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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부활 제2주일(다해-04)

172 전창문 [cmjun] 2004-04-18

부활 제2주일(다해-04)

                                            2004. 04. 18.

 

   오늘은 부활 제2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축원해 주신 후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심과 아울러,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는 도마 사도에게 못박은 상처를 만져보고 의심 없이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마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신앙을 고백하자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하심으로 도마의 불신앙은 오히려 후세 사람들에게 더욱 주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계기가 된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철석같이 믿었던 스승께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잡혀 갖은 고초와 고문을 받고 허망하게 죽으시자 실망도 했고 스승을 잡아죽인 지도자들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들을 죽이지 않을까 걱정되어 최후 만찬을 가졌던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안에 떨고 숨어 있던 제자들 앞에 수난하고 죽으셨던 스승께서 나타나시자 그들은 너무나 당황하여 유령을 보는 줄 착각하고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이 때 주님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기쁨에 넘치는 축원의 인사를 하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이 너무도 기뻐합니다. 부활하신 스승께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인사를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상상해 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축원해 주신 말씀이 ’평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죄를 사할 수 있는 사죄권과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에 대해 묵상해 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축원의 말씀인 평화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평화(平和)란 무엇입니까? 국어 사전에 보면 ’화합하고 고요함. 평온하고 화목함. 또는 전쟁이 없이 세상이 잘 다스려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평화라고 하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말합니다. 히브리어로는 평화를 샬롬(Shalom)이라고 하는데 유태인들은 오늘날에도 이런 말로 인사를 나눕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샬롬의 뜻에는 사람이 원숙하고 안정된 상태에 있는 것, 인생에서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의식주의 걱정이 전혀 없는 가운데 가족이 모두 화목하고 단란한 사랑의 보금자리로 온갖 종류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어서 근심걱정이 전혀 없는 상태, 한마디로 말해 어떤 부족함이나 불만이 전혀 없는 상태가 이들이 사용하는 샬롬, 즉 평화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평화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평화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원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죄악이 왔고, 그 죄는 인간에게 이기적인 마음, 즉 자기 중심적 삶이 되어, 그런 평화는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첫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는 말씀이었고, 나타나실 때마다 "평안하냐?"하고 물으셨으며, 또 이미 전에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축원한 평화는 어떤 평화이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호의호식하고 근심걱정이나 어떤 부족함과 문제가 없는 상태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까?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것이 평화이기는 하지만 그런 평화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원하신 평화는 마음의 평화로, 이 마음의 평화는 어떤 인간적인 문제가 부딪쳐도 하느님이 함께 해 주시기에 두렵거나 무섭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문제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극복하는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성실히 준수하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한마디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만이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평화는 일종의 도피의 평화로 어떤 문제 자체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피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잠재우려는 그런 평화인데 이런 평화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질 때 얻을 수 있기에 불가능한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주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이겨내고 극복하고 해결함으로서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문제의 매듭을 덮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 정신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 주어지는 마음의 위로,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는 우리 삶에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십자가를 거부하는 이에게는 주님의 평화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평화를 저해하고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정의 사회의 구현입니다. 연일 충격을 주었던 각종 부정 부패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한 예로 아직도 정의 사회가 멀었음을 우리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정부패는 국민에게 고통과 불편과 불이익을 가중시킬 뿐아니라, 가진이와 못가진이의 격차를 더욱 벌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일치와 단결과 화합을 깨뜨리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 풍조를 조장함으로 우리 사회의 평화를 저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평화를 저해하는 죄악들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뜻에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 추방되고 평화가 함께 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평화가 이룩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신뢰 회복운동의 선봉자로 나서야 합니다. 과연 누가 앞장서서 할 수 있겠습니까? 위정자가 할 수 있습니까?, 국회의원이나 공직자, 또는 법률가나 사회의 일반적인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부정부패 척결에 선봉자로 자처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부정부패에 앞장서 왔기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정치나 경제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윤리 도덕의 보루인 종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신뢰와 사랑을 회복시켜 주님의 평화를 이룩해야 할 사명은 주님을 믿고 따르며 희망하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면서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파견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참 뜻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평화가 항상 함께 하도록 내 안에 복음 정신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함께 하는 사회가 되도록 불림 받고 파견 받은 사람임을 잊지 말고 내가 얻은 평화를 이웃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내가 먼저 복음 정신을 실천함으로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평화가 함께 하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평화를 위해 앞장서는 신앙인으로 살 수 있도록 다짐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도마야 너는 나르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신 말씀을 틈틈히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어 이웃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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