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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나병 환자 열 사람 치유 (루카17,11-19)

183 김종업 [rlawhddjq] 2019-10-13

 

 

[연중 제28주일]나병 환자 열 사람 치유 (루카17,11-19)

연중 제28주일(10/13)


엘리야 예언자가 일러 준 대로 하여 나병이 치유되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한다. (2열왕 5,14-17)
그 무렵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14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나병 환자인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16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그래도 나아만이 그것을 받아 달라고 거듭 청하였지만 엘리사는 거절하였다.
17 그러자 나아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며,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다고 한다. (2티모 2,8-13)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나병 환자 열 사람 가운데, 외국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다. (루카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2열왕5,14-17)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나병 환자인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4)

 

열왕기 하권 5장 14절 계속적 '와우'(wau; and)미완료형 동사가 결합되어 동작의 연속적 진행과 함께 즉각적인 치유가 이루어졌음 보여준다.

 

여기서 '내려가서'에 해당되는 '와이예레드'(waiyered; Then he went down)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아만이 엘리사가 있었던 사마리아 고지대로부터 저지대인 요르단 강으로 내려갔다는 것과 나아만이 자신을 낮추고 예언자의 말에 순종하였다는 의미가 동시에 내포된 것으로 본다.

 

또한 '몸을 담갔다'에 해당되는 '와이트뽈'(waitbol; and dipped himself)계속적 '와우'(wau)'파다', '파들어가다', '잠그다', '담그다'라는 의미를 지닌 '타발'(tabal)의 미완료형이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는 몸을 물에 완전히 적시거나(2열왕8,15), 물 속에 몸을 전부 집어넣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열왕기 하권 5장 10절에 나와 있는 엘리사의 명령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인데, 여기서 '웨라하츠타'(werahatstha)라는 명령형 동사를 쓰고 있다. '웨라하츠타'는 접속사 '와우'(wau)'씻다'라는 의미를 갖는 '라하츠'(rahats)의 완료형이 결합된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라하츠'(rahats) 대신에 '타발'(tabal) 동사를 사용한 것은 나아만이 엘리사가 명령한 것보다 더 철저하게 몸을 씻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열왕기 하권 5장 14절의 표현은 나환자의 정결례 의식을 기록하고 있는 레위기 14장과 유사한 점이 많다. 특히 '몸을 담그다'라는 의미인 '타발'(tabal)성경에 16회 사용된 단어로 주로 제사 의식이나 정결례 의식에서 피나 물에 몸을 담그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또한 완전함을 나타내는 완전수레위기 14장 7절, 8절과 9절에 7이라는 숫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본문의 끝에 '깨끗해졌다'로 번역된 '와이트하르'(waithar; and he became clean)

계속적 '와우'(wau)'깨끗하다', '정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타하르'(tahar)의 미완료형이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 계속적 '와우'(wau; and)가 사용된 것은 나병에 걸린 나아만의 흉측한 피부가 마치 어린 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된 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것이 아니라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근 직후에 바로 단번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순간적인 변화는 나아만 뿐만 아니라 그 일행들에게도 매우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타하르'(tahar)는 병의 치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실 이 단어는 제사 의식이나 정결례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며, 레위기 14장 4절, 7절, 8절, 9절, 11절, 14절, 18절, 19절, 25절, 29절, 31절, 48절, 53절 등에 나타난다.

 

그리고 레위기 14장 문맥에서 '타하르'(tahar)는 단지 '깨끗하다'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열왕기 하권 5장 14절에서도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열왕기 하권 5장 14절레위기 14장과의 결정적 차이점열왕기 하권 5장 14절이 치유 절차의 묘사이지만, 레위기 14장은 병이 완쾌된 후에  행할 정결례 의식 절차에 대한 묘사하는 점이다.

 

이를 통해 엘리사는 단순히 나아만을 육적으로 치료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아만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데 근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간략해 보이는 치유 기사를 통해 신학적, 신앙적 메시지를 찾아본다.

 

먼저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의 명령대로 요르단강(yordan)으로 내려갔다(yered). 나아만이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는 모습 속에서 그의 겸손을 볼 수 있다.

앞에서 그는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하고 자존심을 내세웠다. 그런데 이제는 요르단 강 물 속에 자신을 완전히 담글 정도로 내려갈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일곱 번 반복한다.

 

이처럼 내려감을 의미하는 '야라드'(yarad)를 어근으로 하는 두 단어는 철저히 겸손해진 그의 상태를 반영해 준다.

아울러 성경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주로 죽음을 상징한다(시편69,2~3). 따라서 나아만이 요르단 강에 들어가는 것은 그의 옛 생명이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상징해 준다.

 

또한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에 순종한 결과 그 살이 '어린 아이'(naar qaton; 나아르 카톤; a little child)처럼 되었다. 

이것은 앞에 있는 '어린 소녀'(2열왕5,2~3)를 상기시켜 준다. 그 소녀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과 순종을 갖고 있었다.

 

이제 나아만도 이러한 어린 아이가 되는 변화를 경험한다. 그도 순종과 그에 따라 이루어진 결과를 통해 어린 소녀가 가졌던 믿음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외형적으로 나아만의 살은 어린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다 ('야샤브'; yashab; came again; was restored).

그리고 나아만은 이같은 회복을 체험한 후에 엘리사에게 '되돌아'온다(2열왕5,15). 성경에서 '돌아옴'을 의미하는 '슈브'(shub) 동사는 대부분 영적 회심을 수반하는 특징을 갖는다.

나아만은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모두 하느님께 돌아오게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아만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치유를 받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왕과 장군의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실패하였고, 권력과 용기와 재물의 길에서 믿음과 순종과 은총의 길로 돌아와 생명과 구원을 받았다.

 

'나귀 두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17)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흙을 요구한 것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이 흙을 가지고 나아만은 자국으로 돌아가 제단을 쌓으려 했다는 견해가 있다.

탈출기 20장 24절에서처럼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모세 율법에 따라 번제단을 쌓고 주님께 희생 재물을 바치려 했던 것이다.

두번째로 나아만이 흙을 요구한 것은 그 흙을 아람 땅 적당한 곳에 뿌려 그곳을 성역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거룩한 흙을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옮기면, 그 옮겨진 장소까지 거룩해 진다는 것은 당시 고대 근동 사람들의 일반적 사고이기도 하다.

 

세번째로 자신이 받은 축복을 기념하며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흙을 가져가려고 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며, 나아만이 처한 상황과 관련해서 상호 보완을 해준다고 본다.

 

한편 굳이 이스라엘의 흙을 가지고 가려한 나아만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연약한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나아만은 아직도 당시의 지역신(神) 개념에서 탈피하지 못하여,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가 그것으로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제사지내려 했던 것이다.

 

그는 아직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께서 무소부재하시어 온 천하에 충만하신 유일신 하느님이시라는 이해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열왕기 하권 5장 15절에서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라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지만, 아직도 나아만은 유치한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17절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불완전한 이해가 하느님을 향한 그의 뜨거운 신앙이나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진실성 마저 훼손하지는 않는다.

나아만이 흙을 요구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그의 변화된 내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만이 주님의 백성들이 사는 땅의 흙을 취하고자 한 사실은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의 나병 치유를 위해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내린 명령과 관련해서 요르단 강을 멸시했던 그의 말(2열왕5,12)과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그의 변화된  내면의 상태를 반영해 주는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아만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오로지 주 하느님께만 제사를 드릴 것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열왕기 하권 5장 15절이스라엘의 주 하느님만이 참 신이심을 고백한 이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자연스러운 귀결인데, 나아만은 이방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연중 제28주일 복음 (루카17,11-1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5~16)

 

여기서 '병이 나은'에 해당하는 '이아테'(iathe; he was healed)의 원형 '이아오마이'(iaomai)'치료하다', '회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이아오마이'(iaomai)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한 치유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특히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이루어질 치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어로서,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보여 주는 동사이다(이사35,3~6; 61,1).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든 치유의 본질이 기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세 있는 말씀으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여신 치유자 예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열사람의 나병 환자들은 눈으로 아무런 증거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제들에게 검증받기 위해(레위14,2) 가던 도중에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루카 복음 17장 15절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를 보았다고 말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단순히 가시적으로 나타난 치유 기적을 이 한 사람만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나병 환자만이 자신의 치유자가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고 감사하려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나병 환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치유 기적의 배후에 하느님께서 계셨고, 그분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기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하며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B.C.722년 북부 이스라엘의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 그들과 혼혈이 되어 혈통의 순수함이 변질되고, 아시리아의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야훼 유일신 신앙마저 변질시켜 혼합 종교를 섬기던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함과 야훼 유일힌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여겨져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꼐 은혜를 입고 돌아와 무한 감사를 표시반면에, 선민으로서 다른 민족에 비해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더 많이 받았던 유대인으로 여겨지는 나머지 아홉은 오히려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사실에만 기뻐할 뿐, 최소한의 어떤 감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루카 복음사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삶을 산다는 모습을 통해서,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과 이름만을 소중히 여기며 교만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엎드려'에 해당하는 '에페센 에피 프로소폰'(episen epi prosopon; he threw himself; he fell down his face)은 직역하면 '그는 얼굴을 떨어뜨렸다'이다.

 

어떤 사람의 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떨어뜨려 땅에 대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존경과 경배의 표시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치유한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을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감사를 드렸다'로 번역한 '유카리스톤'(euchariston; thanked; gave thanks)의 원형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는 성경에서 주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성찬례 축복 기도를 가리키는 용례로 쓰였다.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행위에 이 용어가 쓰인 것은, 그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치유에 대해 하느님께 돌리는 것과 같은 감사의 표현을 했음을 나타낸다.

다시말해서, 그는 자신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식하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께 감사를 표시한 것이다.

 

 

연중 제28주일(10/13)

 

 

<연중 제28주일>(2019. 10. 13.)(루카 17,11-1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몸이 몹시 아플 때 안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또 어떤 큰 슬픔을 겪을 때 위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도, 실패와 좌절을 겪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그런 일을 계기로 종교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1)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더 깊은 신앙 단계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냥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멈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2)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실망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이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이 있고, 실망해서 기도와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2-19)”

 

예수님께서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을 찾으신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감사드리지 않은 것이 서운해서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그 아홉 명이 몸의 병을 고친 것으로만 만족하고서, 더 큰 은총을 구하지 않고 멈춘 것이 안타까워서 그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그 아홉 명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을까? 사실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그들이 크게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제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직 병을 고치기 전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이 나으면 나에게로 다시 돌아와라.” 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홉 명은 사제에게 가서 병이 나았음을 확인 받은 뒤에 별 생각 없이 그냥 가족들에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크게 기뻐하고 좋아했을 텐데, 아마도 예수님을 잊어버렸을 것이고, 감사드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즉 기쁨에 취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변호해 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어떻든 그들의 믿음은 ‘간절하게 청하기만 하는 믿음’이었고, 은혜를 받은 뒤에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주 부족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크게 잘못한 일이 없지만,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또는 영적인 기준으로는 구세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궁극적인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은 것은 신앙인으로서 잘못된 일입니다.

(주님에게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청하는 믿음’과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 간절하게 청하는 일은 누구나 금방 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에 본능적으로 기도를 바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드리는 일은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평소의 신앙생활 태도가 그대로 반영되는 일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든지 얻지 못했든지 간에 평소에 감사기도를 잘 바치는 사람이 있고, 청원기도는 잘 바치지만 감사기도는 바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하는 믿음’과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이 하나의 믿음으로 일치되어 있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서 청하기만 하는 것은 부족한 믿음이고, 그런 믿음은 아직 ‘기복신앙’ 단계나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믿음입니다. 그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로 가려면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되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유대인들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그 아홉 명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았음을 지적하신 예수님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았음을 지적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사실상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1) 이 말씀은 그의 병이 나았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에게 가지 않고 되돌아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제들을 대신해서 그의 치유를 확인해 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2) 이 말씀은, 이제부터는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말씀이기도 한데, 그러면 “구원하였다.” 라는 말은 “구원이 시작되었다.” 라는 뜻이 됩니다. 구원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 도착한 뒤에 이루어집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자신이 신앙을 통해서 얻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의 건강과 평화,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것, 또는 어떤 현세적인 목표 달성 등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것을 원하는 일 자체는 나쁜 일도 아니고, 잘못된 일도 아니지만, 그 단계에서 멈추고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그러면 신앙생활은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송영진 모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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