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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4년 4월 25일 (목)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부활 제6주일(다해-04)

173 전창문 [cmjun] 2004-05-17

                부활 제6주일(다해-04)

                                          2004. 05. 16.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오늘 주님이 들려주시는 복음의 주제는 평화로, 부활 제2주일에서도 묵상했지만 오늘은 다른 면에서 또 다시 한번 묵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마치시면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인 우리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심으로 "평화"를 주고 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심으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미술 대학의 교수가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졸업 시험으로 평화라는 주제를 주면서 여러분들의 생각이 담긴 그림을 그려 오라고 했습니다. 졸업생들이 자기 나름대로 평화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그림을 그려왔는데 많은 학생 가운데서 두 학생이 서로 특이하고 상반되는 그림을 그려 왔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상상해 보면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한 학생이 그린 그림은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으면서 녹음이 우거지고 각종 꽃이 피어있는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아래 초지가 조성된 들판이 있고 그 앞에는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들판에서는 소와 염소와 양 등, 가축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또 한쪽에서는 농부가 밭을 갈며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공중에는 각종 새들이 노래하며 날아다니고 바람하나 없는 고요한 저수지에는 강태공들이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모습으로 고기를 낚고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해 보아도 정말 평화로운 모습이라 느끼실 것입니다.

 

   또 다른 학생이 그린 그림은 비바람과 풍랑과 태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 암벽으로 된 절벽이 있고 절벽의 나무는 심한 폭풍으로 인해 곧 꺾어 질듯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파도는 항해하는 배와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암벽에 작은 굴이 있는데 그 곳에는 심한 풍랑과 폭풍 속에서도 둥지를 마련하고 새끼들과 한가로이 잠을 자고 있는 갈매기 가족이 있는 그림입니다. 이 학생의 그림은 평화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이나 불안 또는 전쟁에 가까운 그림입니다.

 

   그렇지만 교수는 후자 학생이 그린 그림에 최고의 점수를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자의 학생이 그린 그림은 분명 평화스런 모습의 그림이지만 그런 평화는 우리가 염원하는 이상이지 이 세상에서 그런 평화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자가 그린 그림은 심한 풍랑과 태풍이 몰아치는 바닷가 암벽 절벽에서 둥지를 틀고 한가로이 잠을 자고 있는 갈매기 가족의 모습은 고통과 어려움과 십자가의 삶이 우리의 인생살이이지만 그런 삶 속에서도 자기가 만들고 지켜 나가면 평화는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점수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고 지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 모든 환경이나 이웃들은 때로는 나의 평화를 방해하는 훼방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온갖 고통과 좌절과 불행을 주는 요소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내가 어떤 마음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는 평화를 얻을 수도 있고 평화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추구할 때만 가능합니다. 흔히 평화 하면 즉시 생각하는 것이 전쟁이나 분쟁, 근심걱정, 고통이 없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부족함이 없는 그런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무릉 도원이나 지상 낙원 같은 세상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런 평화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이 폭력과 분열을 일으키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으로 평화를 저해하기 때문에 그런 평화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 이미 상실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에 평화가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란 인간이 근원을 찾아 본래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 머물러야 할 근원은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때만이 참다운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아오스딩 성인은 "인간은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는 잠시도 평안한 날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머물지 않고 다른 곳에 머무는 한 인간에게 평화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여 어두운 마음을 갖는 삶에서는 평화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만 갖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명하는 삶의 규범을 벗어날 때 우리의 삶은 불행해 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운전자가 도로 교통법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운전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할 것입니다. 또 물고기가 물을 떠날 때 어떤 불행이 닥칠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 사람이건 생물이건 간에 자연의 이치는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물지 않으면 불안하고 두려워하거나 혹은 병이 들어 죽음을 초래하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마음속에 딴 여자, 딴 남자가 있다면 그 가정은 결코 평화롭지 못합니다. 남편의 마음속에 아내가 있고, 아내의 마음속에 남편이 있을 때 그 가정은 평화롭습니다. 가족이 위치와 신분에 맞게 서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려고 할 때 그 가정은 그만큼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창조 본 모습으로 되돌아 갈 때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창조 본 목적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므로 죄악과 불행의 원인이 되고 다툼과 분열로 세상의 평화를 깨트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풍랑과 태풍이 몰아치는 바닷가 암벽에 둥지를 틀고 한가로이 잠을 자고 있는 갈매기 그림을 그린 학생의 생각처럼 세상의 근심 걱정, 고통과 좌절, 불행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약속하고 주시겠다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어떤 평화를 추구하고 노력하고 있는지 묵상하고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주는 흔히 사람들이 생ㄱ가하고 염원하는 평화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까? 다시 말해 현실적이고 본능적인 자기 중심적 삶에서 찾으려는 평화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창조 본래 모습인 사랑의 정신으로 사는 삶에서 찾는 평화입니까? 인간은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만이 본래 인간이 지니고 있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며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일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면 평화를 잃고 불안과 비참함과 죄악만이 따를 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주시겠다는 평화를 갈망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하느님의 복음과 계명을 잘 지키는 삶이 되도록 결심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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