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창4동성당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홍) 2024년 3월 29일 (금)주님 수난 성금요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창4동성당
[연중 제25주일] 불의한 집사의 비유(루카16,1-13)

179 김종업 [rlawhddjq] 2019-09-22

 

 

 [연중 제25주일] 불의한 집사의 비유(루카16,1-13)

 

아모스 예언자는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고 경고한다. (아모 8,4-7)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7 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 (1티모 2,1-8)
사랑하는 그대여, 1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3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5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6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
7 나는 이 증거의 선포자와 사도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과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의 비유를 드시며,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하신다. (루카16,1-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연중 제25주일 제2독서 (1티모2,1-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8)

 

티모테오 전서 2장 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만인과 위정자를 위하여 중재 기도를 명령하며, 중재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어지는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공적 예배때 남녀 성도의 품행창조원리에 근거한 남여 상호간의 기본 질서에 대해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그러므로'로 번역된 '운'(un; therefore)은 새로운 문장으로 내용을 전환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문장 전환 접속사이다.

 

그리고 '바랍니다'로 번역된 '불로마이'(bullomai; I will; I want)'원하다', '소원하다', '열망하다' 라는 뜻을 지닌 단어인데, 여기서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도자요 사도이며, 이방인의 스승으로서의 권위가 포함된 다소 권위적인 명령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권고하는 대상을 '남자'로 국한시키고 있다.

이것은 여자가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본절이 남자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단지 회당에서 남자들이 기도를 인도했던 관례에 비추어 볼 경우에 그렇게 생소한 것은 아니다.

공적 예배때 원로(장로)들이 자연스럽게 기도 순서를 맡았던 교회의 역사적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 이하에서부터 교회의 질서를 염두에 두고 공적 예배 때 준수해야 할 규범에 대해 계속 권고하고 있다.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사도 바오로는 당시 그리스도인 회중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남자들이 대표로 기도하는 것을 전제하고 본문의 권고를 주고 있다.

이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기도의 태도를 특별히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성을 내거나 말다툼이 없어야 한다.

 

성 요한 금구는 "당신은 당신의 형제에게 불리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러나 당신의 기도는 그에게 불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불리하게 된다.

'그에게도 꼭 같은 벌을 내려주십시오. 그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있게 해 주십시오. 그를 쳐주십시오. 그에게 보복하여 주십시오'라고 경건하지 않은 말로 기도를 드리면, 당신은 하느님의 분노를 일으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해 여기서 말하는 분노의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말다툼'으로 번역된 '디알로기스무'(diallogismu; doubting; disputing)는  본래 '대화하다'라는 뜻을 지닌 '디알로기조마이'(diallogizomai)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의논', '의아하게 생각'(루카5,22), '변론', '논쟁'(루카9,46)등의 긍정적인 의미쓰이기도 하며, '시비', '따지기'(필리2,14)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트집잡기 좋아하는 이들의 공연한 시비'를 말한다.

 

둘째, 이들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에는 고개를 숙이고 하는 기도,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서 하는 기도,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하는 기도 등 많은 자세가 있지만, 여기서는 보다 보편적인 기도 자세로서 일어나서 손을 들고 하는 기도를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손을 들고 하는 기도, 즉 기도의 외적 자세로서의 손의 위치가 아니라 '거룩한' 손을 들고 하는 기도, 즉 기도의 영적 태도에 관한 것이다.

 

'거룩한 손을 들어'로 번역된 '에파이론타스 호시우스 케이라스'(epairontas hosius cheiras; to lift up holy hands; lifting up holy hands)흠이 없고 정결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기도하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거룩한'으로 번역된 '호시우스'(hosius; holy)는 일반적으로 '부정한 것과 단절된 상태'를 뜻하는데, 단적으로 말해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 등과 같은 추악한 범죄에서 분리된 상태, 즉 '부당한 행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

 

따라서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은 만일 기도하는 자가 이러한 부정한 범죄로 자신을 더렵혔다면, 결코 공적 예배때에 대표로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시편24,3-4; 마태5,23-24).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시편24,3-4)

 

 

 

 연중 제25주일 복음 (루카16,1-13)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8ㄱㄴ)

 

집사는 여전히 불의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오히려 더 큰 불의를 저질렀지만, 주인은 이 집사를 칭찬하였다.

 

여기서 주인이 칭찬한 것은 집사의 도덕적인 부분이 아니라, 앞날을 대비하고 지혜롭게 처신한 행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불의한 집사자신의 앞날을 위해,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고 있는 데 비해,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는 일에 인색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외에는 관심이 없는 '세상의' 집사들도 이렇게 교활할 정도로 민첩하고 영리하게 미래의 상황을 대처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하느님의 집사들도 적어도 이 정도의 지혜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책망과 더불어 교훈이 이 구절에 담겨져 있다.

 

여기서 '영리하게'로 번역된 '프로니모스'(phronimos; wisely; shrewdly)'신중하게', '사려깊게'라는 뜻인데, 어떤 이익 등을 위해 약삭빠르고 신중하게 신경을 쓴다는 의미로 복음서에서 사용된다.

 

불의한 집사는 위기에 직면하여 신속하게 대처함으로써, 미래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지혜를 보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하느님의 임박한 종말 심판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이 심판 이후에 거처하게 될 복된 처소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 주어진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신속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편, 지금까지는 집사를 수식하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본절에 이르러 '불의한' 이라고 번역된 '아디키아스'(adikias; unjust; dishonest)라는 단어를 쓴 것은 오히려 집사의 지혜를 더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원형인 '아디키아'(adikia)는 주로 하느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로마1,18)과 하느님을 거부하고 적대하는 죄(1요한1,9; 5,17)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서의 이 집사의 불의는 그의 직책과 관련하여 나온 것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집사직을 소홀히 함으로써, 주인의 뜻에 불순종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건도 빚을 탕감받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물이 예전처럼 낭비되고 있기에 주인에게 집사는 여전히 불의한 사람이다.

하지만 집사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앞날을 대비하여 민첩하게 처신하고 있는 그 모습만큼은 영리한 대처이기에, 칭찬받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는다고 한다. (지혜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냐고 한다. (로마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제1독서(지혜3,1-9)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는 떠니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1~4)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 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하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다교 사상가 필론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다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윤리,신학,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다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다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 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다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  유다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자연,우상,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이 범람하는가?

전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왜 악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주고,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유아독존(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  神은 과연 계시는가? 도대체 神의 공의, 정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善을 위해서, 보다 더 큰 惡을 예방하기 위해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신 하느님께서 惡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안에서 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3장의 말씀은 여기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영원(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에 지나지 않고, 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  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고, 의로운 영혼은 반드시 불사불멸이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 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신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 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를 바로 세우시며, 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당신이 천상 천하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 불의와 불법, 거짓과 오류, 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 내세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 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7장 55절 나오는 초대 교회 첫 순교자이신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장면처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 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당신을 위한 고난의 순간에까지 항상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던 그자가 내쫓겼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그자를 이겨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묵시록12,10~11참조)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묵시록21,3ㄹ~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2독서(로마8,31ㄴ-39)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겟습니까?"(8,31ㄴ.33.34ㄱ.35ㄱ)

 

성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을 이어주시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에서 드러난 그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는 게 무엇인가?

 

 

성부 하느님 대전에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을 공격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느님과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연약한 우리를 공격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랑을 끊어 버리도록 우리를 공격한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탄이 공격하는 가능성에 대해 일곱 가지 도구를 지적한다.

 

1) 환난-외부로부터 오는 압력, 재난과 시련, 영적 고통을 말한다.

 이 환난과 시련은 내 잘못으로 올 수도 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이 환난이 오면, 왜 나에게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시는지 원망과 의심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극복하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고, 미래의 영광과 축복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

 

2) 역경-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곤고(困苦;'어렵고 고생스럽다'는 뜻-

 보통 '좁은 장소' 혹은 '여유가 없다'라는 의미로 쓰임)라고 번역했다.

 역경이 닥칠 때, 곤고할 때, 내가 마치 새장같은 아주 좁은 공간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불안하고 외롭고,고독할 수 있으며, 믿음과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3) 박해-이것은 환난과 시련과는 조금 다르다.

노골적으로 어떤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거부하고 방해하며 공격하는 핍박을 말한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증거했다.

 

4) 굶주림-이렇게 신앙때문에 믿음의 진리를 추종하다가 환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때,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집에서 쫓겨나고, 어디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굶주림,기근이라 한다.

 사도 바오로도 복음을 전하다 이것을 겪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느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던 아브라함도 그곳에서 기근을 겪게 되어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이집트로 피신하게 되고, 아내 사라이를 빼앗길 뻔하고,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굶주림은 육체적 고통을 주기에 우리의 믿음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5) 헐벗음-우리가 복음을 갖고 복음에 따라 살며 복음을 전하다 보면,  가끔 사도 바오로처럼 헐벗음(赤身)을 경험하게 된다. 헐벗음은 입지 못하고 자지 못함을 말한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11,27)

인간은 벌거벗은 몸으로 와서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존재이지만,  사는 동안 만이라도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종하고 수행하다 보면, 이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위험-이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험을 격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질병과 생존의 위기, 죽음의 협박 즉 원수로부터의 살해의 위협을 받고 모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히브11,36-37참조).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지 않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함을 깨우쳐 준다.

 

7) 칼-칼은 죽음과 전쟁을 상징한다.

 사람은 누가 죽이겠다고 하면, 사람은 죽음앞에서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국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한다.   칼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이고, 흔들리기 쉽다.

칼이란 우리 믿음의 선조들 중에서 동정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순결(정결)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의 등반을 통해 완덕의 산을 오르면서, 힘은 드나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보화를 캐면서, 완덕의 산 정상에 올라,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선언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8,37)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흔들려고 하는 7가지 장애물들이 있었듯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흔들려고 하는 10가지 장애물들을 열거한다.

 

1) 죽음-육체적 죽음과 죽음에 따르는 고통을 말한다(1코린15,55).

 AD 2세기의 순교자인 성 뽈리카르포 화형대의 기둥에 묶여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말을 들었을때,     "예수님은 87년동안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내가 어찌 그 이름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불태워 죽인다 해도, 나는 그 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이 죽음은 나의 기쁨입니다." 라고 말했다.

 

2) 삶-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의 삶을 말하며, 죽음과 반대 개념이다.

  세상에서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 특권,쾌락, 즐거움이 이 말 안에 다 들어 있다. 광야의 유혹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나에게 절하면, 다 주겠다던 그것이다."

 

3) 천사-여기서 말하는 천사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악한 천사,악한 영들을 말한다. 이 악령은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들고,질병을 가져다 주고,우리를 파괴한다. 하지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악령들이 집요하게 방해하고 못 살게 굴더라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의연하게 서 있는 것이 신앙이다.

 죽음을 통해, 마치 단련을 통해 풀무불에서 정금이 나오듯, 고난없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4) 권세-통치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높은 자, 지존자를 의미한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인들을 굶기고 고문하고 학살했던 악한 통치자들과 독재자들이 많다. 그들 뒤에서 역사하는 세력들이 바로 악한 영들이다(에페6,12참조).

 

5) 현재의 것-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한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고통등, 현재 손해를 보는 고통을 당하면,  아무리 좋은 일도 피하고 싶은 유혹이 오는 것이다.

 

6) 미래의 것-현재와 상반되는 '장래일'을 말한다. 미래에 오게 될 환난과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을 지금 당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구에 오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정면으로 고통을 대결하게 한다.

 

7) 권능-악한 천사나 권세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어떤 힘을 말한다.

 마귀도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제한적으로 사용한다(점, 점성술, 타로 etc.)

 

8) 저 높은 곳-위에 있는 어떤 힘(power above)을 말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모든 것들-권세,부, 명예, 높은 지위 등을 말한다.

 

9) 저 깊은 곳- 아래에 있는 세상(power below)을 말한다.

 가장 침체되고 낮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의미한다.  가난, 멸시,천대, 낮은 지위 등등.   8)과 9)는 아주 좋거나 아주 낮고 비천한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10) 그밖의 어떤 피조물-이것은 위에 열거한 9가지 외의 모든 것 말한다.

 

영적 세계의 어떤 악령들도, 우주의 어떤 세력도, 어떤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3,8ㄴ)

 

오늘 103위 순교 성인 대축일을 보내면서,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와 의를 위해서  자신의 고귀하고 소중한 생명을 바친 훌륭한 순교자들 조상을 둔 후손으로서, 믿음의 후손으로서, 이 시대에 어떻게 그들의 순교 영성을 살 수 있고 계승할 수 있겠는지 구체적인 나의 삶과 삶의 현장에서 깊이 묵상해 보자~~ 

로마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노래를 부르면 좋겠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복음(루카9,23-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3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이라는 말씀의 대상은 예수님 당신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가리킨다.

 

보통 '부끄럽게 여기다'고 할 때 한글이 주는 뉘앙스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암암리에 자신만의 신앙을 간직하며, 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의 반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원문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면'으로 번역된 '에파이스퀸테'(epaischynthe;  is ashamed)의 원형 '에파이스퀴노마이'(epaischynomai)'수치스러움'  또는 '오욕'(汚辱)을 뜻하는 '아이스퀴네'(aischyne)에  '~에 기초하여'를 뜻하는 '에피'(epi)라는 접두어가 붙은 합성어로서,  수치스러움과 오욕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을 가리키는 매우 강조적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 자체를 수치스러움과 오욕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단지 감정적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매우 강도높게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루카 복음 9장 26절예수님 역시 이러한 사람을 마지막 때에 수치스럽게 여겨 부인할 것을 말씀하신다.

 

원문에는 '그를'에 해당하는 '투톤'(tuton; of him)이라는 말을 문장의 맨 앞 부분에 두어서 ''바로 그 사람'을 사람의 아들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로 되어 있다.

 

원문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러한 어투는 당신을 수치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매우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거부하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의 주재자로 다시 오실 때(마태24,30.31),  그들이 아끼고 보전하려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으로 단죄하겠다는 예수님의 단호한 결의가 들어 있는 것이다.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루카 복음사가가 예수님께서 피조물에 불과한 천사들의 영광을 취하여 오신다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족한 영광을 채우기 위해 천사들의 영광을 힘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재자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동행함을 나타냄으로써(마태13,41.49) 사람이 아들(인자; 人子)의 절대적 영광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루카 복음 9장 26절에서 삼중으로 강조되는 '영광'에 해당하는  '독세'(dokse)원형 '독사'(doksa)는 본래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도케오'(doke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의견' 또는 '평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영광'(glory)의 뜻으로 일반적인 희랍 문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영광'이라는 뜻으로는 신약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희랍어 구약 성경인 칠십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카보드'(kabod)에 대한 역어로서 사용된 것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인 희랍어 '독사'(doksa)는 영광의 대상이 아닌, 다른 이들의 '의견'이나 '평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인 반면에, '카보드'(kabod)의 대용어로서의 '독사'(doksa)그 자체에서 발하는 '광채'에 의해 주어지는 영광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취하지 않고 당신 스스로의 영광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에, 루카 복음사가는 후자의 관점에서 '독사'(doksa)를 재림하시는 인자(人子)에게 적용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12 0

추천  0 반대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