 '너의 길'에 해당하는 '텐 호돈 수'(ten hodon su)말라키서 3장 1절에는 '내 앞에서 길을'로 기록하고 있다. 

말라키서 '나의 사자'화자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의 '네 사자'듣는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 1장 1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격으로 묘사한 것처럼, '주님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동일하게 간주하는 마르코의 신학에 의해 의도된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이 구절은 이사야서 40장 3절의 70인역(LXX)의 내용과 일치하는 데,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관한 예언이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활동 장소를 말하는 '광야'에 해당하는 '에레모스'(eremos; desert)마태오 복음에서는 '유다 광야'(마태3,1)로 나오는데, 사해(Dead Sea)와 야폭강과 요르단 강 합류 지점 사이에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거친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는 지리적인 의미보다는 신학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어 '광야'가 사용되었다.

바빌론 포로 시대의 유대인들의 피폐한 영적, 정치적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구약에서 광야가 비록 현실적으로는 피폐하지만, 장차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이 있는 곳으로 자주 묘사되었다(이사35,1.2.6~10; 43,19.20; 호세2,14).

 여기서도 광야는 실제로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구약에 예언된 대로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면서 생활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암시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phone; a voice)라는 단어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역할의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해 주고 있다.

당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키 이후에 400여년 만에 혜성처럼 나타난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실로 하늘을 치솟았는데, 그렇게 자존심 강했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그에게 나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유다 사회를 압도하고 있었다(마태3,7).

 

실제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집요한 질문 공세를 받기도 할 정도였다(요한1,19.23).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단순한 소식의 전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 마자 사라지듯이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함께 그렇게 사라져갔다(요한3,31).

 

'기록된 대로' 

여기서 '대로'에 해당하는  '카토스'(kathos)'따라서'(according to)라는 의미를 지니며, '기록된'으로 번역된 '게그랍타이'(gegraptai)완료 수동태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의 효과가 현재까지 지속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과거에 하느님에 의해 기록되었던 것에 따라서 현재에~'라는 의미가 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지금 세례자 요한이 수행하는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 철저하게 과거 하느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에 따라서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여기서 '회개'로 번역된 '메타노이아스'(metanoias; repentance)의 원형 '메타노이아'(metanoia)의 동사형 '메타오에오'(metanoeo)에서 '메타'(meta)'다르게'라는 의미이고, '노에오'(noeo)는 '생각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원어로 볼 때, '회개''다시 생각함'이라는 뜻이다. '회개'구체적으로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단순히 마음만 바꾸는 변화가 아니라, 행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마음의 변화(change of mind; 마태3,8; 2코린7,10)를 말한다.

 

사실 구약적 관점에서 '회개하다'(에제13,22)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슈브'(shub)'인간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회개'의 이러한 의미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1장 3절과 4절에서 두번씩이나 사용한 '광야에서'에 해당하는 '엔 테 에레모'(en te eremo; in the desert)라는 구절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께서 계약 관계를 맺은 최초의 장소를 의미하는 '광야'(시나이 광야)에로의 돌이킴이라는 구약적 회개의 의미를 자신의 복음에 적용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세례'로 번역된 '밥티스마'(baptisma)'담그다'는 뜻의 동사 '밥티조'(baptizo)에서 파생되었으며, 이것은 원칙적으로 몸을 완전히 담그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물에 담그는 것이나 정결 예식으로서의 씻음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만(레위15,5~16), 회개의 의미로서 물에 담그는 것이나 씻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을 하는 경우에 한해서, 개종자를 물 속에 담금으로써 죄의 회개와 개종 의식을 하기도 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도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원칙적으로는 오늘날 세례 성사가 가지는 죄사함의 은총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당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정결함을 받기 위한, 문자 그대로 '회개의 세례'였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절 이하를 보면,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이 사도 바오로에 의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사도19,5).

 

2014년 12월 7일

<세례자 요한의 설교>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2-4).”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는

이사야서를 인용한 구절이 아니라 말라키서 3장 1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기 전에 먼저 일꾼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미리 준비시키신다는 예언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이 예언들이 실현된 일입니다.


여기서 ‘광야’는 ‘회개’를 상징하는 장소로 해석됩니다.

(원래 광야는 고난과 시련의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제대로 받으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는

“회개하라고 외치는 이의 소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주 활동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이었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말을 들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서

말씀을 선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선포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했을 것입니다.)


회개하려면 광야로 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물질적인 풍요, 우리 자신의 게으름 등에서 벗어나서,

또 세속의 유혹과 내적 욕망을 물리치고 억눌러서,

오직 하느님만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곳’으로 갈 수도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묵상하는 ‘광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디에서 하든지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체험하게 된다면,

그곳이 바로 은총의 장소인 광야입니다.


그런데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것만을 회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6-8)”

하느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마른 풀처럼 사라져버릴 허무한 존재일 뿐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올바르게 깨닫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전력으로 노력하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한 길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했음을 나타내는 표지로서의 세례였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위한 예식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는다고 저절로 회개가 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7-8ㄱ)”

이 말은, 형식적인 회개를 하지 말고 삶 전체가 변화되는 진정한 회개를 하라고

꾸짖는 말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회개하지 않고서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지 않고서 고해성사라는 형식만 거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고해’ 죄를, 즉 성사모독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삶 전체를 반성하고(성찰),

잘못된 점들을 깊이 회개하고(통회),

올바르게 바로잡겠다고 굳게 결심하고(정개),

그런 다음에 ‘고백’을 하고, ‘용서’를 받고, ‘보속’을 해야 고해성사가 완성됩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회개(통회)입니다.

(같은 죄를 자꾸만 반복해서 짓는 경우, 의지가 약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제대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선포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선포했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모든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메시아 시대의 개막을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일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만 했지만,

예수님의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했다면(또는 하고 있다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시작만 하고서 마치지는 못하는(루카 14,30)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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