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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연중 제06주일(다해-04)

167 전창문 [cmjun] 2004-02-15

연중 제06주일(다해-04)

                                                       2004. 02. 15.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또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1960년대와 70년대 매일 아침 6시나 7시만 되면 여지없이 회관이나 동네 확성기를 통해 울리던 새마을 노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 때에는 모처럼 아침에 늦잠을 자고 싶어도 짜증나도록 확성기를 통해 울렸던 각종 새마을 노래 때문에 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던 시대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36년이란 일제의 억압 속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 이어진 6,25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국토는 초토화되고 기간 산업은 황폐화되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3공화국 시절 무엇보다도 경제 제일주의 정책을 펼쳤고 돈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윤리와 도덕은 제2차, 3차였고 경제 제일주의 정책으로 인해 인권이니 자유니 평등 등과 같은 인간 존엄성이 무시되거나 말살되므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1인 독재가 합리화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독재와 억압과 탄압 속에서 윤리와 도덕, 정의가 묵살되는 철학 부재의 시절을 살아야 했고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남아 각종 부정과 부패와 부조리로 인해 우리 사회를 멍들고 썩고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대선 자금 청문회와 불법 선거 자금 조사 등으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요즘 사회 현실은 정경유착으로 윤리와 도덕이 무시됐던 독재 정권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정부 때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는 뜻으로 박정희 기념관을 국고로 지원하려고 했으나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반대하는 이유는 박정희는 정권욕에 어두워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인권을 무참히 짓밟은 독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극히 일부에서는 이만큼 살게 된 것은 박정희의 공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박정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물질이 인간 삶에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금전 만능주의자라면 박정희는 좋게 평가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정권욕에 어두워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한 독재자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인간 행복의 기준, 우리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만 하겠습니까? 신앙인은 하느님께 전적인 희망을 갖고 하느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삶의 최우선적인 가치와 목적을 하느님의 말씀에 두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이런 말씀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하심으로 현세의 삶이 전부라는 착각 속에 세속적인 탐욕에 빠져 있는 사람은 천벌을 받겠지만 하느님을 만날 것을 희망하기에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분명히 축복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또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심으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축복으로 주어지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미련하고 가련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우리의 사고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통념을 뒤바꾸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고 웃는 날이 꼭 올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은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아서 앞으로 굶주리고 슬퍼해야 하기에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부유한 것이 무슨 죄가 되고 가난이 무슨 축복이 되기에 예수님께서 부자는 불행하고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인간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부유한 것, 풍부한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 그 자체를 단죄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서를 보면 예수님과 사귀었던 사람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장사 지내 드린 요셉 같은 부자도 있었습니다.(마태 27,57-60) 그런데 왜 예수님은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나 우는 사람이 자신의 게으름이나 나태 때문이 아니라 부정과 불의와 부조리에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복음 정신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 결과라면 이런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이고 분명히 갚아 주시기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지금 부유한 사람, 배불리 먹는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복음 정신을 거역하면서까지 현세적 물질을 우상시 하고 탐욕에 빠져 하느님을 외면하거나 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누릴 복을 다 받았기에 분명히 불행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자들의 근원적인 위험 요소는 재물을 중히 여기는 물질주의, 돈이면 만사를 뜻대로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부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배금주의로 쉽게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는 인간에게 거짓된 안심과 안전감을 주고, 우리의 구원이 곧잘 부에 있다고 현혹합니다. 더 나아가 부나 물질은 인간의 마음을 교만으로 이끌어 하느님까지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런가 하면 물질이나 돈이 모든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보다 재물을 먼저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오류를 범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는 것은, 부자가 저지를 수 있는 이러한 모든 위험을 엄중하게 경고하시면서, 하느님을 유일한 구원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치관에 맞추면서 살아갈 것을 간절히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의 서열이 뒤바뀝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가치의 전도입니다(마태 20,16).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진의를 잘 알아들고 주님의 복음 정신에 따라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이었는지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분명히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물질에 지나친 애착으로 하느님을 등한시하여 죄를 짓는,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는 그런 미련함을 범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과 뜻을 먼저 생각하는 지혜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 미사를 통해 다짐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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