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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태 28,16-20)

105 김종업 [rlawhddjq] 2018-05-27

 

 

[삼위일체 대축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태 28,16-20)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잘 지키면 그분께서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고 한다. (신명 4,32-34.39-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녀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하고 부른다고 한다.(로마 8,14-17)
형제 여러분,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이르신다.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신명4,32~34.39~40)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 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39~40) 

 

여기서 '오늘'에 해당하는  '하욤'(hayom)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 현재의 시점과 밀접하게 관계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이 과거에 묻혀진 고고학적인 유물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언제나 현재의 시점에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로 번역된 '하셰보타 엘 레바베카'(hashebotha el lebabeka)에서 '하셰보타''돌아가다'란 뜻의 '슈브'(shub)의 사역형으로 '다시 돌이키다', '다시 회복하다'란 뜻이고, 전치사 '엘'(el)은 돌이켜야 되는 방향을 말해주며, '레바베카' '너의 마음'이란 뜻이다.

따라서 '너의 마음을 다시 회복시키다'는 뜻으로 새 성경에서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로 잘 번역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결코 과거 한 순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부패하고 타락하기 쉽고 하느님을 멀리하기 쉽기 때문이다. 항상 '오늘'이라는 현재의 시간에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새롭게 마음에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의 땅 이집트에서 이방의 문화와 종교에 둘러싸인 채로 430년을 살아온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려고 하는 가나안 땅 역시 거짓된 이방의 신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현재라는 시점에서 마음에 항상 하느님께서 유일하신 분이란 사실을 새롭게 다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오늘날 종교 다원 주의의 물결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신명4,35)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 되고' 

본문에서 관계 대명사 '아셰르'(asher)'그래야(그래서) ~ 하도록'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아셰르'는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키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말해주기 위해 쓰인 관계 대명사이다. 

한편, '잘되고'로 번역된 '이타브'(itab)의 원형은 '아타브'(yatab)로서 '좋은'이란 뜻의 '토브'(tob)와 어근이 같은 말이며, 거기에 전치사 '레'(le)와 함께 쓰여서 '~에게 잘 되어가다', '~에게 기쁨이 되다' 뜻이다.  

그리고 이 단어의 주어는 바로 앞에서 다룬 내용 전체, 즉 '모세가 명하는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키는 행동'이다. 이런 의미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너희와 너희 자손들에게 기쁨이 되고 좋은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과 하느님 백성의 삶의 행복은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결과는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 그 자체가 곧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자신의 현세적 복(福)에 관련시키는 자기 중심적인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하느님 중심의 차원 높은 신앙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마태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18ㄴ~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에 해당하는 '파사 엑수시아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 (pasa eksousia en ourano kai epi tes ges;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에서 '하늘과 땅의'로 번역된 '엔 우라노 카이 에피 테스 게스'(en ourano kai tes ges)'하늘 안에 그리고 땅 위에'로 직역되는데,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을 말한다.

그리고 '권한'에 해당하는 '엑수시아'(eksousia)는 신약에서 '권세', '권능', '권리', '힘', '자유함'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중보자(중재자)로서의 권한'이 강조된다.

 

또한 '나는 ~받았다'에 해당하는 '에도테 모이'(edothe moi; was given to me)에서 '에도테'(edothe)'주다'는 뜻을 지닌 '디도미'(didomi) 동사의 직설법 부정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로서 '그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쓰인 것은 성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동사가 부정(不定) 과거형으로 쓰인 것은 예수님께서 받은 권한이 단번에 받은 것임을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화(강생) 이전에도 성자로서 성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가지셨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자연계와 영계를 제어하는 권한을 나타내보이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 권한은 신성(神性)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지니셨던 권한에 비하면 제한적이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십자가상 구속(대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잠시 성부 하느님께 맡겨 드렸던 본래의 권한을 다시 받아 회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속 사업과 부활 이후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오직 구속 사업을 완수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과 심판의 권한을 행사하기로 하셨다(요한5,20~22.30).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그 권한을 가지고,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서 제자들에게 선교 명령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영역인 하느님의 나라는 선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확장되고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너희는 가서'로 번역된 '포류텐테스'(poreuthentes; go)복수 2인칭 명령 분사이며, '너희'는 직접적으로 승천 직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을 지칭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사도1,8참조).

그리고 제자로 삼아야 할 대상은 '모든 민족'이다. 여기서 '민족'으로 번역된 '에트네'(ethne)'에트노스'(ethnos; nations)의 목적격 복수로서 제자를 삼는 대상이다.

 

또한 '제자로 삼아'에 해당하는 '마테튜사테'(matheteusate; make disciples; teach)'마테튜오'(matheteuo)의 복수 2인칭 명령형 동사이다. 이 동사는 '너희는 가서'에 해당하는 '포류텐테스'(poreuthentes), '세례를 주고'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가르쳐'에 해당하는 '디다스콘테스'(didaskontes)세 개의 분사에 둘러싸여 있다.

원문의 뜻은 '제자로 삼는 일''가는 것''세례를 주는 것''가르치는 것'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상 명령의 궁극적인 핵심을 보여 주는데, '제자로 삼는 일'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이며, 나머지는 이에 수반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밥티존테스'(baptizontes; baptizing)현재 분사인데,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세례가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행해져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데, 세례가 바로 제자로 삼는 수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밥티존테스'(baptizontes) 기본형인 '밥티조'(baptizo)본래 '담그다'는 뜻을 지닌 '밥토'(bapto)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동사가 '세례를 받다'(사도1,5)는 세례 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일 때에는 '담그다''씻다'(루카11,38참조)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가 있다. 

먼저 이 동사를 '담그다'는 의미로 볼 때, '세례'몸을 물에 담그는 의식을 나타내며, 영적으로 믿는 이들이 세례 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참여한다는 뜻이 강조된다(루카12,50; 로마6,3).

또한 이 동사를 '씻다'는 뜻으로 보면, '세례''죄의 씻음', '죄의 용서'라는 의미가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사도2,38; 22,16).

 

실제로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뜻과 더불어 죄사함의 이중적인 의미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운데 한 분이심을 명확하게 하셨다.

 

 


<삼위일체의 신비 - 사랑의 신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이 말씀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라는 말씀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사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성령을 받아서 성령과 일치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세례식 때에 주례 사제는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개)에게 세례를 줍니다.”

라고 말하면서 세례를 줍니다.>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의 신비이며,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신앙 교리입니다.

즉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세 위격은 동일하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십니다.

이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성이고, 하나의 하느님 본질이고,

하나의 하느님 실체입니다.

세 위격의 관계를 보면,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자는 성부께 낳음을 받으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두 위격에서 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낳음’은 인간의 낳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불이 켜짐과 동시에 불꽃이 생기는 것과 같이 시공의 간격이 없는 낳음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도 인간적인 부자 관계가 아니라,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절대 완전하신 성부는 영원으로부터 계시고,

이 성부의 ‘이념’이 성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를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서로 무한히 사랑하셔서

또 하나의 위격, 즉 성령을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삼위 일체 신비는 우리 구원의 근거이며 목표입니다.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과 역사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성자는 당신의 삶과 죽음과 활동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여

교회를 건설합니다.>

(“천주교 용어 사전. 2010. 최형락 신부. 도서출판 작은 예수.”에서 옮겨 적음.)


<이 글은 삼위일체 교리를 간단하게 설명한 것인데,

용어를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아닙니다.

어려운 신학 이론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직접 본 사람도 없고, 하느님의 신비를 직접 본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또 실제로 그렇게 말하신 분은,

딱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적도 없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해 주신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와 당신이, 또 당신과 성령이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된’ 교리, 즉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교리입니다.

인간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서 설명할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고,

어떻게든 설명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이 왜 삼위일체이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삼위가 일체일 수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살아계시는 성령도 하느님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성부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해야만 했고,

또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라는 원래의 믿음과 합해야 했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신비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된다면,

그때에는 모든 것을 다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이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듯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묵상해야 하고, 또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아버지로서 자녀인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과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그 사랑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으로 활동하시는 그 사랑이

제각각 구분되고 다르면서도 사실은 하나의 사랑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세 분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사랑에 우리도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1.24.26).”

신앙생활의 목표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사랑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방법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 실천’과 ‘사랑 실천’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삼위일체란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성부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계획을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 계획에 따라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승천하신 다음 하느님의 혼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어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렇게 저마다 역할이 다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일치하시어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계신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온전히 닮음으로써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지요.
첫째, 인류 구원 계획을 세우신 성부 하느님을 본받아 모든 말과 행동의 원천인 생각부터 올바르게 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물의 악한 면이 아닌, 선한 면을 먼저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상대방에게 힘과 기쁨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 역시 이웃에게 먼저 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성화를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성령을 본받아 생각과 말에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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