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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서 신부 "장애요?…하느님이 부르신 거죠"

11398 수유1동성당 [suyu1] 2017-04-02

亞 최초 청각언어장애 사제 박민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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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명 정도가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작고 허름한 성당. 이곳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TV 모니터만한 주판 모양 묵주와 커다란 북이 걸려 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농아선교회 성당 모습이다. 청각언어장애인들은 수화로 묵주기도를 하기 때문에 손에 묵주를 들고 있기 힘들다.
그래서 이곳에는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커다란 묵주가 제대(祭臺) 옆에 있다. 또 청각장애인들은 미사 중 종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래서 북을 친다. 북의 진동은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성당을 지키고 있는 박민서 베네딕트 신부(49)는 아시아 최초의 농아사제다. 이현주 농아선교회 사무장의 수화통역으로 청각장애성당 건립을 준비하고 있는 박 신부를 인터뷰했다.

"두 살 때 약을 잘못 먹고 청각을 잃었습니다.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하느님이 저를 이런 방식으로 부르신 거라 생각합니다. '왜 나를 농아로 만드셨냐'는 질문에 지금 제 모습으로 대답을 하신 거죠."

부모님은 그가 운보 김기창 같은 훌륭한 청각장애 작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박 신부는 고교 시절 미술학원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그림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농아셨는데 그분을 통해 처음 가톨릭을 알았고,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청각장애인이 사제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박 신부는 일반 대학에 들어가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그때 그가 찾아간 사람이 정순오 신부(현 한강성당 주임사제)였다. 부모님이 모두 청각장애인으로 수화에 능통했던 정 신부는 그에게 미국 유학을 주선했다. 26세가 되던 해 그는 워싱턴DC 갤러데트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너무 괴롭고 힘들었죠. 영어도 힘든데 영어 수화까지 배워야 했으니까요. 한국어와 영어는 수화도 완전히 다르거든요. 정말 하느님이 나를 원하시는지 수없이 되물었어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성요셉 신학교에서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시련은 또 닥쳤다. "청각장애 학생을 위한 보조 프로그램을 운영하시던 오코너 추기경이 선종하시면서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진 거죠.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일반 학생과 똑같은 속도로 수업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포기할 뻔했는데 같은 장애를 지니고 계신 콜린 신부님 도움으로 학교를 성요한 신학교로 옮겨 석사를 마칠 수 있었죠."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그는 서울가톨릭대에 편입해 2년6개월을 더 공부한 뒤 2007년 사제 수품을 받는다. 유학을 떠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제가 장애를 갖게 됐다며 평생 괴로워하시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가장 많이 났죠. 두 분의 사랑과 눈물이 저를 사제로 만들었고 저는 이제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을 하고 있는 거죠."

그가 사제가 되어 처음 제대 앞에 섰을 때 전국 각지에서 500여 명의 청각장애인이 그를 찾아왔다. 수화로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가 나왔다는 건 그들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일이었다. "농아분들과의 미사는 일반 미사보다 2배 정도 시간이 걸려요. 말보다 수화가 느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 속에서 단절되어 있는 분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미사는 유일한 소통의 시간이기도 하거든요.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노력해요." 지금 미사를 드리고 있는 수유동 건물은 조건이 좋지 않다. 극장식이 아니어서 수화 미사에는 적합하지 않다. 농아신자들은 신부의 손모양을 보고 미사를 드리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성동구 마장동 인근에 터를 마련했어요. 올해 안에 청각장애인 성당 건립 작업이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신부는 특별히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을 흠모한다.
18세기 성인 비안네 신부는 박 신부처럼 사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시련을 거쳤다. 퇴학, 나폴레옹 군대 징집, 질병 등을 겪으며 끝내 사제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비안네 신부는 존재 자체로 큰 가르침이다. "마음속 고통을 이기려면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해요. 세상에 편안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어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처럼 고통을 받아들일 때 그 고통을 이겨낼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박 신부의 취미는 서예다. 차분하게 앉아 서예로 하느님의 말씀을 적는 걸 좋아한다. "유일한 농아 신부이다 보니 찾아주시는 분이 많고 바쁘게 지낼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 보니 기도하고 반성하는 영적 생활을 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게 가장 아쉬워요.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가장 생각나는 게 서예예요."

[허연 문화전문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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