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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부님강론
구정 설 합동 위령 미사

71 안충석 [anchs] 2006-01-28

구정 설 합동 위령 미사

(연 중 제 4 주 일)

2006. 1. 29.


  찬미예수님!

  구정 설 새해 은총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복음 성서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비유하신 장면입니다. “우리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처럼 항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즉시 열어 주려고 항상 대기하며 준비하고 있는 종은 주인에게 칭찬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비유로 말씀하신 문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 같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비유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하느님 안에서 늘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는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구정 설을 지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설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세상 삶은 하느님 나라의 고향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하여 늘 깨어 기다리고 있다가 주님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 바로 열어주는 깨여 기다리는 준비된 행복한 종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 여정을 함께 하던 오늘 설 합동위령미사 지향하는 사랑하는 연령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끝까지 함께 가는 파스카 미사를 지금 우리는 봉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준비를 잘하여 하느님 나라 목적지까지 깨어 기다리며 함께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우리 함께 묵상 하십시다.

 언젠가 죽음이 세상이 시작되는 강가에 도착 했습니다. 그곳에는 하얀 거위 떼를 보살피는 가난한 목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벌의 웃옷과 바지, 한 켤레의 겨울 신발과 모자 그리고 그가 즐겨 부는 피리가, 가진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피리는 언제나 그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죽음이 그에게 다가와서 “내가 누구인지 너는 알고 있니?”하고 묻자 목동은 “네가 죽음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난 강 너머 다른 편에서 가끔 너를 보았었지.” 그러자 죽음은 “내가 너를 강 건너 저편으로 데려가기 위해 여기 왔다는 것도 네가 알고 있느냐?” 하고 죽음이 목동에게 묻자 “아니, 내가 여기 있은 후로 난 언제나 강 너머로 너를 지켜보았기에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어” 하고 말했습니다. 이제 죽음이 목동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그럼 이제 갈까?” 하고 말하자 목동은 일어나서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조용히 그를 따라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강 건너 저 편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강둑 저편을 건너볼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며 그곳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목동이 불었던 피리의 음률은 그곳에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내적으로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가까운 이웃사촌 같이 이처럼 죽음과 삶이 강하나 문하나 사이를 두고 함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르단 강 건너가 만나리’ 라는 성가 가사같이 문하나 열면 산 이와 죽은 이가 함께 하느님 나라 혼인 잔치 영원한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행복을 위하여 동화속에 목동 같이 항상 영원한 망향의 그리움 노스탈자로 기도하며 깨어 준비하는 것만이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이 세상 나그네 삶의 여정 파스카 이 미사성제 같이 봉헌하며 완성하는 것입니다.

        나뭇잎 세월의 바람이 부는 데로 가네.

        잔잔한 바람! 살며시 불어다오.

        언젠가는 떠나리라.

        언제나 주님을 그리는가 보다

        영원한 고향을 찾고 있는 사람들

        언젠가 만나리라.

  순례자의 노래 망향 성가처럼 말입니다.

  죽음이 우리 곁에 다가오면 외적인 것보다는 우리 내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 성서는 사랑만이 유일하게 남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화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연주하던 사랑의 음률만이 남아 있습니다. 바람은 그 음률을 내가 있었던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실어 보내 줍니다. 우리가 강 건너편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바람이 실어다 준 사랑의 음률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률은 우리에게 강 건너의 세계가 낯설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이런 실례를 들어 보십시다.

  왕과 목동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들판에서 한 목동을 만났습니다.

  “너는 이 양을 쳐서 얼마나 이익을 보느냐?” 하고 왕이 물었습니다.

  “폐하, 저는 폐하와 꼭 같은 이익을 봅니다.” 목동의 대답에 왕은 이상스런 얼굴로 다시 물었습니다.

  “나와 꼭 같은 이익을 본다고? 그건 또 어찌해서?” 그러자 목동이 대답했습니다.

  “폐하, 저는 양을 쳐서 천국이나 또는 지옥을 얻습니다. 폐하께서 나라를 다스리지마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얻으실 수는 없습니다.”

  왕은 끄덕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어 목동과 헤어졌습니다. 이 목동의 말은 진리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운명은 천국이나 지옥,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왕같이 살았던지 아니면 떠돌아 목동같이 살았던지 간에 이 세상 어떤 사람이든지 그 운명은 천국이나 연옥 지옥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 누가 우리를 이 타는 지옥 연옥에서 구하여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서 잠시 그 어떤 인연으로라도 사랑의 인연에 매달려 구해달라고 간청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이런 경우 같이 말입니다.

  수십 년 전 대단히 무서운 중죄가 신문에 게재되었었습니다. 즉 한 청년이 타락하여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자기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더러운 못에 처넣어진 모친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자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다른 자는 그녀가 못 언덕으로 기어오르려고 하면 발로 차 넣고 있었으나, 아들은 잔인하긴 했으나, 아기 때 자기를 안아 준 어머니의 쳐든 두 손을 보고 인정을 일으켜 두 팔을 뻗어서 어머니를 구했던 것입니다.

  이 무서운 사실은 연옥불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영혼의 상태를 긴 이론보다 더 잘 말해 줍니다. 우리의 과오로 우리 부모, 형제, 벗들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구하는 데 무심하거나 냉정하다면 이 타락한 아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호랑이나 사자 따위도 제 새끼를 구하기 위해서는 불속에라도 뛰어드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요,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목숨을 내걸 것까지도 없이, 다만 약간의 선업으로 불속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 있는데도 그걸 게을리 합니다. 이는 현세에서도 때때로 벌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보답을 제대로 못했다고 하면서 연령들에게 보답하며 기워 갚지 않는다면 그 복속을 연옥에서 머리털 한 오라기도 다 갚지 않으면 거기서 나올 수가 없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신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에게 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절벽에 묶어 벌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들에게도 직접 벌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들로부터 온갖 선물을 받고 태어난 최초의 여인 판도라(Pandora)가 태어났습니다.

  헤파이스토스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참을성을, 아테나 여신은 방직기술을 가르쳐 주었고, 아프로디테는 매력과 교태를, 가슴에는 격렬한 욕망과 몸을 나른하게 하는 생각을 주었습니다. 헤르메스는 염치없음과 교활한 성격과 거짓말을 판도라에게 주었습니다.

  판도라는 하늘에서 내려올 때, 신들로부터 상자 하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상자에는 인류의 모든 재앙이 들어 있었는데 유일한 선은 ‘희망’ 뿐이었습니다.

  절대 그 상자를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긴 했지만, 호기심에 못이긴 판도라는 그 상자를 열어보았고 그 안에서 온갖 불행과 재앙이 퍼져 나와 인간세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깜짝 놀라 뚜껑을 얼른 닫았지만 이미 그 안에는 다른 것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희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온갖 불행과 어려움 속에 절망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간직하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살아 있는 한, 숨 쉬는 한 아직까지도 열릴 수 있는 희망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구정 설을 맞아 우리가 제사로서 봉헌하는 설 합동 위령미사에 지향하는 연령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의 판도라 상자를 열 수 있는 것은 연령들 자신들은 할 수 없고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 기도로써 열어주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사는 희망은 열리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희망을 모두 잊어라는 지옥과 달리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 일각이 여삼추라고 당신 앞에 천년이 하루 같다는 시편 기도같이 비록 하루라도 천년만년 같은 연옥 단련에서 벗어나는 희망을 우리들의 기도로 꺼내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다 는 이 말은 우선 그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선택하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다. 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시편 23)


  시편기도 같이 산 이와 돌아가신 분과 함께 계시는 자비로운 하느님께 오늘 구정 설 합동미사 지향하는 연령들을 봉헌하십시다.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자는 힘을 잃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 알렐루야.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도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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