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창4동성당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창4동성당
[연중 제6주일 (세계 병자의 날)]나병 환자(마르 1,40-45)

83 김종업 [rlawhddjq] 2018-02-11

 

 

[연중 제6주일 (세계 병자의 날)]나병 환자(마르 1,40-45)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이르신다. (레위 13,1-2.44-46)
1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44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사제는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해야 한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친다.
46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한다. (1코린 10,31─11,1)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2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33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한 나병 환자를 가엾이 여겨 치유해 주신다. (마르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연중 제6주일 제1독서(레위13,1~2.44~46)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1~2)

 

레위기 11장 1절에 이어서 두번째로 하느님께서는 모세만이 아니라 아론도 함께 부르신다(레위14,33 ; 15,1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함께 부르실 때 다루는 주제는  특히 사제가 염두에 두어야 할 부정함에 대한 분별이었다.

 

이것은 레위기 10장 10절에 나타난 사제의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는 임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스럼이 생겨'에서 '부스럼'에 해당하는 '세에트'(seeth)

'들어 올리다'란 뜻을 지닌 동사 '나사'(nasa)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문자적으로는 피부 위에 '부풀어오른 것'을 뜻하며, 사마귀(mole),

종기(boil), 부스럼, 염증(inflammation)등을 포함한다.

 

'습진이 생겨'에서 '습진'에 해당하는 '사파하트'(saphahath)의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발진(eruption) 혹은 '딱지'(scab)가 앉은 상태

가리키는  듯하다.

 

'얼룩이 생겨'에서 '얼룩'에 해당하는 '바헤레트'(bahereth)의 어원은

'빛나다'란 의미를 지닌 '바하르'(bahar)이다.

 

이것은 '피부에 생긴 희고 맨질맨질한 얼룩 부위'(white patch of skin)

가리키는 말로서 영역본은 '밝은 반점'(bright spot)으로 번역되어 있다.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에서 '병이 나타나다'에 해당하는 '하야~레네가'

(haya~lenega)'병같이 되다'가 아니라 '병이 되다'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네가'(nega)'만지다'(15,23), '치다'(욥1,11)란 뜻을 지닌 '나가'

(naga)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역병'(a plague),'상처' 혹은 '닿으면 아픈 곳'

등의 뜻이 있다.

 

그리고 '악성 피부병' 해당하는 '차라아트'(tsaraath)는 옛날에는

'문둥병'(나병)이라 변역했으나 논란의 여지가 많다.

 

레위기 13~14장에서 '차라아트'(tsaraath)사람과(13,2~46; 14,1~32)

과(13,47~58), 의(14,33~53) 경우로 나뉘어 소개된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사람에게만 생길 수 있는 병의 일종인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우기 레위기가 말하는 '차라아트'(tsaraath)의 증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둥병(나병)의 증상과 다르므로, 어떤 의사도 레위기의 증상을 보고

문둥병(Hansen's disease)라고 결론을 내릴 사람이 없다.

 

또한 구약 성경의 희랍어 번역본인 칠십인역(Septuaginta; LXX)은

'차라아트'(tsaraath)'레프라'(lepra)로 번역했으며, 그 영향을 받아

영역본들은 '문둥병'(나병)을 뜻하는 단어인'leprosy'로 번역했다.

 

그러나 정작 문둥병(나병)의 증상을 가리키는 희랍어는 '레프라'(lepra)가 아니라

'엘레판티아시스'(elefantiasis)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

 

그 의미에 있어서도 희랍어 '레프라'(lepra)'비늘이 떨어지는 상태'

(scaliness)를 뜻하며, '차라아트'(tsaraath)의 어원도 '~을 아래로

던지다'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차라아트'(tsaraath)'피부가  

떨어지는 종류의 피부병' 일컫는 용어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어떤 곳은 '차라아트'(tsaraath)를 사람에 대해선 '감염성 피부병'

(an infectious skin disease)으로, 옷이나 벽에 대해선 곰팡이

(mildew)로 번역했다.

 

물론 정확하게 '차라아트'(tsaraath) 어떤 병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문둥병(나병)보다는 문둥병(나병)을 포함한 '감염성을 지닌 악성 피부병'으로

여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본문의 '네가 차라아트'(nega tsaraath) '감염성을 지닌

악성 피부병의 상처'로 번역할 수 있다.

 

한편, '차라아트'(tsaraath)의 증상을 보면,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물건의 일부분이

영향을 받아서(13,9~13; 14,37.42.55) 표면의 색깔이 변하고(13,3.49; 14.37),

표면 뿐 아니라 안까지 파고 들어가며(13,3; 14,37), 전염성을 갖고 있다

(13,7.51; 14,44)

 

이런 증상은 거룩함의 특성인 온전함(레위10,10)을 파괴하고, 현상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선포된 것이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2)

'데려가야 한다'로 번역된 '후바'(huba)'들어오다(가다)'란 뜻을 지닌

'보'(bo)의 수동 사역형으로 '그가 데려와질 것이다'(he shall be brought)란 뜻이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신의 수치나 아픈 곳을 될 수 있는 한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결과 자칫하면, 공동체 전체를 부정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이

공동체에서 끊어지는 운명을 맞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나

친척등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데려와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까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스스로가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사제에게 데려와지는 것이다.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사제는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해야 한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13,44~46)

 

다른 부위에 발병한 피부병의 경우는, 2주간에 걸친 유예 기간과 거듭되는

관찰이 요구되었던 반면에, 머리에 발병한 피부병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진단과 판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머리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지배하는 몸의 최고 기관으로서

부정함이 노출 되어서는 안된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라는 본문이 환자의 부정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내는 것처럼 전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사제가 '그의 상처가

그의 머리에 있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옷을 찢어 입고'에 해당하는 성경 원문은 찢겨진 옷들을 계속해서

입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 촛점을 맞추고 있다.

 

옷을 찢는 한 번의 행위는 극도의 슬픔을 단숨에 표현하는 것이지만

(창세37,34; 2사무1,11), 찢어진 옷들을 계속해서 입고 다니는 것은

죽음의 기운이 자기 위에 있음과 자기 애도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감염성 피부병으로 인해 온 몸에 찢어진 옷을 걸쳐야 하는 것은

아무리 조그마한 상처라도 그것은 결국 온몸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으며,

아무리 미약한 부정함이라도 온 인격체에게서 거룩함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짓는 죄악이 아무리 미약해 보여도 그것이 부정한 죄라면,

온 인격체가 그 고통을 다  뒤집어써야 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의미도 지닌다.

 

'머리를 푼다'에서 '머리를'에 해당하는 '로쇼'(rosho)'머리'를 뜻하는

'로쉬'(roshi)에 대명사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 '그의 머리'란 뜻이다.

 

그리고 '푼다'에 해당하는 '파루아'(pharua)'(머리를)풀다'란 뜻을 지닌

'파라'(phara)의 단순형 수동태 분사로서 '풀어져 있는'이란 뜻이며,

'하야'(haya)동사의 미완료형'이흐예'(yhye)와 함께 쓰여져

계속적인 상황을 강조한다.

그래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머리는  풀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이다.

 

앞 부분의 옷을 찢는 것처럼, 이 경우에도 머리를 한 순간 풀어 헤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머리를 풀고 있어야 한다는 명령이다.

 

이처럼 부정은 인간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외모를 꾸미고 다듬는다고해서 나아질 수 없으며, 오직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며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 드려야 했던 것이다.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친다'(45)

'콧수염'으로 번역된 '사팜'(sapham)'코밑 수염' 뜻하며, '가리고'

해당하는'야테'(yate)의 원형 '아타'(ata)'덮다'(시편71,13), '입다'

(1사무28,14)등으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덮어 가리우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입술을 가리우는 행동은 에제키엘 24장 17절, 22절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태도를 상징하며, 미카서 3장 7절에서는 수치당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 '입술을 덮어 가리운다'의 표현은 죽은 상태와도 같은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애도이며, 또한 수치를 당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회에서 혼자 고립되는 것은 죽은 상태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으며, 더욱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접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에게는 결국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총체적인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콧수염으로 입술을 가리고 그가 해야 했던 일은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크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 행동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타인에게, 부정함이 옮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부정이 발산되는 것을 막는 상징적인 행위인 동시에,

위생적으로 감염을 방지하는 실질적인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46)

 

본문은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외롭게 홀로 거할 것은 물론, 그의 삶의

본거지가 공동체와는 격리된 진영 밖이 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이며, 영적 죽음의 상태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지의 사람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계약(언약)의 축복으로부터

단절이며, 하느님의 거룩함을 접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질병이 죄의 결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적인 사건을 보면, 죄에 대한 심판으로 질병이 발생되었던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민수12,8~10; '미리암의 문둥병').

 

또한 감염성 피부병에 대한 치료책이 주어지지 않았음으로, 그 병에 걸린 자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생각할 때에, 질병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새 계약 공동체에서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병환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고쳐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8,2~4; 11,5; 마르14,3).

 

이것은 더 이상 질병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부정한 자를 상징하는 기준으로

사용될 수 없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옛 계약의 시대가 끝나고 새 계약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새 계약의 공동체는 정결과 부정의 기준이 더 이상 외형적인 질병이

될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으며, 오히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내적인 것들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마르7,20~23).

 

 

 

 

  연중 제6주일 복음(마르1,40~45)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1~42)

 

'나병환자'로 번역된 '레프로스'(lepros; a leper)는 오늘날의 한센씨병

(Hansen's disease), 즉 나병이 아닌 일종의 피부병으로 여겨진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정상인들과 함께 살 수가 없었고,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생활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부정한 자로 취급받아 종교적으로도 배척을 받았다

(레위13,45.46).

따라서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일은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어,

회당의 한 구석에 칸막이 너머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본문은 환자가 먼저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최초의 기록이다.

 

그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격리의 대상으로서 먼저 정상인에게 다가가서는 안된다는

율법 조항을 어기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으로부터 치유를 받기

원하는 그에게는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없었기에,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과감하게 예수님에게로 나아갔던 것이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고'에 해당하는 '고뉘페톤'(gonypeton; kneeling down)

극도의 존경심을 표현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40절 후반부'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고자 하다'(원하다)에 해당하는 '텔레스'(theles; you will;

you wish)'하실 수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뒤나사이'(dynasai;

you can make)는 모두 현재형이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병 고치는 능력이 있으며, 일반 의원과는 달리

지금 당장 낫게하는 신적 능력을 가진 메시야로 믿었다는 사실

잘 보여 준다.

 

특히 여기서 '깨끗하게'에 해당하는 '카타리사이'(katharisai; clean)

기본형인 '카타리조'(katharizo)육체의 불결함이 깨끗해질 때도 사용되며

(마태23,25.26), 도덕적, 종교적 정결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사도15,9; 2코린7,1).

 

나병환자가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병이 주는 육체적 고통보다는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취급받는 것이 더 큰 문제였음을 암시한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께 나아온 이 나병환자는 종교적으로

매우 갈급한 심정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엾은 마음을 가지신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에 해당하는 '스플랑크니스테이스'(splangchnistheis;

Jesus moved with compassion)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

(splangchnizomai)는 원래 인간의 '내장' 가리켰으나, 점차 '사랑'이나

'애타는 마음'이라는 뜻을 갖게 된 '스플랑크논'(splangchnon)에서 유래하여

찢어질 듯한 마음을 뜻한다.

 

어떤 사본에서는 이 단어 대신에 '노하셔서'에 해당하는 '오르기스테이스'

(orgistheis)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나병환자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신명6,5)과

이웃 사랑(레위19,18)계명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단죄하고 그들을 격리시키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 당시 사회와

종교를 향한 의노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병환자를 향한 주님의 행위는 그들의 잘못된

해석과 관행을 뛰어넘는 참된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치유였다.

 

마르코 복음 1장 42절에서 '나병이 가시고' '가시고' 해당하는 '아펠텐'

(apelthen; departed; left)원형 '아페르코마이'(aperchomai)

인격적 분리보다는 장소적 이동에 비중이 있는 단어이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예수님께 나아온 나병환자의 병이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의해 즉각적으로 떠나갔음을 보여준다.

 

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나병환자를 단죄하고 그를 격리하는 일밖에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의 병을 고치셨다.

 

이것을 통해 진정으로 신뢰하고 따라야 할 자는 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요 목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히브2,17).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2).”


여기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믿지만, 

예수님의 의향은 모르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은 아직 부족하거나 없는 상태라는 것.)

 

이 말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말이 마르코복음 9장에 나옵니다.

마귀 들린 어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마르 9,22).”

(이 말은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이 말씀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인데,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합해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권능은 있지만 자비가 없는 분이라면?

그러면 인류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서운 신으로서 군림하려고만 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자비는 있지만 권능은 없는 분이라면?

그러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 쪽에서 예수님의 권능만 믿고 자비를 안 믿는다면?

그러면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만 생각하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계명들은 모두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와 멍에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에 예수님의 자비는 믿어도 권능을 안 믿는다면?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을 존경하긴 해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너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즉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것은,

원래 내가 원하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라신 일이기 때문에

병자가 청하지 않았어도 그를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는 원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랑’과 ‘자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에 오시어,

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이 말도 이렇게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분을 알기도 전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숨을 거두실 때,

그 상황을 계속 보고 있었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라고 말했는데(마르 15,39),

아마도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거나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치유 기적 이야기들 가운데에는

당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도

예수님께서 병자나 장애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어떤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하고 묻자(요한 9,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예수님)의 사랑’으로 해석됩니다.

물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려고 그 사람을 눈멀게 하셨다는 뜻은 아니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서도 하느님의, 또는 당신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눈먼 이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고, 믿음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요한 9,36).”

그 눈먼 이는,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그분의 사랑을 먼저 받았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우리를(‘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여기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킵니다(요한 13,34).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 환자를 가장 무겁게 억압하던 것은 가족과도 격리되어 살아야 한다는 지독한 소외감이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것은 하느님에게서마저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입니다. 육신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지요.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돌려주신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귀한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생명, 사랑, 희망, 지혜, 인내, 그 밖에 세상의 그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 많습니다. 이런 귀한 가치를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자신에게서 긍정적인 면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상대방도 이런 귀한 것을 많이 갖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오늘 나병 환자도 비록 악성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얼마나 귀한 것을 많이 지니고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 용기, 추진력이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가 지닌 귀한 가치, 그의 가능성을 보시고는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소외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지닌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잘 가꾸어 나가도록 그들을 따스하게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11 0

추천  0 반대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