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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일]예수님의 평화 (요한14,23ㄴ-29)

162 김종업 [rlawhddjq] 2019-05-25

 


 

 [부활 제6주일]예수님의 평화 (요한14,23ㄴ-29)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람들을 뽑아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편지를 보내며,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전한다. (사도 15,1-2.22-29)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22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요한 사도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본다. (묵시 21,10-14.22-23)
10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22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가며 당신 평화를 준다고 하신다. (요한14,23ㄴ-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6주일(생명주일)제1독서(사도15,1-2.22-29)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8-29)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

 

'결정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독센'(edoksen)은 사도행전 15장 22절과 25절에도 그대로 나오는 단어이다. 이것은 '좋게 여겼다'(it seemed good to the holy spirit and to us~)는  기본적인 뜻과 더불어 '결정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방인에게 할례가 불필요하다는 결정은 사도들과 원로들뿐만 아니라 성령까지도 뜻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본문에 나타나 있다.

 

특히 여기서 '성령'을 언급하는 것은 이 결정이 단순히 인간의 뜻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의 인도로 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지혜의 영이신 제3위 성령 하느님까지도 이방인에게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뜻을 나타냄으로써 사도들과 원로들이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원로들이 어떻게 성령의 뜻을 알았을까 하는 것사도행전 15장 6-21절까지 기록된 회의 진행 과정에서 성령께서 나타나  그 뜻을 밝혔다는 진술은 보이지 않지만, 사도행전 저자가 기록하지 않았을 뿐, 사도들과 원로들은 성령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느님께 진지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몇 가지 필수 사항'으로 번역된 '에파낭케스'(epanangkes)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 밖에 쓰이지 않는 단어로 '부득이','불가피한' 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이방인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기본적인 금기 사항(20절)을 불가피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쓰여진 단어이다.

 

이것은 이방인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유다인 출신 신자들과의 거리낌 없는 친교와 이방인들 주변에 있는 디아스포라(diaspora; 교포와 같은 의미로 흩어져 있는 유다인 공동체)를 복음으로 이끌어들이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치였다. 

그리고 네 가지 기본적인 금기 사항(20절)은 5월 2일 독서의 말씀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네 가지 필수 금기 사항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짐'으로 번역된 '바로스'(baros)는 원래 '무게'(weight)를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무거운 것' '짐'(burden) 또는 무거움 때문에 느끼는 '고통'(suffering)이라는 단어로 발전하였다.

 

우상의 제물, 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심적 부담과 고통이 되지 않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행하고 모세 율법 전체를 지켜야만 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요, 고통이라는 사실이 본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복음의 진수를 바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구원을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과 심적 부담을 주지 않으나 하느님 은총의 복음의 진수와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구원을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부담과 고통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다.

 

바오로는 갈라디아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가르쳐 주었지만(갈라5,1-4),  콜로새 교회에 이단을 퍼뜨렸던 어떤 자들은 사람이 감당치도 못할 금기 사항을 주장해 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것(콜로2,21)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삼간다'는 것은 이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번역된 '유 프락세테'(yu praksete)에서 '프락세테''행하다'(do)는 의미를 지닌 '프랏소'(prasso)의 미래 능동형으로서 '행할 것이다'라는 의미이고, '유'(yu)'잘'(well)이라는 의미이다.

 즉 '잘 행할 것이다' 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제반 신앙 생활을 잘 수행하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맺어나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예수님 믿기 전에 행해 오던 악습을 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 제6주일 복음 (요한14,23-29)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6)

 

요한 복음 14장 26절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의 역할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중요한 말씀이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에 해당하는 '판타'(panta; all things)가르치실 것이다.

 

'가르치시고'에 해당하는 '디닥세이'(didaksei; will teach)'디다스코'(didasko)의 미래 시제로서, 미래에 성령께서 계속해서 믿는 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실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가르치는 교사로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말씀해 주신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 우리를 언제든지 하느님의 완전한 뜻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1코린2,10).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인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많이 내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갈라5,22,23).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의 감화나 감동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일깨워 알게 하시는 것은 물론, 주의와 경고에 대해서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1테살5,19).

 

둘째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계속 기억시키신다.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에 해당되는 '휘폼네세이'(hypomnesei; will remind)'휘포밈네스코'(hypomimnesko)의 미래 시제로서 '계속해서 회상시키실 것이다', '계속해서 깨우치실 것이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이 땅에 남아 있어 구원의 길을 보여줄 것이며,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의 활동임을 보여 준다.

 

요한 복음사가가 여기서 특히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당시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지만, 성령 강림 이후에는 그 말씀의 의미를 밝히 깨달았음을 기억하여, 초대 교회 신도들도 성령의 역사(役事)에 힘입어 말씀의 의미를 밝히 알게 된다는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성령의 역할을 본받고 살아야> 
홍승모 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시는 당부와 약속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탁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실천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과 실천은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는 이 결속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 14,26)

 

세 번째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늘 함께 한다는 약속의 징표로 평화를 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우리의 문제는 주님을 깊이 신뢰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량으로 모든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내적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한 주님의 현존은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평화는 매일 일상생활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징표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신비에서 내면 평화를 체험합니다. 

이 내적 평화는 매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주님은 우리 내면에 평화를 불어 넣으시고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모든 공동체는 주님 평화와 현존을 체험하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사명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리토'는 보호자, 위로자, 협조자라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생에서 하느님의 올바른 길을 찾고 선택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조언하는 역할을 하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신앙 때문에 겪어야 할 어려움과 번민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를 지탱하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올바른 방향을 찾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끊이지 않는 성령 사랑의 불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이 주시는 은총에 안주해 그것만을 자신의 위안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부끄러운 평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외면한 채, 일시적 안정만 바라는 피상적 치료 구실밖에 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실천을 동시에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을 '파라클리토'라고 부르는 데는 단지 성령의 역할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우리가 본받고 살아야 한다는 사명이 내포돼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듯이, 우리는 또 다른 보호자(요한 14,16)가 돼 아픔과 상처, 수치와 분노, 죄책감 속에 살아가는 형제들에게 진정한 내면 평화를 주는 '파라클리토'의 사랑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2코린 1,3-4)

  

이런 사랑의 역할은 우리의 능동적인 선한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작은 노력을 갖고 사랑을 부어 줄 대상이 어디 있는지 시선을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돌려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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