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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편(14) 예로니모

533 심재엽 [simjy] 2005-03-19

【33】교부편(14)-예로니모

 

  예로니모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그리   스어로 된 신약성서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번역했다.

라틴어로 성서번역 대중화 선도

 

성서연구·저술작업에 몰두

자기 결점들 가슴깊이 반성

 

「불가타」(Vulgata:대중적)는 예로니모(347∼419) 성인이 번역한 라틴어 성서를 가르킨다.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그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이면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로마교회가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저술과 여러 뛰어난 학문적 업적 중에서도 무엇보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학자로 이름을 각인시키고 있는 예로니모.

그런 만큼 그는 성서 번역 외에도 유명한 그리스 교부들의 성서주석서들 특히 오리게네스의 주석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자신이 직접 구약성서의 창세기 시편 전도서 예언서, 또한 마태오 복음서 사도 바오로의 필립비서 갈라디아서 에페소서 디도서 등에 대한 주석서들을 저술하는 등 성서연구에 몰두했던 인물이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교회 4대 교부로 꼽히는 예로니모는 성서 관련 저술 외에도 교의신학서, 이단논쟁서, 수덕신학서, 역사서, 강론, 서간 등 다양하고 목록만 열거해도 엄청난 양일 정도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와 관련한 성화들 대부분이 펜을 들고 저술에 힘을 쏟고 있는 장면인 것도 그러한 방대한 저술 작업과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예로니모는 347년경 북부 이탈리아 아퀼레이아 인근 스트리도니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던 그는 12세 되던 해 로마에 가서 엘리오 도나토라는 학자에게 수사학, 라틴어 문학 등을 사사했다.

신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도 이때 로마에 체류하면서 였는데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면서 신앙을 키워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세때 리베리오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프랑스 트리어에 정착, 정부관리로 일하게 된 그는 이즈음 수도 생활을 접하게 됐고 결국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게 된다.

340년경 로마로 돌아온 후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했던 예로니모는 373년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아폴리나리우스 주교로부터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이후 칼치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새로 공부했다.

379년 다시 안티오키아에 가게 된 예로니모는 바울리노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고정적인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저술과 번역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38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현지 총대주교 나치안츠 그레고리오의 강의를 듣고서였다. 예로니모는 이때 오리제네스 성서 주석 방법에 빠져들었고 오리제네스의 저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을 접하게 된 것은 382년 다마소 1세 교황 비서로 임명된 후 신 구약 성서의 라틴어 번역 임무를 맡게 되면서였다.

번역 작업과 병행해서 상류층 미망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 생활에 대한 이상을 교육시켰던 그는 이에 대한 적대자들의 의심과 비난에 부닥쳐 본의 아니게 로마를 떠나 386년 베들레헴에 정착했고 이때부터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예로니모는 이로부터 34년동안 수도원에 머무르며 막대한 양의 저술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

는 예로니모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4복음서와 바오로의 편지들, 시편의 라틴어본 사본 제작, 「헬비디우스를 반박하며」 등의 이단 반박서, 호교론 등의 저술들이 이뤄진 것도 이때였다.

예로니모는 한편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열렬했었다.

이전의 어느 교부도 그만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명확하게 표현한 적이 없다고 전해질 정도인데, 그런 말처럼 그는 교회를 위해 싸웠고 교회에 적대적 입장을 보이는 자들은 원수처럼 여겼다. 일례로 오리제네스의 추종자였음에도 오리제네스 이단 논쟁이 일자 반대 입장에 서서 교회를 수호했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서신 연락을 통해 당시 교회의 큰 골치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없애는데 힘을 모았다.

학자들은 그의 성서 번역 연구와 관련, 「성서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했다」고 밝히면서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예로니모가 그처럼 주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예로니모는 격한 성격과 신랄한 비평, 빨리 화를 내는 한편 빨리 후회하는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 더 가혹했다고 하는데, 한 교황은 돌로 가슴을 치는 예로니모의 초상화를 두고 「만일 그 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교회는 결코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라틴 교부들 중 가장 박학했으며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학자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예로니모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예로니모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일찍이 안 사람은 없었다』라는 평을 받았다. 또 현대의 한 신학자는 『예로니모는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니모 이후 몇세기 동안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데 적격이었을 뿐이었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72세 나이로 선종했으며 「신학교 수호성인」,

「수덕 생활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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