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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일반게시판
대림 3주 (기다려야 할 분)

209 윤미섭 [klaray] 2005-12-12













    대림 3주 (기다려야 할 분)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의 대상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기다림의 체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소풍갈 날을 설레이던 마음으로 기다리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일날이 다가오면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을 가지고 기다리던 체험이 있습니다.

    위의 예들이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일반적인 기다림이었다면, 우리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의 기다림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고, 늦게 들어오는 자녀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고, 또 군대 간 아들이 무사히 제대하기를 기다리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다림은 우리의 삶과 친숙합니다.
    이런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일년 내내 눈이 덮인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산골마을에 낯선 아가씨가 나타났습니다.
    그 젊은 아가씨의 눈망울엔 근심이 가득 서려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마을 어귀의 강가로 가더니 오래도록 흐르는 물을 쳐다보았습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양을 치러 나가던 어린 목동이 강가에 앉아 있는 아가씨를
    보았습니다. 아가씨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한참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그 목동이 양을 몰고 나타났을 때도 아가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목동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왜 이 마을에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기다리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몇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아가씨의 머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렸고 얼굴에는 주름이 생겨났습니다.
    어느덧 할머니가 된 그 아가씨는 그때까지도 변함없이 그 강가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 강물의 위쪽에서 무언가 둥실둥실
    떠내려 왔습니다. 할머니가 된 아가씨는 벌떡 일어나 강 위쪽으로 뛰어갔습니다.
    물에 떠내려온 것은 놀랍게도 한 청년의 시체였습니다. 그녀는 그 청년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나의 약혼자입니다.
    수십 년 전 히말라야의 어느 산에 올랐다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남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히말라야 산맥 눈 속 어디쯤에 파묻힌 약혼자가 눈이 조금씩 녹으면
    강가로 흘러내려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자신의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기다림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공동체
    차원의 기다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은 조국의 광복을
    35년간이나 기다렸습니다. 지금의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시대에서는
    민족의 통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의 테두리를 벗어난 우리는 인권과 생명이 존중되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평화가 흘러 넘치는 진정한 민주사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다양합니다.
    기다림에는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인 차원의 기다림이 있고, 또 기다림의
    가치나 비중으로 보아서 사소한 기다림에서부터 중요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의 메시아 대망(待望)사상


    예수님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이방인인 로마의 가혹한 지배와 같은 민족이면서도
    대사제들을 비롯한 유다 지배자들의 억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착취를 받는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유다의 모든 백성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고,
    메시아의 도래를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 모두가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고 그 나름대로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던 것처럼, 유다인들도 다양하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든 율법을 엄밀하게 준수- 예를 들면,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를 바치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 행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였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명칭은 '구별된 사람들, 분리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불결한 것과 부정한 사람들 - 예를 들면,
    세리와 죄인들- 의 접촉을 피하였습니다.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것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었고, 메시아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그 율법을
    완성하는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과 규범을 지키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세네파 사람들8)입니다.
    에세네파 사람들과 꿈란 공동체의 사람들은 법 규범의 준수와 정화된 삶으로
    그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시몬이 속해 있었던 혁명당원들은 무력을 써서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 나라의 돌입을 촉발시켜야 합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왕이시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섬기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인구조사, 조세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한편 묵시문학의 작가들은 메시아 시대의 징표들을 분별하고자 애쓰며, 이를 위해
    그들은 시공간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때를 결정하기 위한 연대의 계산을
    도모하였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실 때 어떤 징조들이 일어나며, 그 때가
    언제인가를 탐구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가복음 17,20-37을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올 지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종으로 오신 예수님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의해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원하던 해방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기다림과 열망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셨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율법에 어긋나는 죄인처럼 행동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혁명당원의 생각과는 달리 무력을 사용하여 로마를 몰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결코 유다의 민족주의를 부추기거나 하느님 나라를 정치적 의미의
    해방으로만 축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묵시문학에서 강조하듯이 몇 월 몇 시에
    하느님 나라가 오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방식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유다의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세상의 철저한 쇄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선장군으로, 세상의 통치자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종으로 겨자씨와 같은(마태 13,31), 혹은 밀가루 반죽에 섞인 누룩
    (마태 13,33)과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흘러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승리자가 아니라 꼴찌가 되어 남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며, 이웃 사랑에
    대한 모범으로써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더우기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죽음과 어둠과 죄를 이기시고 생명과 빛과 구원을
    가져다 주신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지금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비전, 그것은 희망 :
    이미 와 계신, 그러나 늘 새롭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기다림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을 때 기다림은 결코
    지루하거나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희망은 그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내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이 있기에 기다림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잊어버릴 때 기다림은 소극적이 되고 급기야는 기다림에 동반 되어야만 하는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미약함과 배반의 죄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또 그렇게 오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해마다 때를 정하여
    우리에게 새롭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시는 그분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또한 그렇게 오시는 그분은 어디 특별한 곳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숨쉬며, 생활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그리고 절망을 넘어 희망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작고 미약하지만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선취(先取)하여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 오던 그 모든 것들이 예전과 같이 보이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대림 3주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자선 주일로 제정하고, 이것의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눔으로써,
    그리고 거짓과 부패한 세상에 정의와 진리의 빛을 전달함으로써, 우리가 기다리는
    그 성탄의 기쁨을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 시기의 반환점을 돌아선 시점에서
    사랑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기쁨과 희망찬 설레임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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