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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3월 19일 (화)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신부님강론
대림 1주일 나해

201 양권식 [ysimeon] 2008-11-29

대림 1주일 나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대림 1주일로써 오늘부터 전례력으로는 새해가 시작됩니다. 교회 전례 상으로 볼 때 대림시기, 대림절은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대림절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의 4천년을 상징하는 시기입니다. 둘째, 대림절은 세말에 다시 오실 성자를 기다림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셋째, 대림절은 성자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한 회개와 보속, 속죄와 자선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대림이란 글자 그대로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가뭄에 농부는 하늘을 쳐다보며 애타게 비를 기다리고, 시장의 상인들은 꼭두새벽부터 손님을 기다립니다. 출ㆍ퇴근길의 사람들은 차를 기다리고, 수험생들은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귀한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은 자식이 군에서 무사히 제대할 날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우리네 삶은 기다림으로 시작되어 기다림으로 연속되는 생활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다림이 전혀 없다면 삶의 의미도, 보람도 없이 죽음을 향해 시간을 때우는, 존재 의미를 상실한 불쌍한 군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기다림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돈이나 권력으로, 사회적 지위나 명성으로 내로라하는 사람이 허무하게 자살해 버리거나,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맛보고 하루아침에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1456년 새남터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울리는 저 북소리는 명을 재촉하는데, 저 산 너머 해는 저무는구나. 저승에는 주막집도 없다는데, 오늘밤은 어디서 묵어갈꼬.” 하며 허무한 인생을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새남터 형장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은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반드시 천주교인이 되십시오.” 하며 기쁘게 주님께 생명을 봉헌하였다 합니다. 이는 같은 죽음의 형장에서도 희망을 지닌 사람과 지니지 못한 사람과의 극명한 차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다림 즉 희망보다 더 분명한 생명의 자취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노아 홍수 이야기의 종말적 표상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재림과 성탄을 준비라고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에서 제외된 사람들과, 같이 있던 두 사람 중 버려진 사람들이 결코 죄가 커서만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자체가 곧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먹고 마시고 장가드는 일상적인 일들에 얽매여 하느님의 현존을 망각하고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은 데에 그들이 버려진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망각하고 사는 것이 곧 버려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이 버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버림을 받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또 다시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고 재림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매년 거듭되는 대림이나 성탄이라 할지라도 같은 차원의 기다림과 준비가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한 차원 더하는 기다림과 준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이 천년 전 성자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미 온전히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실한 우리의 삶이 완전히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처지에서 구원이 아직 아닌 상태라 할지라도 우리의 준비가 한 차원 더해지는 날 우리의 구원 체험 역시 한 단계 더 해 갈 것입니다.

우리는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득한 여행 가방처럼 해야 할 일들을 당나귀처럼 하루 종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분주하게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의 마음은 공허하고 지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파악하거나 장악할 수 없는 신비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할 수 없는 삶의 자리가 있으며 이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속세의 일상사(日常事)나 세상의 부유함, 세속의 편리함에 있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셔야 할 빈자리를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을 생각지 않고는 온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과 성탄을 준비하는 일은 속세의 일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부유함과 세속의 편리함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께 궁극적인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해바라기가 땅에서 났으면서도 해를 바라보고 살 듯, 흙으로 빚어진 인간 역시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하느님 바라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더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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