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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1주일]하느님의 나라(마르4,26-34)

108 김종업 [rlawhddjq] 2018-06-17

 

 

 


[연중 11주일]하느님의 나라(마르4,26-34)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손수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시어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게 하신다고 한다. (에제 17,22-24)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확신에 차 있다고 한다. (2코린 5,6-10)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7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9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10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 땅에 뿌릴 때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뿌려지면 어떤 풀보다 커진다고 하신다. (마르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에제17,22~24)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22~24)

 

에제키엘서 17장의 결론 부분인 22~24절은 지금까지 주어진 비유의 연장으로서 주 하느님 주권에 의해서 선민 회복 예언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 제시된 어두운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키고도 남을 만큼 밝고 희망에 찬 예언이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앞의 예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먼 미래에 있을 일을 말하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에제키엘서 17장 1~10절 비유에서는 향백나무 높은 가지를 꺾는다는 표현이 제시된 후, 그것을 냇버들처럼 버들잎 사시나무처럼 큰 물 곁에 심었고, 그것이 키가 낮은 포도나무처럼 되었다고 서술한다(3~6). 그런데 본 단락에서 향백나무가 또 다시 언급되지만, 버들나무나 포도나무로 바뀌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서 혹자는 이 단락의 주제를 '메시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의 약속'으로 정하고, 이 모든 예언이 미래에 구세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여기 언급된 향백나무의 꼭대기다윗 가문의 후손을 상징하고, 높은 가지 영원한 왕좌를 차지하실 메시아를 상징한다.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상징하는 연한 가지 무성하게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 크고 아름다운 향백나무로 자랄 때,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고 그 그늘에서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오셔서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 희생 죽음을 당하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축복을 누리도록 길을 열어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어 영적 혜택을 받을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만민에게 주 하느님께서는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느님이신 것을 자신의 비천한 출생과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의 생애를 통해 분명히 알리실 것이다. 

이러한 예언으로 본장이 끝마쳐지는 것은 남부 유다 왕국의 치드키야 임금이 비록 이집트를 통해 복을 얻으려고 했지만, 진정한 복은 주 하느님께서 친히 제시하시는 통로를 통해 온다는 사실을 교훈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한편 본문에서 '내가'에 해당하는 '아니'(ani)는 강조적 의미를 함축하는 인칭 대명사이다.

 

본절에서 주 하느님('내가')의 행위는 에제키엘서 17장 3~4절에서 큰 독수리가 향백나무 높은 가지를 꺾는다는 것과 대조된다. 

에제키엘서 17장 3절 이하의 경우는 이스라엘 자손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지만, 주 하느님께서 그 높은 가지를 꺾어다 심는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 복을 내리시기 전에 먼저 즈루빠벨(기원전 597년 제1차 바빌론 유배 때 끌려간 남부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여호야킨의 손자; 2열왕 24,8~17; 25,27~30; 하까이2,23)이라는 다윗의 후손을 바빌론 포로지에서 꺾어 이스라엘 고토에 심으시는 일을 행하실 것이다.

하지만 즈루빠벨은 주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그 구원사업의 최종적 주역은 아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그 높은 가지 끝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실 일이 남아 있으며, 그 연한 가지 즈루빠벨의 가계 혈통을 통해 태어나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지칭하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여기에서 주 하느님께서 친히 꺾어 옮겨 심으시는 '연한 것'에 해당하는 '라크'(raq)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햇순(새싹)같은 메시아 상징한다(이사11,1; 53,2; 즈카6,12).

 

이러한 '연한 것'이 하느님에 의해 심겨지는 '높고 우뚝한 산'에 해당하는 '하르 까보아흐 웨탈률'(har gaboah wethalul)은 그 위용이 다른 높은 산들과 비할 바 없이 탁월하며 높고 웅장한 산을 의미한다.


이 산은 에제키엘서 17장 23절에서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으로 재차 설명되며, 이사야 2장 2절에서는 모든 산들 위에 뛰어나 종말에 모든 민족들이 모여들 하느님의 산(집)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지칭하며, 그 곳에서부터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으며, 본격적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소수의 무리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극히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하느님의 살아계신 아드님, 곧 결코 멸하지 않는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의 교회는 영원히 번성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23ㄱ)

주 하느님께서 심으시는 이 가지는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하느님을 향하여 무럭무럭 성장하여 수많은 가지들을 내고 많은 열매들을 맺어, 위풍당당한 향백나무로 우뚝 설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수많은 백성들을 일으키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지닌 분으로 온 세상, 모든 사람 앞에 높이 서실 것을 상징한다(필리2,6~11).

 

여기에서 '훌륭한'에 해당하는 '앗디르'(adir)는 단지 외모가 아름다운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몹시 존귀하고 풍채가 위풍당당하며 강력한 상태를 모두 아우르는 표현이다. 

이것은 부활 후 승천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가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라고 할수 있다.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3ㄴ) 

본문의 주어인 '온갖 새'에 해당하는 '콜 칩포르 콜 카나프'(kol tsipor kol kanap)는 문자적으로 '모든 날개가 있는 작은 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후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겨자씨 비유 통해 그것이 심겨져 자라 큰 나무를 이룬 후에 온갖 새가 와서 그 그늘에 깃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르4,3; 마태13,32).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 그 분이 이루신 구원 사업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으며 참된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쉼을 줄 수 있는 이 큰 나무는 작은 겨자씨 하나로 시작하고, 높은 가지에서 취한 연한 가지 하나로 시작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천한 출생,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던 그의 비참한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고 난 후, 예수님 자신과 그를 믿는 교회와 그의 복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그를 믿고 선택받은 믿는 이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게 된다(마태11,29).

 

이제 에제키엘서 17장 22절과 23절의 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세상의 모든 나라들, 모든 민족들은 주 하느님께서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시는 진정한 주권자이심을 분명히 보아 알게 될 것이 예언된다(24절).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연중 제11주일 복음(마르4,26~34)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6~27)

 

마르코 복음 4장 26~29절'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 말씀을 마르코 복음 4장 2~20절'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과 비교해 보면, 두 가지의 차이점이 있다.

 

첫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짐을 강조하고 있다면,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복음 또는 하느님 나라가 지니는 역동성과 은밀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나 하느님을 상징했지만,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 인간 자체, 특히 복음 전파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비유가 공통점도 있다. 본문에 나오는 '씨'마르코 복음 4장 3절의 '씨'말씀을 상징한다는 점이고, 두 비유가 모두 하느님 나라를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한편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마르코 복음에만 나오는 특수 자료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비유는 이미 소개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4,2~20)와 중복됨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강조점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심화,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강조점사람의 마음 또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하는 '밭'에 있다.

그래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과는 달리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따라서 좋은 땅, 곧 밭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그러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에서 이러한 밭의 중요성이나 심지어 농사짓는 농부의 중요성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씨앗이 발아하여 싹이 나고, 자라고, 이삭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 전 과정에서 오로지 강조되는 것이 '씨앗의 생명력'이다.

 

여기서 농부는 이러한 전 생장의 과정에 대해 전혀 무지한 자로 부각된다. 그리고 '저절로', '스스로' 익은 열매에 대해 추수의 은혜와 감격만을 누릴 뿐이다.

 

끝으로, 열매를 맺기 위한 중요한 변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사람의 마음 내지는 영혼의 상태'였다면, 반면에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씨앗 자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열매를 맺고 하느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서는 그 씨앗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이 계셔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마르코 복음 4장 27절에서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시간이 흘러가는 데 따라'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루가 아침에 시작해서 밤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질 무렵에 시작되어 다음 날 해질 무렵에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묘사하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창세1,5)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27절'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씀은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번역하면 좋다.

'알지'에 해당하는 '오이덴'(oiden; know)의 원형 '오이다'(oida)는 완료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알다', '감지하다'등의 의미를 가지며, 시제는 완료이나 알고 있는 시점은 현재이다.

 

부정어 '오크'(ouk; not)과 더불어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밭에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과정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씨를 직접 뿌린 농부가 알지 못하는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씨앗을 자라게 하는 생명력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또는 어떻게 발생하는지 지식적으로 알거나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답은 마르코 복음 4장 28절 전반절이 말하는 '저절로', '스스로'이다.

따라서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씨를 뿌리고 난 뒤에 그 씨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잘 자라기를 바라며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완성에 있어서 인간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따라 점진적으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씨 뿌리는 농부로 대표되는 인간은 하느님 나라를 자라게 하는 힘이나 그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식물이 끊임없이 자라난다는 것만큼 확실한 사실은 없으며, 또한 추수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농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완성에 대해 본질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그 기대와 확신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연중 제11주일

 

다른 이가 와서 쉴 수 있어야 한다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그제서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무엇을 하든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농부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봄에 씨를 뿌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꿀 때 비로소 건설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지역의 특산품이 복숭아인데 때가 되어 적과를 하고, 봉지를 싸고 소독을 하는 수고와 땀이 있어야 좋은 품질의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뿌린 씨가 잘 자라려면 씨 자체가 자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뿌려진 땅이 비옥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서 구체적으로 행하게 될 때 선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 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우리 주변의 공원에서, 성당에서 남모르게 주변의 잡초를 뽑는 분도 계시고, 꽃밭에 물을 뿌리는 분도 계십니다. 예쁜 꽃을 구해다 심는 분도 계시고 드러나지 않게 환자를 방문하고 어려운 가정을 돌보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한 정성과 사랑이 머지않아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겨자시가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 크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 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됩니다.”그렇다면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거나 심지도 않고 수확만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법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 투자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신앙생활, 편안한 방법으로 영적성장을 기대하거나 하느님을 체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안일한 신앙생활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우리의 헌신을 통해 더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32).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고 기쁨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겨자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겨자씨가 되어 주위에서 모든 것들,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야 합니다. 내가 자라지 않으면 내 주위의 누구도 그 품에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가장으로, 부모로, 자녀로서, 스승으로, 제자로, 각자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큰 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힘들고 지친사람들, 여러 이유로 외롭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평화로이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번 한 주간 내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그 씨앗이 아주 작다하더라 잘 가꾸어 그 말씀이 나를 점점 더 영적으로 성장 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나무되어 모든이의 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변에 다른 이가 와서 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큰 가지를 뻗을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마르4,26-34

예수님께서는 마르코복음 4장에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고 이제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먼저 요약해 보면,

1. 길에 떨어져 새가 먹어 버리는 경우- 새는 사탄을 상징, 또한 사람의 마음 속에 이리 저리 떠다니는 생각을 상징한다.  늘 수 많은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결국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내맡길 수 없게 된다.

 2. 돌밭에 떨어진 경우- 이는 깊이가 없이 쉽게 감동하는 사람을 의미, 이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단지 감정만으로 살고, 감정에 의해 이리저리 좌우된다. 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3.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 세상 걱정, 재물의 유혹, 욕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한편으론 하느님을 따르기를 원한다. 하지만 욕심이 더 강하다. 늘 가장 좋은 것, 가장 위대한 것, 가장 부유한 것을 차지 하려는 욕심에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런 목적 추구에 방해되지 않을 때만 좋은 것으로 인정될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위의 세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맡기면, 말씀이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삼십배, 육십 배, 백 배"(4,20)의 열매를 낼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 오늘 복음말씀을 들어야 한다. 겨자씨의 비유는 마태오, 루카복음에도 나오지만 이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마르코복음에만 나온다. 이는 희망에 가득 찬 낙천주의적 비유이다. 씨가 우리 안에서 자라도록 우리가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나서 자고 일어나는 인내로운 행동만으로 충분하다.(성령적 인내)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영혼이나 세상이란 밭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은 늘 하나의 신비이다. 땅은 "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 그리스어로는 "아우토마테automate"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동하시는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서도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 말씀의 씨가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상의 삶을 영위하면서 기다리는 일이다.(기본적인 생활에 충실한 것)


일하고, 잠자고,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일어나면서 기다리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내롭게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성령적 인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라 할 수 있는데 '다스린다'란 말은 원래 '다 살린다'는 뜻이다. 성령에 의해서 내가 인내하면 하느님의 활동이 더 커지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나를 살리는 것이 된다.


이 비유의 메시지는, 우리의 내적 성숙 과정에서 우리가 좀 더 조심해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이 메시지는  또한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확장 되는지 되지 않는지 그 여부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에서도 벗어나게 한다.


이와 비슷한 메시지는 겨자씨의 비유에 담겨 있는데, 이 비유에서도 자연의 자발적인 활동이 관건이다. 하느님의 활동은 종종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의 활동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큰 나무가 될 수 있다. 교회는 비록 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무리로 보일지라도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


이상의 비유들은 마르코 복음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다.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것에 바로 하느님 구원의 위대한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십자가의 무능에서 하느님께서 악마를 이겨내시는 당신 권능을 계시하신다. 살인자들의 증오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계시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이겨내신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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