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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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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일]종의 자세 (루카 17,5-10)

182 김종업 [rlawhddjq] 2019-10-06

 

 

[연중 제27주일]종의 자세 (루카 17,5-10)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불의와 재난을 보아야 하냐고 하바쿡 예언자가 하소연하자,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고 하신다. (하바 1,2-3; 2,2-4)
2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3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2,2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3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4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2티모 1,6-8.13-14)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1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4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고 해도 복종할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17,5-10)
그때에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하바쿡1,2~3; 2,2~4)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3)

 

앞선 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답변으로 주시는 것을 판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제 본문에서는 판에 기록된 내용 '환시'(hazon)라 표현하며, 이 환시는 당장 이루어질 것이 아닌 정해진 때, 즉 이루어질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음을 밝힌다.

 

여기서 '정해진 때' 에 해당하는 '모에드'(moed)는 시간과 장소에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본문에서는 시간과 관련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특히 선민 이스라엘이 매년 정기적으로 지키는 '절기'(레위23,2) 내지는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계절'(창세1,14)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환시'가 이루어질 때를 '정해진 때'(모에드)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은, 겨울이 가면 봄이 반드시 돌아오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하바쿡 예언자에게 판에 기록하라고 말씀하신 종말론적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본문 후반부에서는 이 '정해진 때'를 다시 '끝'(종말)이라고 표현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케츠'(qets)는 하느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사람의 죽음(창세6,13)이나 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을 날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에제7,3).

 

본문은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한 것으로, 심판으로 인한 형벌 자체보다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심판의 날이 '~을 향해 치닫는' 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해당하는 '웨야페아흐'(weyapeah)의 원형 '푸아흐'(puah)기본적으로 '숨을 급하게 내쉬다'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종말의 때가 아직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 때가 임박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종말이 마치 누군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종착지를 향하여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는 것처럼 긴박하게 닥쳐오고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본문이 말하는 종말의 때가 구체적으로 역사의 어느 시점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첫째 바빌론 군대의 침공으로 말미암은 남부 유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선민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된 바빌론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선민 뿐만 아니라 바빌론도 선민에 대해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고, 하느님께 대한 교만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했던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으로 인해 모든 나라들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남부 유다 위정자들의 백성들에 대한, 또는 백성들 상호간에 행해지는 불의와 폭력에 대한 하바쿡 예언자의 고발을 기록하는 1장 2-4절의 내용을 고려하면, 이것은 남부 유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 바빌론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불의와 폭력, 잔인함, 교만을 고발하는 1장 12-17절의 내용을 고려하면 바빌론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종말은 남부 유다나 바빌론 어느 한 나라에 대한 종말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함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종말론적 심판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때를 다윗왕이 통치할 때의 영광을 재현하는 정치적인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지만, 신구약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문맥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며,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 그리고 그의 재림과 심판을 통해 도래할 세상의 종말로 귀결되는 것이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본문은 종말이 반드시 올 것이며, 그 때가 더디지만 지체되지는 않을 것임을 내용으로 한다.

여기서 '늦어지는 듯하더라도'(더디다)하는 것은 '어떤 움직임이나 일에 걸리는 시간이 오래다'는 의미이고, '지체하다'라는 단어는 '때를 늦추거나 질질 끈다' 는 의미이다.

즉 본문은 종말의 때가 느끼는 사람에 따라 금방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말의 날 자체가 연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종말의 때에 대한 인간의 판단은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확정하신 것으로 결코 바뀌거나 연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주어가 새 성경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으로 보면 '늦어지는 듯하더라도'에 해당하는 '이트마하마흐'(ythmahamah)'지체하지'에 해당하는 '예아헤르'(yeaher)남성 3인칭 단수 주격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거의 모든 영역본들은 '그것'(it)이라는 주어를 번역에 포함시킨다.

 

그런데 본절의 내용을 인용하는 신약 성경에서는 이 주체를 인격으로 보아 본절이 단지 종말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예표하는 내용으로 본다.

먼저 히브리서 10장 37절"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는 내용은 본문을 인용하면서도 종말의 때보다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인용한다.

 

이것을 감안하면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범죄한 선민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을 멸하고 압제한 바빌론과 같은 나라를 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장차 메시아 즉 구원자이시요 심판자로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온전히 구원에 이르고, 하느님을 부인하는 세상의 모든 권세들이 멸망하며,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궁극적인 측면의 종말의 날이 도래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4)

 

본절 상반절에 기록된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악인은 교만하고 하느님 대전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언급되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의인의 면모를 묘사한다. 여기서 제시되는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그런데 본문의 '성실함'(믿음)에 해당하는 '에무나'(emunah)거짓이 없고, 진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시며, 의로우시고 올곧으신(의인들의 참된 의지가 되시는) 하느님의 신실성을 묘사하는 표현이기도 하다(신명32,4).

그리고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일차적으로 진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강한 신뢰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하느님을 향한 사람의 태도와 면모를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들에게 신실하며 진실한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잠언12,22).

사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신실하며 진실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성실함'(믿음)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 대한 강한 신뢰를 의미할 뿐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며, 타인들에게도 결코 속임이나 거짓을 행치 않는 진실한 면모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의인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신실함과 진실한 태도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선언은 당시 신흥 제국인 바빌론이 고대 근동의 강자로 떠오르면서 남부 유다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을 무너뜨리는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극한 고통을 겪으며 절망 속에서 살아갈 것이지만, 오직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를 기다리며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믿음을 근거한 신실한 삶, 진실한 삶을 살 것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이같은 메세지는 당시 남부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면서 동시에 이웃의 것을 약탈하는 이중적 삶을 살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변화된 삶을 살 것을 촉구하는 의미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본문은 선민 이스라엘을 향해 바빌론의 불의와 폭력, 약탈 속에서도 하느님의 참된 백성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의롭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복음 (루카17,5-10)

 

"이와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종의 위치에 두시면서 당신이 교훈하시고자 하는 핵심을 말씀하신다.

 

종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했던 것처럼, 제자들도 그와 같이 한 후에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다.

 

여기서루카 복음 17장 8절에 나오는 데로, 자신에게 맡겨진 바깥 일만을 끝마쳤다고 해서 휴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깥 일은 바깥 일일 뿐이며 다시 집안에 들어와서는 집안일을 해야만 했던 노예였다.

 

특히 '허리에 띠를 매고'는 띠를 풀고 쉬는 상태와 반대되는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일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철저하고 겸손한 봉사와 전적인 헌신만이 제자들에게 요구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당시 사회 제도에서 가장 하부 구조를 차지했던 종의 비유를 들어 교훈하신 것이다.

 

본절인 루카 복음 17장 10절에서 종을 수식하는 '쓸모없는'에 해당하는 '아크레이오이'(achreioi; unworthy; unprofitable)'무익하고 가치없음'을 의미한다.

 

왜 이 종은 자신에 대해 '쓸모없는 종'이라고 일컫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당신 구원 사업의 협력자들에게 겸손하고 당연한 자세로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을 교훈하고, 또한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무조건적 순종이 따라야 함을 명확히 해 주시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행하는 봉사와 헌신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보답이요,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돌무화과나무는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기에 강한 바람에도 잘 견딥니다.
반면에 겨자씨는 씨앗 가운데 가장 작은 것에 해당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작은 믿음도 돌무화과나무처럼 견고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심겨지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종은 주인에게 명령받은 모든 힘든 일을 수행하고 나서도,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종은 무슨 일을 하든, 주인에게 내세울 것이 없고, 어떤 권리나 보상도 요구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믿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무자비한 주인이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봉사를 했다 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지신 것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실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서 오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 믿음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승복하는 자세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확고하고 위대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겨자씨만큼 작고 깨지기 쉬운 믿음이라도,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능력이 나오고, 삶의 경이로움과 영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더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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