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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열병치유 (마르 1,29-39)

82 김종업 [rlawhddjq] 2018-02-04

 

[연중 제5주일]열병치유 (마르 1,29-39)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다고 한다. (욥기7,1-4.6-7)
욥이 말하였다. 1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2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3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4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6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7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이라고 한다. (1코린 9,16-19.22-23)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비롯해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시고는, 다른 고을들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하신다. (마르 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연중 제5주일 제1독서(욥기7,1~4.6~7)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1)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2)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3)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4)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6)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7)

 

욥기에는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 규명에 대한 3차에 걸친 논쟁이 나온다(욥기4~31장).  그리고 엘리후의 중재 변론(욥기32~39장)이 나온다.  첫번째 논쟁에 해당하는 욥기 4~14장의 내용 중에서 엘리파즈의 첫째 담론 (일차변론; 욥기4~5장)에 대한 욥의 반박(욥기6~7장)의 후반부가 오늘 독서이다.

욥기 6장에 이어 인생의 허망함에 대한 푸념섞인 탄식과 더불어 하느님께 대한 의문에 찬 불평, 그리고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욥의 애절한 호소가 소개된다. 여기서 욥은 자신의 담담한 형편을 인간의 상황 중 가장 고통스런 상황에 투사하고 있다.

즉 그는 인생을 징집을 당해 전쟁터에 나간 군인의 상태(욥기7,1ㄱ), 한낮의 더위가 가시기를 바라고 하루의 노력이 끝난 뒤 자기 삯을 바라는 품꾼이나(욥기7,1ㄴ) 종의 입장(욥기7,2)에 빗대고 있다. 이러한 표현 속에는 자신이 당하는 혹독한 고난의 상황이 들어있다.

 

그는 서늘하고 평온한 저녁을 고대하는 노예에 자신을 빗대었지만,  그러한 순간은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았음을 탄식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삶을 고대하는 품꾼에 자신을 비하였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통스런 질병에 따른 끝없는 곤경과 고뇌뿐임을 탄식했다(욥기7,4~6). 

그리고 이어서 욥은 자신은 이유조차 모르지만, 이 일을 자신에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지금의 형편에서 건져 달라는 비통한 소원을 올리며(욥기7,7~10), 원망섞인 탄식과 절규를 내뱉고 있다(욥기7,11~21). 여기서 우리가 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친 원망에 가까운 욥의 탄식의 말들이다.

 

물론 이런 원망조의 말들은, 인간의 한계 상황에 이른 고난의 정도를 감안할 때, 인간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결코 합당한 것은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와 선하심을 확고하게 붙잡지 못한 욥의 연약함 반영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욥이 겪는 고난의 무게를 감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욥은 적어도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에 따른 자신을 향한 선하심 섭리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과 그가 감당해야 할 고난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난이 커지고 고난의 날이 길어짐에 따라,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탄식을 넘어 절망, 절망에서 더 나아가 원망조의 말까지 내뱉고 말았던 것이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1)

여기서 원문의 '레에노쉬'(leenosh)'인생은'이라 의역했는데, 원래는 '~에게'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레' (le)장성한 남자(장성)나 하느님께 비할 때 덧없고 연약한 '사람'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에노쉬' (enosh)가 결합되어 '생에게'로 번역해야 한다.

그리고 원문의 '차바' (tsaba) '고역'(hard service)라 의역했는데, '군대' 혹은 '전쟁'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 이 표현들 앞에 수사 의문문을 이끄는 '~있지 아니하냐' 란 뜻의 '할로'(halo)를 배치한다.

 

이런 의미를 살려 '할로 차바 레에노쉬'(halo tsaba leenosh)를 번역하면, '사람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란 의미도 가능하고, '장정에게 군대가 있지 아니하냐'란 의미도 가능하다. 전자는 하느님과 비교할 때 연약하고 초라한 인간에게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전쟁이 항상 가까이 있다는 사실, 즉 인생이 그만큼 고달프고 힘겨운 것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후자남자가 장성하여 징집을 당하는 것, 즉 의무적으로 강제성을 띤 고된 징집을 감수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욥은 여기서 인간이 당하는 어려움과 곤고함을 강제로 겪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다. 욥이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처한 고통스런 현실이 마치 전쟁터와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그러한 고통을 하느님에 의해 강제로 당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날품팔이'에 해당하는 '사키르'(sakir)'댓가를 주고 고용하다'란 뜻을 가진 동사 '사카르'(sakar)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여기서는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품삯을 받기로 하고, 일정한 시간 동안 의무적으로 무역을 감당하는 자들(품꾼)이었다. 이들은 매우 곤궁하고 빈한 자들이었다.

 

성경에서 품꾼은 당시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와 더불어 사회의 최하층민에 속하였다. 레위기 19장 13절에는 율법을 통해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명하였지만, 여타의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이들을 보호할 만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조차 없는 상태에 있었다.

본문은 매일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고된 일을 쉼없이 감당하면서도, 무력하여 자기 권리조차 주장하지 못하는 날품팔이의 형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이 고난과 불안으로 싸여 있고,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인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2)

'종과 같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한낮의 작열하는 더위와 먼지로부터 해방되는 저녁을 고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이'라는 것은 그날 벌어 그날을 살아가는 품꾼들이 그날의 노동이 끝나는 시점에 주어지는 품삯을 고대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둘 다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의 반복일 뿐이다. 현재의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3)

앞의 욥기 7장 1~2절에서는 인생의 보편적 고달픔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피력했다면, 욥기 7장 3절이하 5절까지는 그 같은 상황과 형편을, 온 몸에 퍼진 악창으로 인해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신의 처지에 직접적으로 대입시켜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나 역시 공허함의 달들을 할당받게 되었고, 고통의 밤들이 나에게 지정되었다'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강조 수동형으로서 욥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언가를 강압적으로 상속받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지금의 시점이 욥이 재난을 당한지 몇 개월의 기간이 지난 때임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욥은 지난 몇달 동안 재산의 회복이나 육체적 건강의 회복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와 같은 '고통'으로 번역된 '아말'(amal; '환난','고통','수고로움')을 당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4)

아무리 비천한 신분의 종이라도 휴식의 시간은 주어지게 마련인데, 욥은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 밤 시간 조차 쉴 수가 없었다. 고통속에서 '저녁은 깊어가고'(원문: '밤의 치수를 측량하고')라는 말은 밤이 더 이상 쉼의 시간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의 시간이었기에 새벽이 밝아 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욥의 피부병은 '삐쉬힌 라흐'(bishihim rah), 즉 '악성 종기'의 의미인데, 욥이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격리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둥병은 아니다.  아마도 욥이 앓은 악창은 부스럼 또는 온몸 전체에 진물과 고름이 나는 궤양성 피부병으로 추측한다.  욥의 피부는 곪을대로 곪은 나머지, 구더기가 기생할 정도로 악화되었고, 종기가 곪아터진 자리에 재(먼지)가 함께 뒤섞여 응고될 정도였다(욥기2,7~8).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6)

여기서 '베틀의 북'에 해당하는 '아레그'(areg)'짜다', '엮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 '아라그'(arag)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베틀','직기'라는 뜻이다. 인생이 마치 베짜는 사람이 사용하는 북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찰나'와 같다는 의미를 나타태는 의역이다.  그러니까 세월이 빠르다는 의미와 더불어 위중한 병세에 그에게 남겨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7)

여기서 '기억해'에 해당하는 '제코르'(zekor)'기억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 '자카르'(zakar) 2인칭 명령형이다. 여기서 2인칭은 절대자이신 하느님이시다. 또한 '한낱 입김'에 해당하는 '루아흐'(ruah)'호흡','바람', '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이다. 욥이 고통중에서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음을 반영한 표현이다.

이 호소는 7장 10절까지 계속되는데, 현재 당면한 비참하고 답답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는 연약한 자신의 생명을 반드시 기억해주시고, 속히 자신의 청원에 응답하여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길 간곡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행복','복된 것'에 해당하는 '토브'(tob)'선한', '좋은'이란 의미의 형용사인데, 여기서는 명사적 용법으로 쓰였다.  겉으로는 '토브'(tob)그의 질병이 치료되고, 소유와 자손이 회복되어 재난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의미와 그것이 어떤 목적에서 주어졌는지와 관련해서 하느님의 뜻을 보다 잘 헤아리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본문에서 욥이 강한 부정어 '로'(lo)를 사용하여 현재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욥이 극심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애절한 탄식을 감안할 때, 자신의 지금의 상태를 기억해 달라는 하느님을 향한 욥의 호소는 독자들에게 더욱 애절한 음조로 다가온다.

오늘 이렇게 장황하게 주석을 하면서 욥의 이야기가 지금 고통중에 있는 모든 분들께 인간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위로와 치유가 되길 바란다.

 

 

 

 연중 제5주일 복음(마르1,29~39)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0~31)

 

코린토1서 9장 5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초대 교회 당시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다닌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케파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1코린9,5). 그리고 초대 교회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의 아내가 먼저 순교했다고 나온다 (St. Clemens of Alexandria 3;6).

 

12사도 중에서 사도 요한을 빼놓고는 모두 결혼을 한 사람이었고, 유다 이스카리옷은 배반하고 자살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마티아도 모두 순교하였다. 사도 요한만이 끝까지 동정을 지켰고, 성모님을 모셨으며, 장수하면서 A.D.90~100년 경까지 증거자로 살다 죽었다.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 18장 29절"내가 진실로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태19,28~29; 마르10,28~30)라고 말씀하셨고, 마태오 복음 19장 27절에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한번 결혼했던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해서 매몰차게 아내와 집을 외적으로 다 정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부부생활을 포기하고 살면서 선교를 위해서 함께 동행했으리라고 본다. 

한편,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가 걸린 병'열병'에 해당하는 '퓌렛수사'(piressousa; sick of a fever)로 나온다. 그러나 의사 출신인 루카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심한 열'에 해당하는 '퓌레토 메갈로'(pyreto megalo; a high fever), 즉 고온이 동반되는 중한 열병으로 나온다(루카4,38).  

유대인들은 이 병을 '불' 또는 '뼈 속의 불'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만큼 고열을 동반하는 심각한 병으로서 습기가 많은 갈릴래아 호수 인근 지역에 흔한 풍토병이었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 1장 30절에서 '누워 있어서'라고 번역된 '카테케이토'(katekeito; lay)미완료 과거형이므로, 시몬의 장모는 이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31절'열이 가셨다'(The fever left her)에서 '가셨다'(떠났다)에 해당하는 '아페켄'(apheken; immediately left)원형 '아피에미'(aphiemi)는 법적 의미에서 남편과 아내가 '이혼하다'(1코린7,11),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다'(마태26,56)등의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원문은 열병이 시몬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완전히 떠나갔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마르코 복음사가는 '열병'에 해당하는 '호 퓌레토스'(ho pyretos; the fever)인격화시켜서, 예수님의 신적 치유 행사가 열병과 시몬의 장모를 분리시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예수님의 병 고침의 치유 행위 나음을 받은 시몬의 장모의 섬김의 행위와 정확하게 대구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일으키시니'에 해당하는 '에게이렌'(egeiren; and lifted up)부정 과거형이므로 치유 행위의 즉각성을 강조하고, '시중을 들었다'에 해당하는 '디에코네이'(diekonei; she ministered)미완료 과거형이므로 섬김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중병을 앓다가 치유되면 회복 기간이 필요한데, 예수님의 치유는 즉각적임과 동시에 회복 기간이 필요없는 완전한 치유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육체적인 회복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치유된 자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고(마르코10,51.52), 주님을 섬기며 (마르코5,18~20), 더 나아가 이웃을 섬기는 인격과 영혼의 변화를 가져 오는 전인적 치유 행위였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도 주님께로부터 치유를 받고 은혜를 받았으면, 감사의 지향으로 미사를 봉헌하며, 자신의 삶안에서 수고와 봉사를 통해 주님을 섬기고, 교회와 이웃의 선익을 위해 봉사하는 보은의 감사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이 말씀에서 ‘그곳에도’ 라는 말에는 

‘이곳에서 했던 것처럼’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곳’, 즉 카파르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만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하신 일은 ‘복음 선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과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복음 선포’의 여러 가지 모습들 가운데 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로도 

선포하셨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통해서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 선포’는 ‘해방 선포’인데, 예수님께서는 해방을 선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 덕분에 사람들이 실제로 해방되었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하신 일을 보면, 

마태오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먼저 하셨다고 되어 있고,

마르코복음에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먼저 하셨다고 되어 있고,

루카복음에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루카 9,11).”

이 차이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한 가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주신 일, 즉 ‘사랑 선포’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으로 하신 복음 선포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병자 치유와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로 하신 복음 선포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서 몰타 섬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그 근처에 섬의 수령인 푸블리우스라는 사람의 소유지가 있었다. 그가 우리를

손님으로 맞아들여 사흘 동안 친절히 대접해 주었다. 마침 푸블리우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는데, 바오로가 그에게 가서 기도하고 안수하여

그를 고쳐 주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뒤에 그 섬의 다른 병자들도 오자 바오로는

그들도 고쳐 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큰 경의를 표하고, 우리가 배를 타고 떠날

때에는 필요한 물건들을 실어 주었다. 석 달 뒤에 우리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다(사도 28,7-11).”


이 이야기에는 섬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다는 말이 없는데,

세상에서 가장 열성적인 선교사였던 바오로 사도가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바오로 사도는 석 달 동안 그 섬에서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병자들을 고쳐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병자 치유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함께 했을 텐데,

섬사람들 입장에서는 병자 치유가 곧 복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곳에는 깊은 신앙심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선교활동은 ‘사랑으로’ 해야 하고, 사랑 실천이 곧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 사랑에 관한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말로만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복음 선포가 아니라 공허한 말장난이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과 함께

의로움과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물리치십시오. 알다시피 그것은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주님의 종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가르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2티모 2,22-25).”

 

여기서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이라는 말에서,

요즘 일부 사이비 종교 사람들이 선교활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런 식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의로움과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라는 말은,

선교활동은 곧 의로움과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전해 주는 일이고,

또 그것들을 실현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 활동과 복지 사업 등은 그 자체가 선교활동입니다.

선교활동의 성과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혹시 신앙인들 가운데에 “선교활동은 선교사들에게 맡기고 나는 그냥 혼자서

조용히 신앙생활 하면 안 되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모든 신앙인이 어깨띠 두르고 길거리에 나가서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셨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숨어 있는 것처럼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은

제 맛을 잃은, 그래서 쓸모없는 소금의 모습과 같습니다.

또 감추어져 있어서 등불 구실을 하지 않는 등불은 꺼진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빛을 꺼버리는 일이고,

그래서 남을 구원하는 일도 못하지만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일도 못하게 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능동적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는, 새벽이 되자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십니다. 이처럼 활동하기 전과 후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활동의 원천이고, 활동은 기도의 목적을 올바로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기도 않고 활동만 한다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돌보지 않고 기도만 한다면, 영적인 자만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를 활동으로, 활동을 기도로 대치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를 통해 볼 수 없었던 목마른 이들을 보아야 하며, 활동을 통해 그들에게 물을 주어야 합니다. 내가 힘든 상황에 있더라도, 나보다 더한 처지에 놓인 이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기에 그 마을에 계속 머무신다면 갈채와 함께 편안한 생활이 보장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길을 택하시지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우리가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늘 새로운 일을 찾고 끝없이 도전해야만 하지요. 바오로 사도 역시 제2독서에서 말씀하시지요.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른 이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자세에 대해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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