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신수동성당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홍) 2024년 3월 29일 (금)주님 수난 성금요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신수동성당 게시판
[신수동 성 요한 성당: 사순묵상] 원수사랑과 약자사랑

3267 전준희 [isaiah0524] 2020-03-07

1. 이번 사순절에는 함께 스마트폰 사용을 줄여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시간을 줄이고, 약자나 혹은 원수를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하느님 안에서 쉼"이라는 책자에 날마다 독서/복음을 한두줄, 묵상과 일기를 한두줄 적으며 활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내일부터 사순 제2주간이 시작됩니다.

항상 금새 지나가버리는 사순/대림시기에 꼭 잠시 멈춰서서 삶을 점검하도록 서로 격려해줍시다.

 

 

2. 아래의 글은 '원수사랑'에 관한 지난 2월 23일 강론입니다.

 

도시순례자 여러분, 청년 노동자 예수를 기억합시다.

 

2월 23일에 우리가 들은 말씀들에는 이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구절을 읽겠습니다.

-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한데, 너희가 바로 그 성전이다.

- 아버지 하느님이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해야 한다.

거룩함 혹은 완전함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우선 완전함에 대한 이야기는 참 부담스럽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해야 한다. 너희는 이처럼 완전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너의 원수까지도 품어주어야 한다라는 식의 말은, 때로 폭력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자분들이 원수사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으레 하는 말로 들으시는지.

-진지하게 자신의 삶에 적용할 화두로 여기시는지.

-노력하고 노력해도 안되서 가슴앓이를 하게 하는 말씀일지

 

첫 번째 유형의 사람, 그냥 으레 하는 말로 여기는 분들에게는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 진지한 화두로 삼는 분들에게는 부디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 원수사랑이 안되서 힘든 맘이 더 힘드신 분들에게는 천천히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세 번째 유형의 사람들에게 가장 마음이 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원수사랑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원수사랑의 가르침이 예수메시지의 핵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원수사랑이 좋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무척 위험천만하고 위태로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면, 한국 현대사의 몇몇 인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잘못된 용서는 공동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둘째로, 원수사랑이 예수메시지의 핵심이 아닌 이유는 성경에 그 가르침이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메시지의 정수와도 일관성있게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원수사랑은 네 권의 복음서 중 오직 두권, 마태오와 루카에만 나오는 전승입니다

또한 예수 메시지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인데, 이에 비하자면 원수사랑은 너무 협소한 주제, 지엽적인 주제에 해당합니다.

짧막했지만 다소 복잡한 이야기였는데, 지금까지 드린 말씀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오늘 들은 성경말씀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가르침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입니까?

 

몇 가지 연속되는 질문으로 내용을 넓혀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닮아 거룩해져야 합니까 

완전해져야 합니까 

그 거룩함과 완전함은 어떻게 달성됩니까 

우리가 거룩해졌고 완전해졌음을 우리는 언제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나와 내 가족과 나에게 소중한 것을 파괴한 어떤 인물을 무모하게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나의 완전함과 거룩함이 달성되는 것일까요 

그런 완전함과 거룩함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요? 나의 만족, 나의 정신승리, 나의 도덕적 우월함을 위한 것이 아닌지를,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원수사랑보다, 오히려 약자사랑을 제안드립니다. 저는 예수 메시지의 핵심이 원수사랑이 아니라 약자사랑이라고 확신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약자와의 연대입니다. 그와 함께 나란히 서는 것입니다

 

원수사랑 이야기는 오직 마태오와 루카에만 등장합니다. 그러나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를 걸쳐 드러나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의 중심에는, 버려진 사람들, 깨진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마음의 중심에는 원수가 아니라 약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의 힘으로 버려지고 깨지고 잊혀지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나눌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질문을 대면하게 됩니다.

내가 약자들을 잘 돌보고, 많이 돌보고, 자주 돌보면, 그것으로 나의 완전함과 거룩함이 달성되는 것일까

그런 완전함과 거룩함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나의 만족, 나의 정신승리, 나의 도덕적 우월함을 위한 것이 아닌지를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항상 우리를 심연 속으로 삼켜버리고, 우리가 간신히 지펴낸 선한 의지를 다치게 합니다. 그러니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합시다

 

약자사랑은 함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원수 사랑이야 각자 원수가 다르므로 각자의 개인전이지만, 약자사랑은 개인전이 아니라 팀전입니다. 우리는 약자사랑과 약자돌봄과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이 건강해지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나와 너의 구분이 줄어들고 모두가 우리가 됩니다. 한 아버지 아래에 한 가족. 이런 일들은 두말할 필요없이 매우 건강한 일입니다. 이런 일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증거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야말로 예수 메시지의 정수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사랑이 아니라 약자사랑, 약자돌봄, 약자와의 연대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들도 그런 전반적인 취지 아래에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더 넓히면, 예수는 도대체 누구냐, 뭐 한 사람이냐 하는 질문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놀라운 윤리를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윤리의 창시자!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예수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여러 윤리 도덕을 중시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이런 쪽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창립자!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종종 우리 종교가 얼마나 우월한지를 드러내는데 매진합니다. 유다교가 얼마나 바리사이적이고 형식적이었는지, 그에 비해 예수의 종교는 얼마나 사랑과 자유를 중시하는지. 저는 이런 쪽도 아닙니다

 

예수가 윤리인과 종교인이 아니라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십자가에 처형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권력자가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윤리와 종교는 보통 기존 질서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데 기여합니다. 예수가 성전 앞에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칩시다. “여러분, 우리 개인윤리를 잘 지킵시다. 거짓말 하지말고 서로 용서하고 주일미사를 빠지지 맙시다.” 그 어떤 권력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마이크를 더 쥐여주고, 가서 더 가르치라고, 더 많은 사람들을 온순하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잔혹하게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는 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그 이야기는 차차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하나 힌트를 드리자면, 이천년 이후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들의 죄악 때문에, 그분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설명은, 제가 채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약입니다.

원수사랑으로 애쓰시는 분들을 응원합니다. 부디 성공하시길 지지합니다.

원수사랑으로 마음고생하는 분들에게 약자들과 연대하자고 초대드립니다.

원수사랑은 개인전이지만 약자사랑은 팀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4 100 4

추천  4 반대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