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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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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저의 하느님!(요한 20,19-31)

95 김종업 [rlawhddjq] 2018-04-08

 

[부활 제2주일]저의 하느님!(요한 20,19-31)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 4,32-35)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긴다고 한다. (1요한 5,1-6)
사랑하는 여러분,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비시고,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던 토마스에게도 나타나시어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신다.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4,32~35)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2)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하판타 코이나'(hapanta koina)라는 진술은 사도행전에서 두번 등장한다. 

한번은 사도행전 2장 14~40절에 행해진 베드로의 일차 설교 후에 일어났고(사도2,44), 본문에서는 공동체가 함께 공동(합심)기도(사도4,24~30)를 한 후에 일어났다. 

위의 두 사건은 설교(말씀선포)와 기도라는 차이점은 가지고 있지만, 말씀과 기도를 전후로 하여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사도2,4; 4,31). 

자신의 물건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타락하여 이기적인 심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단순한 윤리적인 양심이나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의 강요를 통해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공산주의(구소련과 동구권의 몰락)는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심을 배제한 무모한 제도였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므로 성령의 철저한 역사하심과 친교하심이 없이는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재물을 공유한다는 제도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라 할 수 있는 지상 교회에서조차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구성원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을 때만이 한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경천애인'(애주애인)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더욱 더 잘 실천하기 위해서 복음 3덕(청빈, 정결, 순명)을 서약하는 수도 공동체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교회가 그대로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는 없고, 실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그 정신, 즉 인간의  이기심이 극복된 아름다운 정신만큼은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모범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3)

'증언하였고'에 해당하는 '아페디둔 토 마르티리온'(apedidun to martirion)에서 '아페디둔'의 원형 '아포디도미'(apodidomi) '마땅히 치러야 할 것을 갚아버리다', '빚을 갚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마태18,25; 묵시22,12). 

즉 사도행전의 저자에게 있어서 그들의 복음(예수의 부활) 전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4~35) 

여기서 '팔아서' 해당하는 '폴룬테스'(poluntes)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분사의 현재 능동형이고, '가져다가'에 해당하는 '에페론'(eperon)아직 완결되지 않은 행위를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능동형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초대 교회가 물질과 마음을 서로 나누는 행위가 수석 사제들의 핍박과 위기감 속에서 행해진 기도 뒤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초대 교회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친교하심을 통해 능동적이며, 한시적이나마 상당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행해진 일상 생활의 한 단면이었음을 강조한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뜻은 돈이 놓여진 위치가 아니라 돈을 관리하고 사용될 곳을 결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었느냐 가르쳐 주고 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하고 성찬을 인도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행정과 재정까지도 맡아 보았다.  

그러다가 후일 신도들의 수가 늘고 업무가 늘어나자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고, 부제를 선출해서 행정과 재정 또는 자선 등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사도6,1~7). 

'필요한 만큼'으로 번역된 '카도티 안 티스 크레이안 에이켄'(kathoti an tis chreian eichen)'어떤 사람이 필요를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서' 뜻이다. 

원문으로 볼때 본문은 초대 교회 당시 믿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명문적 규정은 없지만, 꼭 필요한 자에게 어떠한 차별도 없이 필요한 만큼 적절히 분배되었음잘 드러나고 있다. 

더 많이 가지려는 다툼이나 정분관계에 의한 분배의 정의가 흐트러짐 없이 모든 일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복음(요한20,19-31)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요한 복음 1장 34절에서 세례자 요한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라고 한 외침이나, 요한 복음 1장 49절에서 나타나엘'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라고 한 고백과 함께 요한 복음 2장 28절'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담겨진 신앙 고백이다.

특히 요한 복음 2장 28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된 문맥에서 고백된 내용이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요한 복음사가는 요한 복음 1장 1절에서 본서의 첫 시작'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하였고, 본서의 종결부요한 복음 20장 28절에 와서는 '저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

이것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개개인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요한 복음의 강조점을 드러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8절에서는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가 예수님께 대하여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이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는 '~이시며''~이십니다'로 번역되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관사 '호'(ho)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 천주성)이 더욱 강조된다.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런 뉘앙스를 살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My Lord and my God)라고 번역했다.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게 되자 창자국와 못자국을 직접 만져 볼 필요도 없이(요한20,28) 그의 모든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기보다는 놀라움에 찬 탄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토마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놓았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9)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 apistos)'믿는 자'('피스토스'; pistos)가 서로 대조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헤오라카스 ~ 페피스튜카스'; 'heorakas ~pepisteukas)'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 '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이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의 선택은 당시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서의 일차 독자들인 초대 교회 신도들이나,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던져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들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 다다르지 못한, 수준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루카24,10.11).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들이다.


코린토 1서 15장 5절과 6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은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서야 믿은 자들이다.

얼핏 보기에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더 복있는 자들인 것 같지만, 요한 복음 20장 29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더 복된 사람들이다.

'믿음 없는 자'(apistos)보다는 보고서라도 믿은 자들이 더 복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들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또한 지금도 직접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이 부활의 진리를 믿는, 예수님 승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더 복된 사람들인 것이다(로마10,9).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여기서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라는 말은,

“박해받고 죽는 것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다.” 라는 뜻입니다.

숨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평화’를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이 인사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평화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주신다고 저절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받는 쪽에서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잘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평화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이 말씀들을 모두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잘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은 평화를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평화도 없습니다.

(문을 잠가 놓고 숨어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은 믿음이 약해진 모습입니다.

믿음이 약해졌으니 평화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예수님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과 부활해서 나타나신 예수님이

같은 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일이기도 하고,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기뻐하였다.” 라는 말을, “약해졌던 믿음이 다시 강해지고,

평화를 다시 얻게 되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여기서 ‘평화의 인사’는 앞의 인사와 다릅니다.

앞의 인사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말씀이었고,

여기서는 온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고 증언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은,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이고,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도 너희를 보낸다.”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즉 선교활동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여기서 ‘평화’ 라는 말은 구원받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일은, 그들에게 ‘힘’을 주신 일이기도 하고,

성령을 통해서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용서의 권한’은 제자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용해야 하는 권한입니다.

또 여기서 ‘용서’ 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구원’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과 ‘용서의 권한’을 주신 일은 사도단 전체에게 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 사도도 함께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자,

토마스 사도는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그들은 ‘보았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따라서 토마스 사도가 한 말은,

“나도 당신들처럼” 보게 된다면 믿겠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이 말씀은, 토마스 사도를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의 요청에 ‘사랑으로’ 응답하신 말씀입니다.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안 믿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인데,

뜻으로는 “보지 않았다고 안 믿는 사람이 되지 말고,

보지 않았어도 믿는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저의 주님”이라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신앙고백이고,

“저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았다는,

즉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을 보자마자 믿었고,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첫 제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이 말씀은 겉으로는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부활 당시에 살았던 사도들과 신자들 외에는,

모든 사람은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또 성경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써 행복하게 됩니다.

즉 ‘구원’이라는 복을 받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는 본래 행복하다"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토마스가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가 믿음이 약하다고 질책하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우리도 가끔은 토마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눈앞에 하느님께서 나타나 주시기를, 그분의 강력한 표징을 보여 주시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연 과학이 말하는 증명을 통한 확실한 근거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한 삶의 표양으로 확실성을 얻는 신뢰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토마스의 불신앙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 눈으로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혹과 불신이 있음에도 어떻게 그분을 따를 수 있는지 길을 제시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곧, 부활은 먼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두려워 떨며 영혼의 밑바닥을 직시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해방시키신 성령을 입을 때 체험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부활은 인간이 태초에 하느님께 지음받을 때 “흙으로 빚어 코에 숨을 불어넣어 주신” 장면을 연상시키며,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얻은 새 생명은 진리의 성령을 따르는 삶이고, 초기 교회가 자아의 탐욕과 욕망에서 벗어나 가진 것을 나누고 필요한 만큼만 쓰며, 공동으로 소유하는 삶을 살면서도 기쁨에 가득 찬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출발점이었습니다.
믿음은 성령 안에 사는 것이며, 성령을 입은 사람은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이유 없이 이웃의 험담을 하며 흉을 보거나 악과 담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 안에 사는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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