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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4년 4월 25일 (목)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자유게시판
영찬씨,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주시기를--

874 김성훈 [ksh77] 2004-11-16

영찬씨,

 

영찬씨에게 여러 차례 글을 쓰게 되니 시간 낭비라 생각되오만
전혀 생각과 시각이 달라질 줄 모르는

님에 대한 안타까움에 다시 글을 쓰오.

 

님이 '명색이 교회를 위한 대립(?)' 이라고 하는 말에 놀랐소.

영찬씨의 글과 그곳에 흐르는 생각을 찬찬히 다시 흩어보시오.

'교회를 위한' 이라고 한 말이 무색함을 느끼지 못하시오?

 

사람인지라 본당의 사목 방향에 나름대로의 반대와 생각은 있겠지요.

하지만

'교회'를 언급한 영찬씨의 생각은 전혀 교회적이지 않다고 느껴지오.

 

교회라면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아닌가요?

교회도 세상 사회 조직의 하나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과 엄연히 구별되는 것은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고

'하느님을 믿음으로 모인 백성들의 공동체'이고
우리는 성령께서 계시는 거룩한 성전임을 믿고 고백하고 있소.

 

나도 영찬씨도 하느님의 거룩한 지성소이지요.

 

이런 글을 쓰면 어리석은 분들은 신부님이 아니냐고 하는군요,

 

그분들 보다도 더 어리석은 내가

교회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을 사랑할 수 있도록,

신부님께서는 그 길로 이끌어 주셨고 깨우쳐 주셨다오.

처음에는 부담도 있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도 있었지만,

말씀하시는 사제가 보여주신

사제로서의 그분의 삶은 가난과 겸손이었소.

 

자신을 위해서는 제대로 쉴 줄도, 즐길 줄도,

누릴 줄도 모르시면서,

우리 신자들을 위해서라면,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을 깨닫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 나라의 정신을 깨우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오해도 감수하며 오직

사제적 양심에 따라 살고자 몸부림치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소.

그 신부님에게 '자신의 명예를 위해 헌신'하는 분이라고 하였소?

 

신부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는 모르시지만,

오직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 나라의 명예를 위해

헌신하고 계신 것은 사실이라 생각하오.

 

사제가 남들보다 더 고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명예요?

 

욕을 먹고 손각락질 당하는 것도 명예요?

 

반대하는 이들, 시기하고 질투하고 핍박받고

괴롭힘 당하는 것도 명예요?

 

영찬씨,

그것이 신부님께서 받으신 명예라면 그것이 명예가 맞을 것이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의 정신에 대하여 깨우쳐 주시고자 그토록 애쓰셨으나,

결국 자신이 은혜를 베풀고 그토록

극진히 사랑하셨던 이들에게 모함과 배반을 당하셨지요.

예수님께서 몰라서 그 길을 가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쉽고 편한 길, 절충하며 돌아가는 길도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때가 아니니 지금은 좀 가만히 계시라는

주변 사람들의 충고도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대사제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기득권을 가진 이, 부유한 사람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유지하면서도 충분히

하느님 나라는 선포될 수 있다고 예수님께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하고 믿고 따르는 예수께서는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분은 타협하고 돌아가시는 길을 걷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더욱 단호하셨고 조금치의 타협도 없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세워지기 위해서라면

단 한치의 양보나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머리 둘 곳 조차 없다'고 하신 가난한 삶을 사셨지만

 

자신이 무언가 좀 알고 있다고 지혜로운 척 하는 이,

세상의 재물이 좀 있다고, 학식이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며

가지지 못한 이, 못 배운 이를 우습게 보는 이,

속으로 딴 생각을 하면서도 당신을 은근히 떠보는 이들의

속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지요.

 

아마 예수님께서 그들과 타협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죽음과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은

결국 인간을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부터 해방시키셨소.

 

예수님의 사도들도 하느님 나라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자신들이 모욕을 당하고

핍박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오.

 

형편없어 보이고 세상 물정 모르고, 답답하기만 하게 보였던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도들의 삶이

우리가, 사제가 따르겠다고 고백한

바로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니오?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길에 대하여 말하였소.

 

그 예수님께서 내게, 우리에게,

지금 현재에 보내주신 사제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그 말씀의 메시지를 마음과 생각을 열어 듣고자 하였소.

 

어찌 사제에게 인간적인 한계와 약한 부분이 없으시겠소?

그러나 사제의 부족함을 말하기 전에,

그것을 알아 본 우리가 바로 그 것을 메워드리고 협력하며,

함께 주님을 나라를 이루어 가라고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임을 또한 깨달았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오래 참으시고,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먼지만큼이라도 알아보았기 때문이오.

 

영찬씨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보고 있소?

영찬씨의 생각과 우려를 사제나 본당의 지도자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는 어리석은 분으로 느껴지시오?

아마 님보다 더 깊은 고민과 주님께 기도하며

사랑과 일치와 순명의 정신을 갖고 한 마음으로

어려운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며

고난과 축복을 함께 나누고 계실 것이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도의

우리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오.

 

진정으로 영찬씨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분이라면 그토록,

비난과 비판으로 일관하며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본당 신자들의 가슴을 아프고 불안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오.

 

영찬씨의 생각이나 태도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알고 따르는 분의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요.


영찬씨의 나름대로의 반문과 생각에 그동안 충분히 글을 올렸기에

더 이상 일일이 이의를 달지는 않겠소.

영찬씨가  맹신으로 보던, 무가치한 사목으로 느끼던,

사제께서 모욕을 자초한 것으로 느끼던 그대의 자유이오.

 

그러한 생각과 비판이 '교회를 위한 대립'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님의 자유이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영찬씨의 영혼을 아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이오만,

 

영찬씨의 생각과 그 태도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보여주신 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먼 길을 가는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리오.

 

진정으로 영찬씨가 주 예수님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사제에게 '뒷감당하는 우리들에게 정말 욕먹습니다. 유념하시오'

하는 교만한 마음을 거두시오.

 

그리고

사제와 신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과 교회가 이루시는

진리와 축복의 길을 님이 가로막으며

비난하고 걸림돌을 놓고 십자가를 지게 한다하여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함께 걷도록 이끄시는 그 길에서

우리가 머뭇거리거나 돌아서기를 원하지 않으실 것이오.

 

영찬씨, 예수님의 말씀에 진정 귀를 기울여 주시오.

 

오늘도

영찬씨를 오래 참으며 영찬씨를 믿고 기다리면서 주님께 기도하는

사제와 우리 본당 신자들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평화와 위로와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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