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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윗자리 (루카14,1.7-14)

176 김종업 [rlawhddjq] 2019-08-31

 

2019년 9월 1일 주일

[연중 제22주일] 윗자리 (루카14,1.7-14)

 

집회서의 저자는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라며, 주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고 한다. (집회 3,17-18.20.28-29)
17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18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20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28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29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히브 12,18-19.22-24ㄱ)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19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3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24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연중 제22주일 제2독서 (히브리12,18-19.22-24ㄱ)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2)

 

옛 계약을 가졌던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대하여 품고 있었던

공포감에 대하여 기록한 히브리서 12장 18-21절과는 달리,

히브리서 12장 22-24절에서는 성도에게 부여된 새 계약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가지는 새로운 관계가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내용이 전환되는 구절의 시작인 본문 즉 '알라 프로셀렐뤼타테'

(alla prosellelithate)'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히브12,22) 이라는 뜻으로서,

히브리서 12장 18절의 '우 프로셀렐뤼타테'(u prosellelithate)와 첨예한 대조를 이룬다.

 

옛 계약(구약)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지상에 임재하신 하느님 대전에도 나아가지 못했고,

그 음성을 듣는 것도 두려워했으나(히브12,18), 새 계약(신약)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께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에 관해 말한다.

그는 지금 자신의 독자들 중에 영육간에 지친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

배교의 위험을 안고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미 목적지에 가까이 이르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탁월한

영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그 최후 승리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자신의 독자들이 마라톤 풀코스를 거의 다 달려와서

결승점이 보이는 트랙의 마지막 지점인 직선 코스에 접어들었다고 격려하면서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을 기술해 주고 있다.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다시 뒤로 돌아가거나 주저앉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과거 옛 계약(구약) 아래에 있던 백성들은 그렇게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가지 못했던 반면,

새 계약(신약)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하느님 대전에 너무나 손쉽게 나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유혹과 피곤함에 넘어져 뒤돌아서

돌아가 버린다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으로 번역된 '폴레이 테우 존토스'(pollei theu zontos)

지상의 시나이 산 그리고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하늘의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표현이다.

 

그곳은 계속해서 살아계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성(城)으로서,

바오로가 증거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갈라4,26) 및

사도 요한이 본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묵시21,2)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도성'에 해당하는 '폴레이'의 원형 '폴리스'(pollis)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리스의 자유 시민은 '폴리스'에 대해 개인의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고,

행정과 통치에 관여하였다.

'폴리스'아무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독립된 표현이었다.

 

그러나 구약의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이르'(yr)의 역어로 나타나며, 이 '이르'는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는 모든 요새화된 고지가 '이르'(yr)로 지칭되었다.

즉 이것은 외적이 침입하지 못하는 안전한 곳이라는 의미가 강조되는 단어이다.

 

그 가운데서도 구약 시대에 '이르'(yr)로 지칭되었던 예루살렘은 특별한 곳으로 언급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신 도성이요(2역대6,38),

하느님의 도성(시편46,5; 48,2), 대왕님의 도읍(시편48,3)이다.

그러나 이 찬란한 명성을 지닌 지상의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새 계약(신약) 아래에 있는 성도가 이른 곳은 그림자가 아닌 실체,

곧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그곳은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는 곳이요, 새 계약(신약) 아래에 있는

모든 성도는 하늘의 자랑스러운 시민이었다(필리3,20).

 

'무수한 천사들'로 번역된 '뮈리아신 앙겔론'(myriasin anggellon)

하늘의 도성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하느님 대전에 그분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수한'으로 번역된 '뮈리아신'(myriasin)의 원형 '뮈리아스'(myrias)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수(an innumerable multitude),

무제한적인 수(an unlimited number)을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그 숫자가 '수백만 수억만'이라 했으며, 그렇게 어마어마한

숫자의 천사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찬양하고 있다고 진술했다(묵시5,11,12).

그 많은 무리의 천사들이 날마다 찬양하는 광경을 통해

하늘 예루살렘의 축제의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다.

 

예언자 다니엘도 환시 가운데 천국을 보았는데, 그가 보니 하느님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모시고 선 이가 억만'(다니7,10)이라고 하였다.

이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이지만, 또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인 성도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도 한다(히브1,14).

 

 

 연중 제22주일 복음 (루카14,1.7-14)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13~14)

 

루카 복음 14장 13절에서 '장애인들''다리저는 이들'로 번역된 '아나페이루스'

(anapeirus; the crippled; the maimed)'콜루스'(cholus; the lame)

원래 둘 다 동일하게 '절름발이'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두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먼저 '아나페로스'(anaperos)는 신체의 일부분이 잘려 나갔거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불구자'를 가리킨다면, '콜루스'(cholus)는 신체의 일부분의

기능이 불완전한 것을 가리킨다.

 

한글 새 성경은 이러한 장애의 정도의 차이'장애인들'과

'다리저는 이들'번역하여 구분했다.

 

이들은 신체 장애로 말미암아 가난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대접을 받아도

아무 것도 갚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경제적인 무능력자들이었다.

 

오직 여기서만 나타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대접하라

명령은, 자비를 베풀 때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루카 복음서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여자와 어린이와 죄인 및

이방인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루카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복음 14장 14절의인들이 부활하는 시기는 직접적으로 '보답을 받을'

('갚음을 받을'; '안타포도테세타이'; antapodothesetai; will be recompensed;

will be repaid) 시기를 가리키며, 또한 '행복할'('마카리오스 에세'; makarios ese;

you will be blessed) 시기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시간적으로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부활 시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비록 이 비유가 잔치를 베푼 자에게 주는 비유이지만, 본문의 말씀은

성도들의 모든 삶에 있어서 그 초점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보답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답을 받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세에서 아무 것도 보답할 수 없는 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마치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마태6,20; 19,21).

 

그리고 여기서 '의인들''악인들'과 대조되는 개념인데, 종말의 날에

부활하여 하느님의 축복과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한번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 성체 조배를 마치고 나오며 비서 신부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고 합니다. 비서 신부는 이에 감동을 받아 더 열심히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그 어떤 선물보다 더 큰 감동을 줍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집회서의 저자는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큰 선물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할 수 있고, 겸손한 작은 행동 하나에도 크게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을 받으려면 모든 일을 온유한 마음으로 하고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행동으로 열 번 잘하더라도 한 번 화를 내면 그동안의 수고가 쓸모없게 됩니다.지위가 높으면서도 겸손하면 더 존경을 받습니다. 추기경이 비서 신부의 신발을 정리해 주었다고 하면 듣는 이도 추기경을 더 존경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하고 말합니다.사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도 사랑을 받습니다. 이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께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말도 됩니다. 사랑은 주는 만큼 받는 것이기에 온유하고 겸손하면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말하듯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이를 사랑하십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늘 끝자리에 앉으라고 충고하십니다. 그러면 이웃이 높아집니다.

이것이 선물입니다. 선물을 받은 이들은 언젠가는 보답하게 될 터인데, 그럴 때에 선물을 준 나는 저절로 받들어지고 높아지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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