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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나해-03)

157 전창문 [cmjun] 2003-08-24

연중 제21주일(나해-03)

                                                    2003. 08. 24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입니다. 요즈음은 깡통을 허리에 차고 밥을 구걸하는 거지를 거의 볼 수 없지만 70년 대 전만 해도 식량이 부족하고 먹고살기 힘든 때라 밥을 구걸하는 거지가 많았습니다. 지금 청계천 복개 공사가 한창입니다만 6.25동난 후에 청계천 주변은 거지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지 중에 유달리 속된 말로 똘마니를 많이 거느린 거지 왕초가 있었습니다. 이 거지 두목은 구걸하는 능력이 뛰어나 그의 수하에 있으면 굶어 죽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많은 거지들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 왕초가 나이도 많고 또 병도 얻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하 거지를 모이게 한 다음 가진 것은 별로 없었지만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부하들에게 분배했습니다. 누구에게는 밥을 구걸하던 깡통을 주고, 어떤 거지에게는 몇 푼 안 되는 동전 몇 닢을 주고, 또 어떤 이에게는 입던 다 떨어진 옷을 주기도 하며 부하 거지들에게 일일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거지에게 다 나누어 준 후라 아들 거지에게는 이제 나누어 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거지들이 아들에게는 무엇을 줄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그 두목 거지는 몸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아들 거지에게 주면서 여기에는 네가 평생 먹을 것이 있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모두들 그 종이 뭉치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무슨 집문서는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땅 문서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물이 숨겨 있는 지도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땅에 묻고 아들이 그 종이 뭉치를 펼쳐보았더니 그것은 집문서도 땅문서도 지도도 아닌 메모장이었습니다. 메모장을 펴보니 그곳에는 정월 초하루는 누구집 제사 날, 초이튿날은 박 부자나 환갑 잔치, 초삼일 날은 김 씨네 손자 돌잔치 날, 사흔날은 이 씨네 아들 장가가는 날 등 이렇게 일년 열두 달 얻어먹을 수 있는 집 명단이 적혀 있는 메모였다고 합니다. 이 왕초 거지는 자기 아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얻어먹을 수 있는 집 메모를 유산으로 남긴 것입니다. 아마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이 아들은 아버지의 배려 때문에 굶지는 안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거지 왕초는 자기 아들을 굶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얻어먹을 수 있는 집의 경사 날이 적힌 메모를 아들에게 남겨 주었지만 이 아들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살리는 음식은 아무리 먹어도 곧 또 배고프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되어 사람을 영원히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거지 왕초는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 굶지 않고 얻어먹을 수 있는 집 목록을 남기는 사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 주님이신 예수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고 결국 죽게 되는 그런 빵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빵, 즉 당신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생명의 빵, 즉 성체 성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알아듣게 하기 위해 지난 6주전부터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고 오늘은 그 종결편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고 하자 유다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대듭니다. 또 어떤 제자는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당신의 살과 피, 즉 성체성사를 알아듣게 하기 위해 5천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후 계속적으로 생명의 빵인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 하셨지만 유다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성체성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지만 유다인들은 현실적인 기적 외에는 어떤 말씀도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아니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마이동풍'이란 속담이 더 맞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목적은 오직 하나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고 그런 기적으로 보아 이 분이 우리가 학수 고대하고 있는 현세적 구세주, 민족을 로마 제국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줄 유다인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다인들은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영광을 원했지, 고통과 괴로움을 수반하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또 유다인들은 순간의 쾌락과 즐거움을 원했지, 서서히 자라 크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운 모습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로마의 압제와 침략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를 원했지, 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순애보적인 메시아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처럼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기대에 어긋나자 하나 둘 예수님의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사람은 12명의 제자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삼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제자들에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하고 묻습니다. 이런 질문에 베드로 사도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신앙고백 같지만 사실 이것은 주님의 정체를 제대로 깨닫는, 즉 주님의 말씀이 바로 생명의 말씀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결연한 의지표명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물질이나 부나 명예 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새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사랑의 방정식에 의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방정식에 의한 구원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복적인 신앙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기대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이 자기 기대에 어긋나자 예수를 떠나갔던 것처럼 주님을 버리고 냉담하거나 배반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천년 전 제자들에게 질문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 같이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질문에 나는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 묵상하고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처럼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성체성사의 의미를 깨닫고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감사의 마음으로 정성껏 영할 수 있는 사랑의 삶, 복음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고 아직 우리 삶에 부족하고 모자란 면이 있다면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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