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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4일 (수)부활 제4주간 수요일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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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좁은 문 (루카13,22-30)

175 김종업 [rlawhddjq] 2019-08-24

 

 

[연중 제21주일]좁은 문 (루카13,22-30)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살아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겠다고 하신다. (이사66,18-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1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히브리서의 저자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며 시련을 견디어 내라고 한다. (히브12,5-7.11-13)

형제 여러분,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시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이사야서66,18-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8)

 

앞의 이사야서 66장 15-18절 상반절에서는 주님의 오심과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불의 심판이 예언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66장 18절 후반절부터 21절에서는 그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서

선민들의 선교에 의해서 이방인들의 대회심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의 시작은 언젠가는 모든 민족들이 주 하느님 대전에 모여들어

그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이 예언된다.

 

새 성경에는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때가 이르면'에 해당하는

'빠아'(baah; it shall come; about to come)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오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뽀'(bo)의 분사형으로서

문자적으로 '오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현재 오고 있는 중이라는 진행적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실상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간적 절박감이 잘 나타난다.

그때에는 단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주님 대전으로 모여들 것이다.

 

 

본문에서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 해당하는

'콜 학고임 웨할레쇼노트'(kol haggoim wehalleshonoth)는 문자적으로는

'모든 민족들과 모든 혀들'(all the nations and tongues)이라는 의미이다.

 

새 성경이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로 번역한 '할레쇼노트'(halleshonoth)의 원형

'라숀'(lashon)언어와 미각의 기능을 담당하는 혀(tongue)를 의미하는 단어이다(탈출4,10).

이사야서 45장 23절에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 말하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본문의 문맥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모든 혀들이 주님 대전에 모일 것이라는 사실은 단 하나의

소수 부족도 빠짐없이 다 모일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의 선교에 의해 이방인 가운데

하느님의 간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나타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모든 언어 단위의 부족에게

다 전파될 것임을 암시한다(미태24,14).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주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다 당신 대전에 모으시는 진정한 목적은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그분 영광의 현시는 구약 시대까지 사실상 이스라엘 민족에 한정되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탈출16,7; 24,16; 29,43), 이방 민족들에게 있어서는 큰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광이 반드시 축복의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그 영광이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무서운 심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대회심을 예언하는 문맥을 볼 때,

본문은 심판보다는 축복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연중 제21주일 제2독서 (히브12,5-7.11-13)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6)

 

주님의 훈육은 영적 자녀가 된 성도에 대한 진정한 부성애의 표시이다.

 

그분의 훈육은 사랑하시는 이에게만 내리기 때문에 누가 주님의 훈육을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증거이다.

 

여기서 '훈육하시고'로 번역된 '파이듀에이'(paideuei)의 원형 '파이듀오'

(paideuo)는 본래 '어린이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에서

'양육하다', '가르치다', '습관을 들이다' 등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구약 그리스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는 주로 '응징하다', '교정하다',

'훈계하다' 등을 뜻하는 히브리서 '야싸르'(yasar)의 역어로 나온다.

 

따라서 70인역에서는 '파이듀오'(paideuo) '가르치다'라는 의미보다는

'훈육하다'라는 의미에 보다 가깝다.

 

이 단어가 본절에서는 하느님의 훈육을 통한 교육이라는 개념을 나타내어 쓰였다.

 

유대 사상에서는 훈육'최후의 심판에서 보호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행동'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히브리서의 저자도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의 훈육이 성도들로 하여금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에, 고난 중에 있는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실망하지 말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녀가 된 당신 성도들을 멸망하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고 교정하시는 일시적 하나의 과정

뿐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앙으로 인한 고난으로 침체에 빠졌을, 당시 히브리서

일차 독자인 히브리 출신의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릇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부모는 실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나 불의에

가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내버려 두셨다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되면 계속해서 훈육하심으로써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신다.

 

가르침이나 교정에는 꾸짖음이나 훈련이 불가피하다.

 

언제든지 그분께서는 우리 곁에 계시면서 당신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를 교육하며 훈련시키신다.

  

'채찍질하신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영적 자녀들에게서 허물이 발견될 때에

나타내시는 반응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채찍질하신다'로 번역된 '마스티고이'(mastigoi)

현재 시제로서 '계속해서 매질하다' 혹은 '계속하여 응징하다'라는

지속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마스티고이'원형 '마스티고오'(mastigoo)끝에 납덩어리가

달려있는 '채찍'을 의미하는 명사 '마스틱스'(mastik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살점이 떨어지도록 심하게 '채찍질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육체적 폭력 행위를 뜻하는 여러 그리스어 단어들 중에

더욱 가혹한 형태의 처벌을 나타내는데, 후기에는 중대한 범죄에

뒤따르는 로마의 징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의 명령으로 이 형벌을 받으셨고(요한19,1),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사도5,40) 역시 채찍질의 형벌을 받았다.

 

그 채찍질은 참으로 가혹한 형벌로서 본문에서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무엇때문에 인정하시는 아들, 즉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아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채찍질하시는가?

 

그 이유는 그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요, 또한 그 아들을 상속자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본절의 '아들'에 해당하는 '휘온'(hyon)의 원형 '휘오스'(hyos)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하는 아들이라는 법적 개념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내려지는 주님의 채찍이 아프다고 생각될 때, 이것은

그분이 나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그 채찍은 바로 아들된 우리를 향한 아버지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인 것이다.

                 

 

연중 제21주일 복음 (루카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4)

 

본절에서 '힘써라'에 해당하는 '아고니제스테'(agonizesthe; strive; make effort to)의

기본형 '아고니조마이'(agonizomai)는 원래 경기에서 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다',

'싸우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최선을 다하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루카 복음 13장 25절문이 열려 있을 때와 닫혀버린 이후를 대비한다는 점에서,

이 동사의 의미는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어떻게든 들어가도록 노력하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구원의 문을 들어가도록 애쓰라는 것이다.

 

또한 본절에서 '문''집의 문'을 가리키는 '튀라'(thyra; gate; door)로 표현된 반면에,

마태오 복음 7장 13절에서는 '성문' 또는 '성전의 문'을 가리키는 '퓔레'(pyle)로 표현되었다.

 

이런 차이13장 25절에서 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집주인'의 역할에 따라

이 구절의 배경을 어떤 성이나 성전이 아닌 '어떤 집'으로 맞추기 위한 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문을 특별히 '좁은 문'('테스 스테네스 튀라스'; tes stenes thyras;

the strait gate; the narrow door)으로 묘사한 것은, 앞의 '힘써라'는 표현과 함께

구원받는 것이 그렇게 안일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진정으로 구원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좁은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하겠지만'에 해당하는 '제테수신'(zetesusin; will seek; will try)의

기본형 '제테오'(zeteo)'추구하다'는 뜻으로서 개인적인 추구와 노력을 가리킨다.

 

결국 이 동사는 구원에 있어 아무런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헛된 노력과 시도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3장 25절과 관련지어 볼 때, 문이 닫혀진 후에

계속해서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당신께 구원을 겸손히

청하는 사람들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자신의 노력과

인생의 헛된 수고만으로 구원을 얻기를 추구한다면, 그에게는 결코

구원이 없음을 본절에서 사용된 '제테오'(zeteo) 동사의 뜻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유대인들에게 적용할 때에는, 그들의 인본주의적인 전통이나 율법에

대한 추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원은 인위적인 노력으로만

얻어질 수 없다는 방법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못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우크 이스퀴수신'(uk ischysusin;

will not be able to)'그들이 할 수 없을 것이다'는 뜻으로

불가능의 의미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할 수 있다'는 뜻의 기본형 '이스퀴오'(ischyo)미래 직설법

능동태로 사용된 '이스퀴수신'(ischysusin)부정어 '우크'(uk)와 더불어

그들의 구원에 대한 노력은 마지막 때에 무익한 것으로 드러날 것임을 표현해 주고 있다.

                 

 

2015년 8월 23일 나해 연중 제21주일

 

어리석은 나그네

 

옛날에 한 나그네가 먼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 나그네는 여행을 계속하는 중에 어느 들판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득한 지평선만이 보이는 들판길입니다.

나그네는 먼 여행을 하느냐고 지친 다리를 끌고 천천히 들판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뒤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나그네를 향해 성난 이를 드러내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깜짝 놀라 갖고 있던 모든 짐을 팽개친 채 허겁지겁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나그네는 달려가는 도중 깊은 구렁텅이로 빠졌습니다.

다행이도 구렁텅이 한 가운데에 나뭇가지가 길게 뻗어 있었기 때문에 이 나그네는 그 나뭇가지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가지를 잡고 위를 보니 위에는 호랑이가 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밑을 보니 밑에는 흰 비단뱀이 시뻘건 혀를 널름거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 나뭇가지를 흰 쥐 한 마리와 검은 쥐 한 마리가 서로 번갈아가며 나무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옆을 보던 나그네는 한 쪽 벽 사이로 많은 꿀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나그네는 그 꿀에 정신이 팔려서 혀로 그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는 그 나뭇가지는 흰 쥐와 검은 쥐가 갉아먹고 있기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져 밑으로 떨어질 것은 정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이 나그네는 꿀을 먹는 데만 정신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어리석은 나그네처럼 먹고 즐기고 노는 것에 정신을 팔아먹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그것을 모르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좁습니다.

우리가 힘들지만 구원을 주는 예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실고,

먹고 즐기고 노는 것에 정신을 팔아먹는다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어리석은 나그네와 다르지 않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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