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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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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증인 (루카 24,35-48)

97 김종업 [rlawhddjq] 2018-04-15

 


 

<부활 제3주일>증인 (루카 24,35-48)

 

베드로는 백성에게,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이라며,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한다. (사도 3,13-15.17-19)
그 무렵 베드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시라고 한다. (1 요한 2,1-5ㄱ)
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비시자 그들은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다. (루카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베드로의 설교

 

 부활 제3주일 제1독서(사도3,13~15.17~19)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14~16)

 

사도행전 3장 11절부터 26절까지는 예루살렘 성전 '아름다운 문'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치유 사건으로 인하여 놀라서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한 사도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앞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장에서 행한 첫번째 설교(사도2,14~36)에 이어 사도 베드로의 두번째 행하여진 설교이며, 첫번째 설교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선포하고, 모여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생명을 기준으로 즉 바라빠는 생명을 죽이는 자로,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분으로 대조한다.  

사도 베드로가 두 인물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생명을 죽이는 바라빠를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영원한 죽음을 취한 어리석은 민족이요, 미련한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하다' 표현은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하느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거룩한 표현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고'에 해당하는 '하기온'(hagion)이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속성을 지니신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의로우신'에 해당하는 '디카이온'(dikaion)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공의(公義) 대변한다. 

'거룩하고'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거룩함 하느님과의 관계 대변한다면, 의로움인간과의 관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분의 성격을 규명하고(사도,27.30), 의롭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운 성품과 삶을 대변한다(사도7,52; 22,14). 

결론적으로, 베드로가 유대인들이 생명의 주이신 메시아를 거부하고 살인자를 선택한 사실을 상기, 부각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살인자라는 것이다. 

'생명의 영도자' 번역된 희랍어는 '퀴리오스'(kyrios)가 아니고 '아르케고스'(archegos)이다. '아르케고스'(archegos)'어떤 분야의 길에 가장 먼저 들어서는 인도자나 선구자'라는 의미이다(히브2,10). 또한 어떤 일의 기원자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생명의 영도자''생명의 근원자' 혹은 '생명의 부여자'라는 뜻이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얻게 하시고 풍성하게 얻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자란 이름이 적합하며(요한10,10),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한계를 갖는 육체적 생명이 아니고 영원토록 죽지 않는 영적 생명이다(요한17,1.2). 

그리고 '여러분은 ~죽였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펙테이나테'(apekteinate)에서 '여러분'사도행전 3장 14절 주어 '휘메이스'(hymeis)와 같다. 

실제로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린 법정은 로마의 법정이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직접 시행한 자들은 로마의 군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가 강조형 주어(인칭대명사)까지 사용하여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을 유대인으로 지목하여 단죄하는 이유이 죄가 법률적인 죄가 아니고, 신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증인'으로 번역된 '마르튀레스'(martyres)피고의 죄를 변호하거나 고발하기 위해 세워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이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실제로 본 목격자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다른 이들 앞에서 알리기까지 하는 증인이었다. 

증인들이 증거하는 것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한편, 역설적인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바른 증인으로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살인자를 놓아 주게 하고 무죄한 자를 죽이라는 불의한 증언을 한, 잘못된 증인이었던 유대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순히 명칭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앉은뱅이였던 사람의 다리를 낫게 한 주체가 그 사람이 믿은 이름이라는 사도 베드로의 주장그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아직 살아 계시며 병조차 복종시키는 능력과 권세를 지녔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표현이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란 표현에서도 나오지만, 믿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의 대상이다.  믿음의 대상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앉은뱅이를 낫게 한 믿음의 주체 사도 베드로로 보는

 경우와 앉은뱅이였던 사람으로 보는 두 가지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낫게 하셨다고 병자들을 칭찬하셨던 것에 근거해서(마태9,22; 마르10,52),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믿은 앉은뱅이였던 사람 자신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19) 

베드로의 설교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청중들의 회개에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회개하고'에 해당하는 '메타노에사테'의 원형 '메타노에오'(metanoeo)'생각을 바꾸다'(change thought)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자기가 옳다고 여겨왔던 모든 가치관과 생활 습관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전인격적인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3장 19절과 20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세 가지인데, 첫번째 보상이 죄가 지워진다는 것이다.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해당하는 '엑살레입테나이'(eksaleipthenai)'지우다'(묵시3,5), '씻어 내리다'(묵시7,17)는 뜻을 지닌 '엑살레이포'(eksaleipho)수동태 부정사로서 전치사 '에이스'(eis)와 함께 '죄가 지워짐을 받으려면'(씻기움을 받으려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죄가 지워짐을 받는 것'회개하고 돌이키는 결과로 오는 보상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글을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썼다. 그런데 당시의 잉크는 오늘날처럼 산이 섞이지 않은 잉크였기 때문에 한번 쓰여진 글이라도 고치고 싶으면 물묻은 스펀지로 한 번 닦으면 말끔히 지워졌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간에 심지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인 죄를 지었을지라도, 일단 회개하면 그 모든 죄는 기억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이다(이사43,25).


 

 부활 제3주일 복음(루카24,35~48)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39)


여기서 '내', '나의'에 해당하는 '무'(mu; my)두 번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신 의도가 명백해지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유령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의 그릇된 생각을 수정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령이 아니라 실제 육체를 가지신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당신의 손과 발을 확인함을 통해 깨닫게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손과 발인가?

루카 복음사가는 여기에 대해 확실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요한 복음 20장 25~27절은 그 손과 발에 '못 자국'(못박힌 자국)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당신 자신이 '몸'이 없는 유령이거나 혹은 '또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과거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고 기적을 베풀며,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바로 그 예수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24장 39절에는 명령형 동사가 세 번 나오는데,  첫번째'보아라'에 해당하는 '이데테'(idete; Look at)이고, 두번째'만져'에 해당하는 '프셀라페사테'(pselaphesate; touch)이며, 세번째'보아라'에 해당하는 '이데테'(idete; see)이다.

이 세 동사는 모두 복수 2인칭 부정(不定) 과거 명령형으로서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거듭 세 번의 명령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구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는 '만져'로 번역된 '프셀라페사테'((pselaphesate)이다. 이것은 '손으로 만지다'를 뜻하는 원형 '프셀라파오'(pselaphao; touch; handle)명령형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실제 육체를 지녔음을 접촉을 통해 확인하라는 뜻이며, 육체적 부활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증명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 단어는 요한1서 1장 1절에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성(人性)을 지녔음을 증명할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5).”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입니다(루카 24,13).

‘길에서 겪은 일’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설명해 주신 일입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즉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두 제자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사도들에게 자기들이 겪은 일을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의 믿음은 모두의 믿음으로 확산됩니다.

(사실 두 사람이 겪은 일은 두 사람만의 체험입니다. 다른 증인도 없고, 물증도 없습니다. 만일에 확신이 없었다면 증언하지 못했거나, 많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5-48)”

여기서 ‘그들’은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셨던 것처럼 사도들에게도 성경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마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 설명을 듣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또 모든 일이,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쩌다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작용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여기서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이고,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증언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나를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선포하여라.”이고,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는 “너희는 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여라.”입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제자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셨을까? 다윗 왕이 왕국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한 이후로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는 말 외에는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믿음’은 고백하고 증언해야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기쁜 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비로소 ‘기쁜 소식’이 됩니다.

만일에 믿으면서도 고백하지 않고 증언하지 않는다면, 또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등불을 가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고백하고 증언하지 않는 믿음은, 또 전파하지 않는 기쁜 소식은, 차츰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져버립니다.

(만일에 증언하지 않는다면, 믿어도 믿는 것이 아닌 것이 되고, 전파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닌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3-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나 사도들이나 모두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은 그들만의 체험입니다. (다른 신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어두운 골방에서 이루어진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인들은 그 일을 ‘밝은 지붕 위에서’, 즉 공개적으로 널리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다가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선교활동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활동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활동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이 말씀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은, 신앙인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을 뜻하고, “사람의 아들도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그를 구원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 라는 말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는 자들과 자신의 신앙을 감추는 자들, 또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신앙과 복음을 감춘 것처럼 되어버린 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신앙고백과 증언은, 그리고 복음 선포는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깨띠 두르고 길거리로 나가지 않더라도, ‘삶’을 통해서 믿음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유령인가? 땅 위의 신앙인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의 수만큼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어떤 이들은 땅에 발을 딛고 하늘만 쳐다보며 살아간다.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하늘에 마음을 두되 땅에서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길을 찾아보자! 루카 복음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는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발현’ 이야기와 더불어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할 증인임을 말해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24,37). ‘유령’은 정신 또는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서, 루카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바로 그 몸 그대로 지금 실제로 살아 계시므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말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과 뼈가 있음을 보여주시고(24,39) 또 제자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하신 분의 몸이 곧 사도들이 십자가상에서 보았던 고통을 당하신 몸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부활 이전의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같은 분이시며,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구원사건임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 가르치고 행하셨던 그 모든 것과 십자가 신비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봐야 함을 확인시켜주시면서, 성경을 깨닫도록 마음을 열어주셨다(24,44-45).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체험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의 회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일’(24,47-48)이다. 부활의 신비는 제자들의 복음선포 사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 ‘죄의 회개’의 선포란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다. 이는 부활의 신비를 어떻게 바라보고 부활하신 분의 삶에 어떻게 참여하느냐 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저 먼 하늘’이나 ‘초월의 신비’ 속에 유령처럼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죽음 전과 후가 다름없이 실제로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 안에서 나의 생각의 전환, 행동의 개선을 이루어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죄의 회개’의 증거일 터이다.

어떻게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땅’(세상)에 살면서 땅을 보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며 그릇된 영신주의나 신비 속으로 도피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현실의 고통, 사회적 불의, 정치권력과 기업가들의 부정부패, 인간 존엄성의 말살 앞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죽으시어 부활하신 것처럼 ‘하늘’을 품고 ‘땅’에서 그 사랑을 노래하고 그 사랑이 현실화되도록 죽어야 한다. 나 자신의 건강과 유익을 앞세우고, 자기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는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면서도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고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신앙의 이름으로 국가수호를 표방하며, 입으로는 세상과 교회를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실천은 하지 않는 모습이 곧, ‘유령’을 찾고 있는 거짓 신앙, 신앙의 탈을 쓴 연극이 아니고 무엇일까? 나는 ‘땅’에 발을 딛고 멍하니 하늘만 보며 살아가는 ‘유령’인가? 아니면 ‘하늘의 뜨거운 사랑’을 품고 땅위에서 더불어 고민하고 아파하는 세상 속의 부활한 신앙인인가?  
기경호 프란치스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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