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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181 김종업 [rlawhddjq] 2019-09-29

 

 

[연중 제26주일]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아모스 예언자는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라고 한다. (제1독서).

<아모 6,1ㄱㄴ.4-7> 전능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4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5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6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7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화답송 시편 146(145),6ㄷ-7.8-9ㄱ.9ㄴㄷ-10ㄱㄴ(◎ 1ㄴ)
◎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
○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
○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한다. (제2독서).

 <1티모  6,11ㄱㄷ-16>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드시며,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복음).

<루카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연중 제26주일 제1독서 (아모6,1ㄱㄴ.4-7)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무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4)

 

아모스서 6장 4-6절이스라엘의 부유층들과 권력자들의 사치스럽고 부패한 생활을 구체적으로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들 각 절들을 시작하는 첫 단어는 정관사 '하'(ha)를 수반하는 남성 복수 분사형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은 세 절 각각에서 묘사하는 모든 내용이 북부 이스라엘의 특별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새 성경은 이런 본문의 강조점을 살려 '그들은'이라고 번역하였다.

 

아모스서 6장 4절은 그들의 호화스럽고 타락한 일상 생활을 묘사한다.

본문의 '상아 침상'에서 '침상'에 해당하는 '밋토트'(mittoth)의 원형 '밋타'(mitta)는 본래 '안락의자'나 '침대'모두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밋타'(mitta)창세기 47장 31절, 사무엘 상권 19장 13절구약의 대부분에서 침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본문의 침대가 '상아'('셴'; shen; ivory)로 장식된 것을 보면, 일반 가정의 침상이 아니고 고위 관리나 부유층의 집에만 있는 호화스럽운 침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본문에서 '밋토트'(mittoth)'자리 잡고'에 해당하는 '쇼케빔'(shokebim)함께  사용되었다.

그런데 '쇼케빔'의 원형 '샤카브'(shakab)구약에서 대부분 죽어서 영원히 눕는경우나  남녀간의 부적절한 성관계를 묘사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되었다(창세19,33; 54,2).

 

본문의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라는 표현도 북부 이스라엘의 부유층 사람들의 사치스런 면모를 반영하는 것일 뿐 아니라 문란하게 성적 관계를 맺는  그들의 퇴폐적인 삶의 면모를 암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안락 의자'에 해당하는 '아르소탐'(arsotham)의 원형 '에레쉬'(eresh)침대보다는 침대 대용으로 사용되는 일종의 쿠션이 달린 커다란 방석이나 의자 위에 놓인 방석으로 볼 수 있다.

'에레쉬'가 시편 6장 7절에서는 슬픔에 찬 시편 기자가 눈물을 흘리는 요로 묘사되었고, 시편 9장 12절에서는 의자 위에 놓은 방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새 성경에서는 '밋타'(mitta)는 '침상'으로,  '에레쉬'(eresh)는 '안락의자'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에레쉬'(eresh)'비스듬히 누워'에 해당하는  '우쎄루힘'(useruhim)함께 사용되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기지개를 켜는 것, 즉 잠에서 깨어 몸을 뒤트는 정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기서 분사형, 즉 현재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사용되어 마치 안락한 의자나 쿠션 위에서 지속적으로 하품하고  몸을 오그렸다 폈다를 반복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그들이 사치스런 삶을 살 뿐 아니라 게으르고 태만한 삶의 면모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이스라엘의 고위층들이 성적으로나 향락적 측면에서 문란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상반절에 이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고대 근동에서 매우 귀중한 가축이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쉽게 잡아 먹기 어려운 어린양이나 송아지를 잡아먹었다는 내용을 다룬다.

 

여기서 '잡아 먹고'에 해당하는 '오켈림'(okellim)'먹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칼'(akal)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것을 직역하면 '잡아 먹는 자들'이 된다.

이것은 부유한 자들이 특별한 잔치나 행사가 있을 때만 어린양이나 송아지를 잡은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빈번하게 이런 귀한 고기들을 먹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냥 어린양을 잡아 먹고, 송아지를 잡아먹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린양은 '양 떼에서'라는 표현이 수식하고, 송아지는 '우리에서'라는 표현이 수식한다.

'양 떼에서'와 '우리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서 표현에는 모두 '~으로부터'라는 의미의 전치사 '민'(min)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양 떼 중에서, 그리고 소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골라서 먹었다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또한 이것은 나아가 그들이 날마다 가축들을 잡아먹어도 될 정도로 수많은 양 떼와 송아지가 있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은 아모스서 2장 6절에서처럼, 빚돈 몇 푼이나 신 한 켤레의 빌미로 노예로 팔려 갈 정도의 빈곤한 삶 살았고, 아모스서 5장 11절처럼 농사를 짓는 이들 중에 힘없는 사람들은 과중한 세금과 권력자들이 요구하는 뇌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피폐한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부유한 자들은 가난하고 힘든 자들에게서 쥐어 짜낸 돈으로 수많은 양 떼와 송아지 떼를 사서 키우면서, 값비싼 고기들과 음식들을 날마다 즐기는 호사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이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낸다.' (5)

 

'되잖은 노래를 불러대고'에 해당하는 '합포레팀'(haporetim)에서  '헛된','되잖은' 이라는 형용사가 나타내듯이 타락한 부유층들이 날마다 이런 저런 악기를 만들고 즉흥적으로 그것을 연주하며, 아무 의미도 없는 노래를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구약에서의 노래는 거의 대부분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 하느님의 은혜롭고 놀라우신 역사에 대한 증거와 이에 대한 감사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탈출15,1; 신명31,22; 2사무22,1).

하지만, 본문에서는 예외적인 것으로 그저 순간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특별한 의미나 가치도 없는 노래를 중얼거리듯 부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다윗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악기를 만든 것과는 달리 타락한 부유층들과 집권층들은 자기 자신들의 향락적 여흥을 위해 악기를 만들었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원수들에게 쫓기면서도 하느님을 신뢰하여 찬양했던 다윗의 지극히 신실한 모습과 많은 부와 강성한 군대를 가지고 매우 평화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삶, 매일 매일 쾌락의 노래 가락에 젖어 사는 타락한 북부 이스라엘의 부유층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6)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사는 타락한 부유층의 잘못된 삶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 중에 본절은 값비싼 포도주나 기름을 해프게 사용하는 낭비에 대해 지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주는 물처럼 자주 마시는 일종의 음료수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마셔서 만취하게 되면, 포도주도 다른 술처럼 사람의 이성과 신앙을 마비시켜서 죄를 짓게 만든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경계하는 직설적인 가르침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잠언20,1; 23,1; 31,4; 창세9,20-25; 창세19,33-35).

 

문제는 여기서 '대접'에 해당하는 '미즈라크'(mizraq)성전의 '제사용 대접'(sacrificial bowls)으로 보느냐, 아니면 성전 기물들처럼 매우 귀한 재료인 금이나 은같은 것으로 고급스럽게 만든 잔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전자로 본다면, 이것은 단지 주흥을 돋우는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기물들을 사용하여 섬기는 주님을 향한 경멸과 멸시의 의미를 지녀서 하느님의 신성까지 모독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보통 후자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부유층들이 술잔 하나를 사용해도 극도로 사치스런 행태를 보였으며, '미즈라크'(mizraq)'뿌리다', '많이 흩트리다' 등의 의미를 지닌 '자라크'(zaraq)에서 유래하여, '대접', '대야', '물동이' 많은 양의 액체를 담는 용기를 나타내는 표현이기에, 그만큼 그들이 아예 술에 찌들어 사는 삶, 폭음을 일삼는 방탕한 삶을 사는 것을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최고급', '귀한'에 해당하는 '레쉬트'(reshith)'가장 좋은', '가장 먼저의'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가나안 지역에서 양산되는 일반적인 올리브유가 아니라 값비싼 나르드 향이나 스바 여왕이 솔로몬 임금에게 선물로 가져온 귀한 향료와 같은 것으로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극상품 기름을 가리킨다(1열왕10,10).

이런 나르드 향을 몸에 바르는 것은 질병이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몸에 향을 내고 좋은 피부를 가꾸기 위한 것으로서 사치와 향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처럼 온갖 향략을 누리는 자들이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질책이 나온다. 여기서 요셉의 환난은 그들과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스런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것은 그들에게 닥칠 하느님의 심판과 비참한 곤경의 상황을 암시하기도 한다.


 

연중 제26주일 복음 (루카16,19-31) 

 

 "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4ㄴ~26)

 

살아 생전에 병들고 굶주림에 지쳐 있었던, 자기 대문 앞의 거지 라자로에게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았던 부자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주제넘은 요구를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멸시했던 라자로를 통해 물 한 방울만 떨어뜨려 달라고 한다.

차마 많은 것을 청하지 못하고 손가락 끝에 찍은 물을 구하는 부자의 상황과 심정이 어떠할지 짐작이 된다.

지상에서 호의호식하며 배불리 먹던 부자는 이제 물 한 잔도 아닌 말라붙은 혀를 식힐 한 방울의 물을 구걸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특히 '식히게'로 번역된 '카탑쉭세'(katapsykse)뜨거워 메말라버린 혀를 식히고 촉촉하게 해달라는 뜻으로서 부자가 처해있는 곳이 얼마나 뜨겁고 견디기 힘든 곳인지 보여 준다.

살아 생전 거지 라자로를 쳐다 보지도 않았던 부자가 이제 자신의 비참한 처지로 말미암아 라자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상황이 역전된 현세와 내세와의 자리바꿈의 뚜렷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는 이유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사 '호티'(hoti; for)로 시작되는데, 부자가 왜 물 한 방울을 구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 준다. 그는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오뒤노마이'(odynomai) '몹시 아프게 하다', '몹시 괴로워하다', '몹시 고통을 당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오뒤나오'(odynao) 현재 수동태로서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계속적으로 격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의 상황을 보여 준다.

이 고통은 절대자 하느님의 심판에 의한 고통이며, 여기서 불길은 죄인의 최종적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묵시19,20; 20,10; 21,8).

 

현세에서 매일 잔치를 벌여 사치와 쾌락을 일삼았던 부자는 죽음과 동시에 헤어날 수 없는 심판의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져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애타게 부른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라자로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다.

루카 복음 16장 25절에서 아브라함은 애걸하는 부자의 청원을 들어줄 수 없음을 설명한다.

 

'좋은 것들'로 번역된 '아가타'(agatha)의 원형 '아가토스'(agathos)'선한', '유익한', '아량있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부자가 받은 '좋은 것들'살아 생전 그가 누렸던 부와 명성을 말하며, 동시에 그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배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하느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온갖 부와 명성과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조금도 동정을 베풀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부자는 현세에서 '주는 것'에 무관심했고,  오로지 '받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고 보면 된다.

 

아브라함은 서로 통교할 수 없는 공간상의 제약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을 때 고통받던 라자로를 외면한 부자의 악함 때문에 부자를 외면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위로를 받고'에 해당하는 '파라칼레이타이'(parakaleitai;  he is comforted)'~곁에', '~가까이'라는 뜻이 있는 접두사 '파라'(para)'부르다', '초대하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칼레오'(kaleo)의 합성어로서 '곁으로 부르다'는 뜻이 있지만  본 단락에서는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된 '파라칼레오'(parakaleo)의 현재 수동태이다.

 

이것은 라자로가 계속적으로 외부로부터 위로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위로는 위로의 근원이신 하느님(욥기15,11; 즈카1,17)으로부터 오는 완벽한 위로인 것이다(2코린1,3.4).

 

한편, 루카 복음 16장 26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부자의 애절한 청원을 들어줄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말하는 '우리와 너희 사이'란 결국 저승과 낙원 간의 간격을 말한다.

 

'구렁'으로 번역된 '카스마'(chasma; a gulf; a chasm)'길게 갈라진 틈', '심연'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구렁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보다는, 지옥과 천국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 질적인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가로 놓여 있어'로 번역한 '에스테릭타이'(esteriktai; there is fixed)'흔들리지 않게 하다', '강화하다', '확고히 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테리조'(sterizo)의 완료 수동형으로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있는 그 구렁은 이미 오래전부터 확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그 누구도 그것을 옮기거나 없애지 못한다는  강한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죽은 후에 처해진 운명은 아무도 그 상황을 바꿀 수 없음나타내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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