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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7일 (토)부활 제4주간 토요일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토론실
샴 쌍동이

4 장재용 [jaeyjang] 2000-11-24

출처 : http://webzine.lycos.co.kr/general.htm?Regdate=2000-11-22+17%3A20%3A09

 

이자연 achim@chosun.com

 

윌리엄 스타이론(Willian Styron) 원작, 앨런 파쿨라(Alan J. Pakula) 감독의 영화 [소피의 선택]을 보셨습니까? 20년 전에 만들어진 옛날 작품이지만, 그 영화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은 아직도 깊은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나치점령시절 유태인 수용소에 수용된 폴란드 여인 소피는 어린 두 남매 가운데 한 아이를 가스실로 보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결국 딸 에바를 포기하고 아들 얀을 선택한 소피는 평생을 후회와 괴로움 속에 보내지요. 스스로 자녀의 죽음을 선택한 어머니의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절절하게 연기한 메릴 스트립은 82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새삼 이 영화를 떠올린 것은 ‘인간의 선택’과 ‘모정(母情)’이라는 화두 때문입니다. 최근 영국의 샴쌍둥이 소식을 접하면서 저는 줄곧 이 영화가 연상됐습니다. 몸의 일부가 붙은 채 태어나는 쌍둥이를 일컫는 샴(siamese)쌍둥이는 이미 여러 번 뉴스에 등장한 소재지요. 샴(Siam)이란 본래 태국의 옛 이름으로, 몸이 붙은 쌍둥이가 처음 발견된 것이 태국에서였던 데서 샴쌍둥이라는 말이 유래됐습니다. 최근 문제가 되어온 영국 의 메리-조디 자매도 바로 그런 샴 쌍둥이입니다.

 

지난 8월 영국 맨체스터의 성 메리 병원에서 태어난 메리와 조디는 팔다리는 따로따로지만 복부는 하나로 붙어 있었습니다. 조디는 상대적으로 건강한 반면, 심장과 폐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메리는 조디의 몸에 의존해 기생하고 있었습니다. 즉 조디의 심장과 폐가 대동맥을 통해 연결된 메리의 피에 산소를 공급해주고 있었던 것이죠.

 

의사들은 이대로 두면 조디의 몸이 이중부담을 견디지 못해 둘다 사망할 확률이 80%라며 분리수술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경우 분리수술이란 조디의 부담을 덜어주는 반면 메리의 생명줄을 끊는 셈입니다. 즉, 그냥 두면 둘다 죽을 가능성이 크지만 분리수술을 하면 조디의 생명은 건질 가능성이 있으니, 메리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최소한 조디는 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지요.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쌍둥이의 부모는 수술을 반대했습니다. “나에게는 한 아이를 살리자고 다른 아이를 죽게 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였죠. 이 부모는 “하나님이 주신대로 키우겠다”며 “둘다 죽는다해도 그것은 신의 뜻”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가톨릭계에서도 “의사들이 살아있는 생명을 꺼뜨릴 권리는 없다”며 부모 쪽을 지지했지요.

 

이들의 대립은 결국 법정으로까지 번져 영국법원이 분리수술을 허락하는 판결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재판부의 앨런 워드 판사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살아남을 확률이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한 결단이었다”고 토로했지요.

 

한 아이의 생명을 희생한 분리 수술

 

그러나 이 판결은 가톨릭 교도 및 생명존중 단체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면서 영국 전역에 격렬한 윤리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수술에 반대해온 머피 오코너 로만가톨릭교 대주교는 “다른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판례가 영국에 남을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에르질리오 토니 추기경은 “무료 의료서비스를 무한대로 제공하겠다”며 부모에게 ‘피난’올 것을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의사들은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들의 분쟁과 상관없이, 지난 7일 20시간에 걸친 분리수술을 받은 조디는 현재 회복단계에 있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조디가 완전히 위험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안정된 상태를 보이고 있으며 꾸준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쌍둥이 메리는 결국 숨졌습니다. 사실상 이들 쌍둥이는 메리가 죽음으로써만 조디가 살아날 수 있었던 ‘야속한 운명’이었으니까요. 지금 상황에서는 살아남은 조디가 그저 건강히 자라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요.

 

제가 궁금한 건 이들의 부모입니다. 쌍둥이의 부모가 수술을 반대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였죠. 최근 우리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부모가 수혈을 반대해 자녀를 죽게한 것처럼요. 우리는 그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조디와 메리 쌍둥이의 부모도 “한 명은 살릴 수 있는데 부모의 독단때문에 둘다 죽게 생겼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외신도 대부분 이 부모에 대해 다소 비난 섞인 어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득 ‘소피의 선택’이 떠올랐습니다. ‘둘다 죽는 것’과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사는 것’. 제3자가 보면 ‘-2’보다는 ‘-1’을 고르는 것이 당연한, 어려울 것 없는 선택이겠지만 부모 입장에서야 어디 그렇게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까. 플러스 마이너스를 떠나서, 어느 쪽을 택하든 결국 ‘다른 한쪽의 죽음을 선택한’ 꼴이 되는 이번 경우는 부모에게 가혹한 형벌’일 겁니다. 종교적인 이유라고는 하지만, 죽어가는 자식의 수혈을 거부한 케이스와는 차이가 있지요.

 

“의무가 길을 인도하여 주지 않는 자유란 무서운 것”

 

인간에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자유인 반면, 때로는 엄청난 짐이 되기도 합니다. 쌍둥이의 부모가 괴로워서 선택 자체를 거부했는지, 순전히 교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녀에 대한 사랑을 저울질한 기억은 인간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겁니다. 영화 속에서 평생을 죄책감 속에 보낸 소피가 마지막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도 아주 과장된 결론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국의 대문호 J 밀턴은 “신이 아담에게 이성을 주었을 때, 신은 선택의 자유를 준 것이다”라고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썼습니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선택에 대해 “의무가 길을 인도하여 주지 않는 자유란 무서운 것”이라고 술회했지요. 나치 통치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선택의 고통은 인간의 현실 어디에나 상존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인간의 선택은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고, 소피의 선택은 곧 우리 자신의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곧 선택한다는 것. 그래서 인생은 늘 후회를 남기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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