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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4년 3월 28일 (목)성주간 목요일 - 성유 축성 미사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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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12,13-21)

172 김종업 [rlawhddjq] 2019-08-04

 

[연중 제18주일]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12,13-21)

연중 제18주일 (7.31) 복음나눔

 

코헬렛의 저자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말한다. (코헬 1,2; 2,21-23)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2,21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
22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23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 (콜로 3,1-5.9-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경계하라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시고,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신다. (루카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하느님 없는 세상, 하느님을 배제한 인생은 외줄타기와 같다~~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코헬렛 1,2; 2,21~23)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2)

 

코헬렛은 질고에 휩싸인 인간의 구원이라는 성경 본래의 근본 주제를

태양 아래 인생의 절대 허무와 그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설파한 책이다.

본서에는 인생의 허무그 극복에 대한 문제가 크게는 세 부분에서 거론되고 있다.

 

본문 부분인 1장 12절에서 12장 7절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네 가지 주제로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본론 부분의 전후에 서론(1장 1절~11절)결론(12장 8~14절)부분이 있다.

 

코헬렛 1장 1절은 표제로서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 라고 시작한다.

원문은 이러한 표제가 '코헬렛(코헬레트)의 말'(The Words of Preacher)로 번역된 '띠브레 코헬레트'(dibre qohelleth)로 시작된다.

 

구약 성경의 각권의 이름은 때때로 첫 부분에 나오는 단어로 정해지는데, 본서도 그렇다.

즉 히브리어 성경의 본서 제목이 '코헬렛'(코헬레트) 이다.

본서의 영역본 이름인 'Ecclesiates'70인역(LXX; 구약 성경의 희랍어 번역본)에서 사용한

본서의 제목인 '엑클레시아스테스'(ekklesiastes)에서 나온 것인데, 이 역시 본문에서 '설교자'(전도자)에 해당하는 '코헬렛'(코헬레트)의 번역이다.

 

'엑클레시아스테스''모임'(히브2,12), '집회'(사도19,32)라는 뜻을 가진 '엑클레시아'(ekkleisia)에서 유래하였다.

 

'코헬렛'(코헬레트)을 '설교자'라는 의미로 수정되는 '엑클레시아스테스'로 번역한 것은 각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희랍어의 어원으로 볼 때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허무로다. 허무!' (habel haballim ; 하벨 하발림)

 

'코헬렛이 말한다' 라는 문장 앞에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허무로다. 허무' 를 서두에 배치하여 강조하는 것은 '허무로다' 에 해당하는 '하벨'(habel)의 원형인 '헤벨'(hebel)이 나타내는 개념을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함이다.

 

'헤벨'(hebel)은 본래 '증기'(vapor), '호흡'(breath)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유래하여 '실체가 없는', '덧없음', '허무함',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 등을

표현하는 단어로, 인간 존재의 헛됨과 인생의 무상함(욥기7,16),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 우상의 무능함과 무익함(신명32,36; 1열왕16,13)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희랍어 70인역(LXX)에서는 '허무'(vanity)를 의미하는 '마타이오테스'(mataiotes)로 번역하고, 라틴어 Vulgata에서는 '바니타스'(vanitas)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를 'vanity'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부조리', '불합리함'을 표함하여 인간의 삶의 총체적 허무를 기술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본절(2절)에는 '헤벨'(hebel)을 원형으로 하는 단어가 단수로 세 번, 복수로 두 번, 도합 다섯 번 사용되었다.

본문의 '허무로다'에 해당하는 '하벨' '헤벨'의 연계형이고, '허무'에 해당하는 '하발림''헤벨'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이 된다.

이러한 구조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최상급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창세기 9장 25절에서 '종들의 종'으로 번역된 '에베드 아바딤'(ebed abadim)이  '가장 천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최상급의 표현으로 상대적인 허무나 헛됨이 아닌 절대적 의미에서의 허무와 헛됨을 표현하고 있다.

 

태양 아래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어떤 방법으로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허무와 헛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의 본질적 허무함에 대한 진술과 고백성경의 여러 곳에서도 반복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역경 속에 있었던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저는 싫습니다.  제가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살 날은 한낱 입김일 뿐 입니다" (욥기7,16) 라고 절규했다.

 

바로 이 욥의 고백에서 '입김'에 해당하는 단어가 '헤벨'(hebel)이다.

 

또한 다윗은 범죄로 인한 하느님의 징계로 그 모든 영화로움을 잃게 되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형편을 묘사하며, "당신께서는 죗값으로 인간을 벌하시어 좀 벌레처럼 그의 보배를 사그라뜨리시니  사람은 모두 한낱 입김일 따름입니다" (시편39,12) 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입김일 따름입니다' 로 번역된 표현 역시 '헤벨'(hebel)이다.

 

이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인생 자체를  숨결보다 가벼운 것으로(시편62,10),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시편144,4), 잠깐 나타났나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안개)(야고4,14)로 묘사하며 그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욥이 고백한 인생에 대한 비관적 선언이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다윗의 고백은 범죄하는 인간의 실존을 직시하고 그 허무함과 무의미함 등을 절감한 이후 내뱉은 고백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백된 '헤벨'(hebel)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토로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드러나는 설교자의 진술은 인생의 모든 것들을 다 누린 자에게서 나온다는 점에서 더욱 더 절망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쾌락과 즐거움, 그리고 모든 부귀 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인생을 정리하며 얻은 체험적 결론이기에,본문의 진술은 더욱 더 충격적이며 어떤 인간도 이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염세주의나 비관론자의 푸념으로 매도될 수 없는 것이다.

 

솔로몬의 이러한 진술은 영원하지 못한 것들을 지향하는 인간의 온갖 자의적 수고와, 하느님을 떠나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인생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직시한 것에 따른 것이다.

 

결국 하느님 안에서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만 인생이 참된 의미를 가진다는 긍정적 결론을 위한 신앙적 실존에 근거한 방법론적(기술적) 염세주의라 할 수 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habel haballim hakkol habel; 하벨 하발림 학콜 하벨)

 

'허무로다. 허무'에 해당하는 '하벨 하발림'(habel haballim)은  본절 서두에 이미 기술되었으나 후반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문장 서두에 언급된 표현이 다시 반복되어 인간의 삶의 헛됨을 보다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이 허무로다' 로 번역된 '학콜 하벨'(hakkol habel)을 덧붙여 태양 아래 모든 것이 헛됨을 더욱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이'에 해당하는 '학콜'(hakkol)'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명사 '콜'(kol)과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학콜 하벨''그 모든 것이 헛되도다'(the whole is vanity)로 번역될 수 있다.

 

본절에서 '학콜 하벨' 선행하여 '헤벨'(habel)을 원형으로 하는 단어가 네 번 사용되었다.

이 네 개의 단어는 동일한 형태로 두 개의 어구를 형성하여 감탄의 의미 전달한다.

 

그런데 태양 아래 인간의 삶의 헛됨을 탄식하는 이 표현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본문의 '학콜 하벨'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주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바로 '그 모든 것' 이다.

여기서 '그 모든 것' 이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세상과 인생 의미한다.

 

결국 솔로몬은 단수,복수로 제시된 허무에 해당하는 표현을 거듭 사용하여 진한 탄식을 내뱉은 후,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것'을 주어로 제시함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바라는 독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도무지 아무런 희망과 참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인간의 비극적 실존을 강렬하게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3절에 그 허무의 범위를 '태양 아래서'제시하듯, '그 모든 것'의 영역에는 하느님과,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대상이 제외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중 제18주일 복음 (루카12,13-21)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5)

 

원문에는 '탐욕'(貪慾) 혹은 '탐심'(貪心)이라는 단어가 '플레오넥시아스'(plleoneksias)이다.

 

기본형은 '플레오넥시아'(plleoneksia)인데, '더 많은'이라는 뜻의 '플레이온'(plleion)'가지다'는 뜻의 동사 '에코'(echo)에서 파생된 '엑시아'(eksia)의 합성어이다.

영어로는 'greed','avarice','covetousness'로 번역되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분수에 넘치도록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가리킨다.

그런데 복음은 '모든'('파세스'; 'pases'; all) 탐욕을 경계하라고 했으므로, 단순히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과도히 욕심을 부리게 되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금전, 부, 권력, 지식,명성, 쾌락 등등)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여라'라는 원문의 단어는 '호라테'(horate)로서 특별히 경계하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용법으로 쓰였는데, '삼가'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경계하여라'라는 원문의 단어는 '퓔라세스테'(phyllassesthe)로서 원형 '퓔랏소'(phyllasso) 현재 중간태 명령형이다.

 

여기서 중간태그 결과가 자신에게 미치는 것을 나타낸다.

영어로는 'beware','watch out','be on your guard'로 번역될 수 있다.

 

모든 탐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을 명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원문은 수시로 마음속에 들어오는 탐욕(탐심)을 물리치는데  급급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애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굳게 막아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세상 것들의 한계, 예를 들어 물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물질이며,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와 이웃의 선익과 공동선을 위해 올바로 쓰지 못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느님도 영원한 생명(구원)도  잃어버린다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아예 애당초 자신의 분수를 벗어난 헛된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생명'으로 번역된 단어는 '죠에'(zoe)인데, '죠에''죽음'과 대조된 육체적 생명(1코린3,22)과 하느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초자연적 생명'(요한3,15)으로 구분된다.

 

루카 복음 12장 15절의 '생명'은 당연히 후자의 의미이다. 

이 세상의 소유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everlasting life)을 말한다.

이 생명의 속성은 '영원성'(eternity)인데,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이야기 하신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물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려 더 깊은 지옥에 떨어질 것 같으면,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구원)을 받기에 삯이 노랄 것 같으면, 그 어리석은 부자가 가진 것을 다 거두어 가버리신다는 말씀이다.

 

'맑은 가난'의 의미를 지닌 '청빈'(淸貧; poverty)'탐욕'(貪慾)의 글자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청빈''빈'(貧) '조개 패'(貝)'나눌 분'(分)이지만, '탐욕' '탐'(貪) '조개 패'(貝)'지금(이제) 금'(今)자이다.

 

옛날에는 조개 껍질이 화폐의 구실을 했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진정한 가난(청빈)이며,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더 가지려고, 아니면 더 이상 빼앗기지 않으려고 꼭 움켜잡는(grasp; grip; take hold of; seize)것이 탐욕인 것이다.




<루카 12, 13-21>


말씀의 마지막 대목에 마음이 멈춤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어떤 이 입니까?

오늘 주님이 들려주시는 예화를 보면, 곡식과 재물이 많은 부자는 부유한 이가 아니라 하십니다.

그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생각합니다.

'부유함과 생명'

'생명을 위한 부유'

생명은 나를 살리고 형제를 살리고 이웃을 살려, 하느님을 살게하는 것이던가요?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곡식과 재물이기 전에 자비와 사랑이겠습니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일,

함께하여 힘이 되어주는 일이 바로 생명을 보장받는 일이겠습니다.

 

뒤이어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가 가득해 생명을 살리고 키운다는 말씀입니다.  

 

형제사랑과 평화안에서 참으로 부유하셨던 사부님을 봅니다.

가난으로 하느님의 부귀를 사셨으니 역설이며, 속된 말로 대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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