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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5월 27일 (월)연중 제8주간 월요일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5분교리
미사의 재발견(평화인사)

22 수유1동성당 [suyu1] 2008-01-19

 

 
 
1. 마침 영광송이 끝나면 영성체 예식이 이어진다. 이 예식은 사제의 권고에 따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시작된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그분의 나라가 도래하며,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기원이었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기원을 드림으로써 성체 안에 계시는 그분과의 일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 후반부에서는 주님과 일치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죄의 용서를 청하면서, 그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서 형제와 화해를 하고 또한 유혹과 죄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2. ‘주님의 기도’와 부속 기도를 바친 후에 평화 예식이 뒤따른다. 사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을 인용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듯이 교회에도 평화를 주시기를 간청한다. 이어서 사제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신자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이에 대해 신자 공동체는 “또한 사제와 함께”하고 응답한다. 곧바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는 사제의 권고에 따라서 신자들은 서로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를 나눈다.

  3. 여기서 평화는 죄의 용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한 곳에 모여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었다(요한 20,19). 이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0) 예수님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추궁하는 대신에 평화를 기원한다고 인사하신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의 비겁함과 배신을 용서해주시면서 그들이 죄책감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기원하는 예수님 말씀에는 제자들에 대한 용서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은 너그러운 용서로써 제자들을 과거의 잘못에서 해방시켜서 주시고, 다시 사도로 삼아 세상에 파견하신다.

  4. 이렇게 볼 때 미사 중에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를 나누는 것은 서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겠다는 다짐의 인사라고 하겠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기 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청원했는데, 이 청원대로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서로 용서하겠다는 각오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 사이가 바쁜 사람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사람과 화해를 하고 그 다음에 예물 바치라(마태 5,23-24)고 하실 정도로 용서와 화해를 중요시하셨다. 이런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기 전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서 그분의 뜻대로 용서와 화해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5.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늘 많은 용서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이웃에게 작은 용서를 베푸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마태 18,23-45).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고 사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을 용서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미운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더라도 그 사람을 생각하거나 볼 때마다 다시 안 좋은 감정이 솟구쳐서 결심이 흔들리기 십상이다. 이렇게 용서는 쉽지 않은 일이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용서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용서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용서는 사람을 살리는 귀중한 약이 되기도 한다.

어느 섬 마을에는 결혼한 여인이 남편 아닌 남자와 부정한 관계를 갖게 되면 마을 자체에서 처벌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 벌은 아주 엄격한 것이었다. 마을 뒤쪽에 있는 벼랑으로 잘못한 여자를 데리고 가서 그 아래로 떨어뜨려 죽이는 벌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 여인이 잘못을 범했다.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는 다음날 새벽에 그 여인을 마을의 법대로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잘못한 여인의 남편은 그 결정이 내려지자 사라져서 이튿날 처형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 기다리다가 결국 여인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날 오후에 보니 죽었어야 할 여인이 남편과 함께 집에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그 남편은 부인이 처형되기 전날 밤새도록 배에서 그물을 가져다가 벼랑 중간에 쳐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인은 벼랑에서 떨어졌지만 그물에 걸려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남편의 정성에 감탄하여서 그 여인에게 더 이상 벌을 주지 않고 남편과 함께 살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6. 인간은 자신이 범한 무거운 죄로 인해서 멸망의 절벽 아래로 떨어져야할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예수님이라는 ‘용서의 그물’을 쳐서 멸망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인간을 구해 주셨다. 이제 하느님은 인간들이 서로 ‘용서의 그물’을 쳐서 서로 생명을 보호해주기를 원하신다. ‘용서의 그물’을 가능한 넓게 펼칠 때 그 안에는 생명, 평화, 화해라는 좋은 물고기가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용서의 그물’을 활짝 펼쳐서 집안의 화목을 되찾은 어느 가정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떤 어머니가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의 방을 청소하다 책상 서랍에서 구석에 숨겨둔 시험지 하나를 발견했다. 60점 맞은 시험지였다. 그 순간 어머니는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올랐다. 점수도 제대로 받지 못한 주제에 부모까지 속이려고 시험지를 숨기다니... 어머니는 그 날 하루 종일 화가 난 채로 지내다가 저녁 때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그 사실을 일러바쳤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부인의 얘기를 듣고서는 자기에게 맡겨두라고 했다. 얼마 후에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제 방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아빠는 그 방에 들어가서 딸을 조용히 타일렀다. “엄마가 그러는데 네가 60점 맞은 시험지를 책상 속에 숨겨놓았다면서? 너 그동안 마음이 많이 괴로웠겠구나. 공부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엄마 아빠는 앞으로 네가 점수를 못 맞는다고 해도 시험지를 숨기지 않았으면 한단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아빠가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자 딸아이는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리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면서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아이는 다시 활기를 되찾고 부모와 다시 화목하게 지내게 되었다.

남편 역시 부인에게 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속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점수도 못 맞은 주제에 부모까지 속인 딸아이가 어찌 괘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부인을 따라 벌컥 화내는 것을 자제하고 아이를 이해와 용서로 대하자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아빠는 딸을 야단치고 벌하는 대신 용서함으로써 딸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비유로 표현하면, 아빠는 얼음 덩어리처럼 굳어진 딸의 마음을 야단과 비난이라는 망치로 부수려고 하기보다는 이해와 용서라는 봄바람으로 녹였던 것이다.

 

  7. 우리 모두는 약한 인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잘못과 실수를 저지른다. 물론 그 잘못과 실수 고치려고 본인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본인이 깨닫지 못하고 잘못과 실수를 반복한다면 다른 사람이 일깨워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실수와 잘못은 있게 마련인데, 그것에 대해 벌을 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많은 경우에 책임을 추궁하고 야단치는 것보다 이해와 용서가 더 큰 효과를 낸다. 농작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겨울철의 추위가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땅 속 병균이나 벌레가 죽어야 다음해 농사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씨앗을 싹트고 자라게 하는 것은 부드럽고 따뜻한 봄바람이다. ‘사람 농사’도 곡식 농사와 다를 바가 없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처럼 잘못을 타이르는 따끔한 질책이 필요하지만, 정작 한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과 같은 관대한 용서와 자비다. 질책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정작 사람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것은 용서와 자비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옛 성현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남을 죽인다면 짐승과 같이 되고, 우리가 판단할 때는 인간과 같으며, 우리가 용서할 때는 하느님과 같다.”

하지만 심보가 옹졸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본받기가 무척 힘들다. 그러므로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기도가 없어서는 안 된다. 용서를 하겠다는 결심을 물론 이 결심을 실천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과 함께 기도로써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비록 용서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미운 감정을 하느님께 솔직하게 내어 보이면서 도움을 청하고, 성체를 영하면서 주님께 필요한 힘과 용기를 얻을 때 비로소 용서는 가능하게 된다.

 

  8.평화의 인사를 나누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회개로 부르신다. “하느님은 너희의 죄를 거듭해서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는 분이다. 하느님의 용서에 감사드리면서 그에 대한 응답으로 너희도 서로 용서하여라.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너희도 너희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복수와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를 통해서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게 된다. 참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서로 용서하여라.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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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성서> 2008년 2월호 게재.(글/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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