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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일]불 (루카 12,49-53)

174 김종업 [rlawhddjq] 2019-08-18

 

[연중 제20주일](루카 12,49-53)



치드키야 임금은 대신들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 예언자를 저수 동굴에 가두었다가 에벳 멜렉의 말을 듣고 그를 꺼낸다. (예레38,4-6.8-10)
그 무렵 4 대신들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5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자,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6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울안에 있는  말키야 왕자의 저수 동굴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8 에벳 멜렉은 왕궁에서 나와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다.
9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제 도성에는 더 이상 빵이 없습니다.”
10 그러자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 멜렉에게 명령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한다. (히브  12,1-4)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고,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신다. (루카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예레38,4-6.8-10)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자,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5)

 

예레미야서 38장 4절에서 일부 대신들이 예레미야가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죄목으로 처형할 것을

치드키야 임금에게  말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38장 5절치드키야 임금이 책임 회피적으로

대신들의 청을 허락하였음을 밝힌다.

 

치드키야 임금이 예레미야 처형에 대해 임금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한 사실은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에 해당하는 '뻬예드켐'(beedkem)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처분권이 대신들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치드키야는 자신이 남부 유다 왕국의 임금으로서 모든 일을 법에 따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위치에 있었지만, 

예레미야의 처분에 대해서만큼은 예레미야의 사형을 청한 

대신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해 버린다.

 

이러한 책임 회피는 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첫째는 당시 치드키야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미약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치드키야는 유다 백성들과 정치 세력들의 지지를 입고 왕 위에 오른 인물이 아니라

바빌론의 꼭두각시로 임금 자리에 앉혀진 인물이었다(2열왕24,17).

 

따라서 임금 자리에 등극할 때부터 정권 장악력이 약했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할수록 휘하 세력을 통솔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정치 실세인 대신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는 치드키야는 예레미야가 주님의 예언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즉 치드키야는 자신이 예레미야의 목숨을 처결하면, 자신이 그에 대해

주님께로부터 징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치드키야는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예레미야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본문은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문장으로서 왜 예레미야의 처분권이

임금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 사건을 청한 대신들의 손에 달려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치드키야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그들이 말하는 것을 조금도 거스를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이런 표현은 임금으로서의 자신의 품위와 위신을 너무나 많이 떨어뜨린 말이며,

임금으로서의 체통을 다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중 제20주일 복음(루카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49~50)

 

 

 

루카 복음 12장 49~53절은 복음이 확산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진리와 비진리의 처절한 투쟁과 충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루카 복음 12장 49절과 5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사업을 통한

구원의 복음 전파에 수반되는 현상을 '불'과 '세례'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미 타올랐으면'으로 번역된 '에이 에데 아넵테'(ei ede anepthe;

(if) it were already blazing)에서 '아넵테'(anepthe)동사가 '불이 붙었다'는

의미를 지닌 부정(不定)과거형으로 완전히 불붙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성서학계에서는 이미 불이 붙었으나 완전하게 붙어

더 잘 타오르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본다.

 

여기서 '불'로 번역된 '퓌르'(pyr; fire)는 신앙인과 불신앙인간에 조성되는

적대감이나 박해로 인해 믿음의 자녀들이 겪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불'과 같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과 미움, 죄악과 불의 그리고 박해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만, 바로 그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난의 '세례'가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복락과 축복이 되고,

고난과 박해를 저지른 자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됨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천상과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 밖에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요,'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기쁘게 고난을 감수할 의지와 신앙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당장에는 그 진리 때문에 세속화(世俗化)되고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흐르는

교회 안에서조차 따돌림당하고 배척 받는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스테파노의 순교 형장을 천상에서 서서 바라보시고 동참하시는 것

(사도7,55~56)으로 위로를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만 인정받는 자세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면,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이 없다.

 

당신의 천주성(神性)으로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과거에 지었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이

당신의 전지(全知)하심으로 다 들어오며 다 보고계신다.

 

그 안에는 나의 죄도, 너의 죄도, 우리 모두의 죄도 다 들어있다.

 

그러기에 이 겟세마니의 밤은 참으로 괴롭고 가슴아픈 밤이다.

 

이제 이 인간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를 무죄(無罪)하신 당신의 인성(人性)으로

자발적으로 대속(代贖)해야만 아버지 하느님의 공의(公義)가 채워지고,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독당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선성(善性)과

성성(聖性)이 회복되신다.

 

죄(罪)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 하시는 밤이다.

겟세마니의 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나약한

인성(人性) 사이의 전쟁터이다.

이 겟세마니의 밤은 예수님 당신의 천주성(天主性)과

인성(人性) 사이의 갈등과 충돌의 시간이다.

 

그러나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는

이 대속의 십자가의 길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이요, 예수님 당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사명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당신 사명인 인류구속사업을 이루실 날을 답답한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바로 그 말씀이 루카 복음 12장 49절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how I wish it were already blazing!)

그리고 50절의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how great is my anguish until it is accomplished!)로 표현된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일차적으로 인류의 죄로 인해

당해야 하시는 고난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절정인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이것을 이룰 날이

속히 오기를 답답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적 죽음을 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세례(洗禮)란 용어로

표현한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세례가 갖는 씻음(정화)과 정화의 의미 가운데서

일치(一致)의 의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지체)이 되는 심오한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 삶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 12장 49~53절에서 당신이 감당하실 고난을

보여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날까지 믿음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것과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나을 수 없듯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걸어가야만 한다.

 

이 땅에서 고난, 고난, 고난 또 고난은 없다.

또한 이 땅에서 영광, 영광, 영광 또 영광도 없다.

 

고난 한번, 영광 한번, 영광 한번, 고난 한번이다.

그래야만 절망하지 않고, 그래야만 겸손하게

성소(聖召)와 소명(召命)의 삶을 잘 마칠 수 있다.

 

특별히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억울한 고통, 터무니 없는 사악한 고통을 겪고 있는 믿음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간택하신 특별히 사랑받는 제자요, 특별 관리 대상자들이며,

성령과 말씀과 희생 제사의 도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명을 앞두고 당신 마음의 내면을 관찰하도록 해 줍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성경에서 불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내면에서 깨끗하게 씻는 하느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 불은 벌써 땅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영을 통해서 신자 공동체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이런 불의 시험을 겪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암시하시는 세례는 번민과 고난과 더할 수 없는 슬픔을 겪으신 뒤에 죽음에 잠기실 당신의 수난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분열과 전쟁을 일으키러 오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 얻는 그런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전해 주는 평화를 누리려면, 먼저 불을 통한 정화, 빛과 어둠, 악과 불의, 억압과 무관심, 거짓과 불의한 상황에서 안락한 생활에 맞선 선의 싸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대립 상황은 모든 가정 안에서,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믿음과 일관되기를 바라는 모든 신자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유다교 회당이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메시아로 고백한 모든 유다인에게 파문을 선언하였을 때(기원후 90년 얌니아 회의) 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가족애와 물적 집착보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첫자리로 놓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전적으로 헌신하고 완전히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도록 제시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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