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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교회는 누구인가?

25 정탁 [daegun011] 2001-11-13

 아래 내용은 - 마산교구 구암성당 이제민신부님의 "교회는 누구인가?"의 에필로그의 전문을 요약없이 모두 올립니다.

 

 ◈ 교회는 누구인가 ?

 

1998년 여름 광주 가톨릭대학교에서 이곳 마산 구암동 성당으로 불림을 받았을 때 나는 지금까지 내가 글로 주장해 온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며 소명을 감하게 받아들였다.  본당에 부임한 나는 교회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성직자 중심적일 수 없으며, "우리 모두가 교회"임을 강조하였다.

 

신자들도 처음에는 나의 생각에 동감하며 호응하는 듯하였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를 인식하기에는 우리 교회가 너무 긴 성직자 중심의 역사에 이끌려왔음을 실감해야 했던 것이다. 모임의 활성화는 오로지 성직자의 관심도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본당에서 사제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모든 모임에 본당신부는 한번쯤 얼굴을 내비쳐야 했다.

 

레지오등 본래 평신도 운동으로 일어난 신심단체도 스스로를 성직자에 종속시키고 있었다. 이렇듯 교회는 성직자 중심적이고 성직자의 권위주의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직까지 우리 교회의 현실이다.

 

본당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당 회장의 임기가 완료되었다. 나는 교구의 본당 사목협의회 회칙 준칙에 따라 본당의 모든 신심단체장까지 출석한 총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여 회장단과 사목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 후 모든 사목위원은 1박2일 동안 피정의 집에 모여 다음해 예산을 짜며 밤이 늦도록 진지하게 회의를 하였다.

 

잠시 쉬는 시간, 내가 그 자리에 있는 줄을 모르고 한 형제가 "이번 신부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긴다고 하지만 다음 신부가 오면 또 다른 사목방침을 내어놓을 것이고,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도 말짱 헛일이다. 우리 평신도는 본당신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하자"면서 그런 모임을 내 개인의 사목방침 정도로 여기는 것이었다. 성직자 중심과 권위주의의 교회를 벗어나야 한다는 나의 주장을 신자들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또 다른 성직자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주의와 성직자 중심주의의 이러한 양상은, 성직자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역설적이게 평신도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본당생활을 통하여 실감한다. 평신도의 사명은 사제의 삶을 즐겁게 해주는 데 있지 않다.  사목협의회는 본당신부의 비위를 맞추는 기관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사제들을 사제의 품위에 올려놓았으니 그들이 자신들의 가난과 순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평신도는 도와주어야 한다.

 

성직자 중심의 틀을 벗어나는 데 있어서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나는 지도신부제-지도수녀제-를 들고 싶다. 특별히 할 일이 없음에도 각 단체는 지도신부를 두어야한다. 이 제도에 다르면 평신도는 성직사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는 교회 안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모두를 성직자의 통치 아래 두겠다는 발상이 아니겠는가?) 지도신부제가 사라지는 날 교회는 자기가 하느님 백성임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느님 백성을 모은 예수의 복음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사제는 지도신부로서가 아니라 협조신부로서 하느님 백성에 봉사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교회의 쇄신은 결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직자 중심과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인식하고 실현시키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이 과제는 교회가 자신을 인격체로 받아들일 때,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누구로 이해할 때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교회가 단순히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함께 우리 신앙의 행위를 민주주의식으로 결정하는 공동체임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라면 교회는 다수결로 회장을 선출하는 여느 단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교회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할 수 있지만, 하느님에 대한 우리 신앙과 인류에 대한 우리의 사랑까지를 민주주의 다수결에 맡길 수는 없다.

 

"우리가 교회다"라는 말에서 "우리"에는 민주주의식 의결권을 가진 "우리"를 넘어 성직자든 평신도든, 죄인이든 성인이든, 미운 사람이든 고운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종이든 주인이든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백성의 일원임이 강조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성직자든 평신도든, 죄인이든 성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구별 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백성이다. 아니, 교회는 바로 하느님 백성의 자체이다. 이 교회 안에서 우리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내 사랑의 주체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I요한4,10)이 하느님의 백성을 불러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회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인류에게 이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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