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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관련
교부편(10)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529 심재엽 [simjy] 2005-03-19

【29】교부편(10) -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주교 논쟁이 일자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는 나치   안츠의 그레고리오. 그레고리오의 총 44개의

  연설문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니체아 신앙고백   을 해설하고, 삼위 일체 교리를 변호한 5개의

  신학적 연설문이다.

삼위일체 교리 심오하게 설명

 

상류층이지만 금욕생활 선택

인문주의자며 시인 저술 왕성

 

4세기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 세 명을 일러 이른바 「가빠도기아 3교부」라 일컫는다. 이들은 바로 대 바실리오와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오, 그리고 바실리오와 절친한 우정을 나눈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이다.

이들 세 명의 교부들은 그들이 교회사 안에서 보여준 특유의 위치와 중요성 때문에

이러한 칭호를 얻었고, 그들의 집안은 이미 수세대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에 적극 참여한 뿌리 깊은 가문이었다.

특히 이들은 당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회 지도층 출신으로 이에 걸맞는 빼어난

교육을 받았고 상류층 인사들이 출세하기 위해 밟아온 수사학, 변호사,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세속적인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따르면서 고독한 금욕 생활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출신과 교육에 바탕을 둔 정치적 지도력과 교회에서의 지도력에 따라 주교로 임명됐고 교회 역사 안에 걸출한 발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바실리오와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는 특별히 서로 물과 불처럼 다른 개성을 갖고 있었지만 깊은 우정을 나누며 바실리오는 탁월한 교회 정치가로, 그레고리오는 수사학자와 신학자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교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이 두 사람은 아타나시오,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함께 비오 5세 교황의 성무일도에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로 선언되기도 했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신의 편지, 자서전적인 시 「자기 자신에 관하여」(De se ipso)와 바실리오에게 보낸 편지 외에 「수다」(Suda, 사본 끝에 실린 사서류)를 통한 전승, 예로니모의 위인전 「De viris illustribus」 등이 있다.

그의 아버지 그레고리오 1세가 45년 동안 주교로서 활동했던 소도시 나치안츠, 또는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리안츠의 가족 영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성서 읽기를 배웠고 가빠도기아와 팔레스티나의 가리사리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마지막으로는 아테네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사사했다.

그는 특히 356년까지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바실리오와 교분을 쌓았고 장래의 황제인 율리아누스와 만났다.

이후 358년에 나치안츠로 돌아와 세례를 받은 그는 소박하고 금욕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하며 바실리오와 함께 폰투스(Pontus) 지방의 이리스 강가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오리게네스 작품 가운데 교의에 관한 선집인 「필로칼리아」(Philokalia)를 함께 펴냈다.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일을 돕길 원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361년 혹은 그 이듬해에 아버지에게서 사제로 서품됐다. 하지만 이를 원하지 않은 그는 집을 나가 다음 부활절이 돼 돌아와서 비로소 첫 강론을 하고, 바로 이 유명한 첫 강론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황제 발센스가 가빠도기아 지방을 분할했을 때, 바실리오는 축소된 영향력의 확대를

위해서 그레고리오를 「사시마」(Sasima)의 주교로 임명하지만 그레고리오는 이를

거부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난 374년 나치안츠 교구를 맡아 일하게 된다.

하지만 또 다시 이듬해 이사우리아 지방의 셀레우키아에 있는 수도원으로 떠나서 고독한 금욕의 생활을 계속한다.

379년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그레고리오를 찾아와

자기들 교구의 총대주교가 되어 줄 것을 청한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아리우스주의로 인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발렌스 황제의 죽음으로 자유를 얻었다.

그레고리오는 이곳에서 5편의 「신학적 연설」(Orationes theologicae)을 저술한 바

이는 진정한 고전의 품격을 지닌 것으로, 정통 신앙에 입각해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관해 정의를 내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오는 381년 3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 도시의 주교로 공식 인정받았으나, 이에 대한 논란이 일자 그는 공의회 도중에 고별 연설을 하고는 아리안즈에 있는

가족 소유지로 물러남으로써 논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온전히 저술에만 몰두했다.

그레고리오의 저작 중 그 정수가 담긴 것은 총 44개의 연설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니체아 신앙고백을 해설하고 에우노미오파와 성령 신성 부인론자들을 반박하며 삼위 일체 교리를 변호한 5개의 신학적 연설문이다.

이러한 연설문 안에서 그는 특유의 심오하고도 엄정한 표현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다.

『시작이 없으신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부이시다. 시작 없이 나신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자이시다. 나지 않고 발출하시는 분, 혹은 오시는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령이시다』(「신학적 연설」 30, 19).

한편 다양한 면모를 지닌 그레고리오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인문주의자요 시인이기도 했다. 특히 산문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시적 리듬은 만년의 시 문학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가 저술한 대부분의 시는 생애 말기에 쓰여졌다. 그 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De vita sua)로서, 출생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활동까지 포괄하는, 그의 생애에 대한 중요한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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