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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관련
교부편(13) 힐라리오

532 심재엽 [simjy] 2005-03-19

32】교부편(13) -힐라리오

 

  힐라리오는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며 「삼위   일체론」을 저술했다. 사진은 삼위일체 교리   를 나타내는 그림.

‘삼위일체’ 정통신앙 수호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소집돼 니체아에서 열렸던 니체아 공의회(325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 결과적으로 성령을 부정하고 성부만이 진정한 하느님이라는 아리우스주의 이단 문제를 다룬 공의회였다.  이때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니체아 신경을 채택, 성삼위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378년 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즉위하면서 니체아 신경 내용을 제국의 종교신조로 선언하는 시기까지 계속해서 교회 안의 「뜨거운 감자」로 혼란을 초래했다.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프와티에의 힐라리오(약 315∼367)는 니체아신경의 철저한 옹호자였던 아타나시오를 지지, 356년 베지에(Beziers) 교회 회의에서 아타나시오에 대한 단죄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 논쟁에 반하는 교회 정통의 시금석이 된 인물이

다.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가 제국 이념의 관점에서 일치된 신앙 고백으로 정치적 일치를 기한다는 목적하에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굴복시켰고 자신에게 비협조적 태도를 보였던 아타나시오를 단죄하는 과정에서 함께 단죄 결정을 받았던 것이다.

양친이 그 나라 귀족이었지만 이교도 집안 출신이었던 힐라리오. 그는 가장 좋은 학교에 들어가 수학하며 이교도임에도 쾌락을 물리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新)플라톤주의자로 청년기에 우연히 성서를 접하면서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연구하기 시작, 마침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완덕에 몰두하였고, 프와티에시 주교가 서거하자 350년 그 후계자로 주교품에 올랐다.

그리스도교에 귀의하는 과정에서 철학적이면서 종교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 그 해답은 성서 특히 요한 복음에서 찾았던 그는 그런 만큼 맑고 깊이있게 성숙된 신앙으로 황제들 요구가 함축하고 있는 바를 올바로 식별해냈고 그런 바탕에서 니체아 공의회를 몰랐음에도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투쟁의 앞자리에 섰다.

『나는 이미 오래전 세례를 받았고 오래전부터 주교직을 수행해 왔지만 내가 귀양살이를 떠나기 전까지는 니체아 신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교회회의」 De synodis 20).

단죄 재판을 받고 소아시아 프리기아로 귀양살이를 떠났던 힐라리오는 그러나 이 시기를 통해 동방신학을 접하며 그의 신학을 보다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경험을 하였고 그리스 신학을 연구,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는 중요한 저작과 서신들을 남겼다.

본국에 돌아와 359년 셀루시아(Seleucia) 공의회에서는 교회 정통성을 옹호하는 등 당대 주도적이고 가장 존경받는 라틴 신학자로 부상했다. 또 마르틴 (Martin of Tours)이 골 (Gaul) 지방에서 수도원 운동을 시작하도록 했다.

학자들은 힐라리오를 「사상의 독창성과 힘있는 언변을 지닌, 서방 그리스도교를 그리스 교부의 방대한 신학적 보고에 접촉시킨 유럽 대륙 최초의 신학자」로 꼽고 있는데 특히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는 내용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 저술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삼위일체 연구와 관련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그의 설(設)을 자주 인용했던 학자들이다.

열두권 분량에 이르는 삼위일체론은 「신앙에 관한 연구」와 「아리우스의 이론과 주장, 아리우스가 사용한 성서구절들에 대한 체계적 논박」 등의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서방의 아타나시오」로 불릴 만큼 가르침과 신학 작품들 안에서 정통성을 드러내 보였던 힐라리오는 게르만족 침입 이후 재 유입된 아리우스주의 이단으로부터 서방 세계를 무장시키는데 커다란 방패막이 됐다.

그는 또 삼위일체론 외에 리미니 교회회의(359년)를 교의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핵심적 문헌들을 「역사단편」에 모았으며 「신비에 관하여」, 「시편 주해」 등도 펴냈다.

「신비에 관하여」는 사제와 교리교사들을 위한 책으로 구약 성서를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다시 읽어내고 있으며 「시편 주해」는 일종의 영성신학 작품으로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마태오 복음 주해」는 사제들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다.

 

서방 최초의 전례작품을 쓰기도 했던 그는 교리를 퍼뜨리기 위해 시를 이용하던 동방 교회의 모범에 착안,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음률을 붙인 찬미가를 활용토록 하는등 찬미가를 선교 도구로 사용하는 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가사가 너무 어렵고 모호했던 관계로 암브로시우스의 찬미가 만큼 서방 교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다.

그는 골 지방과 이탈리아에 남겨진 아리우스주의의 해독을 치유하는데 말년을 보냈으며 1851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됐다. 축일은 1월 13일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시여, 당신을 섬기는 것이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며 나의 모든 말과 생각으로 당신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언변의 은총은 당신의 이름을 전하고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나 당신을 부인하는 이단자들에게나 당신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증명해 줌으로써 당신을 섬기는 일보다 다른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삼위일체론 1,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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