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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5월 7일 (화)부활 제6주간 화요일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하계동 메아리
"주님께서 부르시는데..."하계동 메아리 제 694호

19 고창록 [peterkauh] 2006-01-31

 

[연중 제3주일 ]

                          

                             주님께서 부르시는데 ...

 

오늘 복음(마르 1,14-20)은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의 대 역사(役事)에 착수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가 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히시며 회개할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1.15]")

또한 함께 이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 제자들을 어부들  중에서 부르십니다.(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씀하셨다.- [1.17]) 그들이 바로 고기잡이 하던  중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라  나선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는 사도의 삶은 나약하고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초기의 제자들에게 모진 박해와 고통 속에서 결국은 순교의 결단이 필요했듯이,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도 그들 못지않은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그 기준 또한 무엇일까요? 고작 현실의 삶 속에서 세속적인 법과 규범을 지켰느냐 지키지 못했느냐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 배어있는 세속적인 타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요나가 이방인의 도시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치자 모두 단식을 하며 못된 행실에서 돌아서게 됩니다. 이 회개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는 본래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믿지도 않는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여 구원의 은혜를 받는데도 같은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었던 유다는 예언자들이 아무리 회개를 외쳐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탕자의 비유와도 맥을 같이하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나를 따라오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물을 버리고 따라갔고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떠나서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이 결단과 용기가 바로 회개이며 변화의 은총입니다. 복음은 결코 허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모순의 근원은 인간적인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없는 악순환은 결코 인간적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바로 그리스도와 복음이 기준이 될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의 주체가 우리 자신임을 자각한다면 회개의 필요성은 절박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당신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전례와 교리 ]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신 주님(다음 주)

 

 

가파르나움 일지(21-39절):

 

마르코 복음 1장21-39절은 마르코가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 하루 동안 가파르나움에서 하신 일을 일지 형식으로 엮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오전에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21-28절). 점심 때가 되어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29-31절). 안식일이 끝나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32-34절). 어두운 새벽,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후, 제자들이 찾아오자 그들과 함께 갈릴래아의 회당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35-39절). 오늘 복음(마르 1,21-28)은 가파르나움일지 중 회당에서 미친 사람을 고치신구마이적 사화(驅魔異蹟 史話)입니다. 

 

구마이적 사화(21-28절):

 

복음서에 나오는 구마이적 사화는 5편인데 그 가운데 4편이 마르코 복음서에 실려 있습니다(1,21-28 ; 5,1-20 ; 7,24-30 ; 9,14-29). 마르코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 과 사탄이 싸움을 벌이는양 구마이적

을 서술합니다. 구마이적 사화서술 양식은 구마자(驅魔者)와 부마자 (付魔者)의 상봉서술 양식은 구마자 

(驅魔者)와 부마자(付魔者)의 상봉(23절), 부마자의 방어사(24절), 구마자의 추방령(25절), 귀신추방(26절) 그리고 목격자들의 반응(27절)으로 짜여졌습니다.


우리의 이해:

 

예수님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구마행위는 ''''''''''''''''''''''''''''''''하느님의 다스림''''''''''''''''''''''''''''''''(하느님의 나라)이 사탄을 물리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드러낸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 뿐 아니라 구마행위로써 하느님 다스림의 위력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는다고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주위에는 예외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또 이를 악용하여 금품을 착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러나 우리는 여기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처신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더러운 귀신에 들린 사람들이 전보다 분명히 많이 줄었습니다만, 재물·권력·명예라는 또 다른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하고 치유하는 것이 오늘의 구마행위입니다.

 

 

 

[본당 살림]              

                                                                   헌금과 교무금

 

 

교무금(敎務金)이란:

 

  교회의 활동과 운영, 유지를 위해 신자 가구에서 매월 일정액을 교회에 봉헌하는 돈으로, 그 유래는 구약시대 십일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친 이야기(창세 14, 20)나, 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레위인들을 부양하는 수단으로 십일조가 바쳐졌음(민수 18, 21)을 볼 수가 있고, 땅과 그 소출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봉헌물로 십일조를 바치는(신명 14, 22~29) 등 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수확의 십분의 일은 내 것이니, 나에게 바쳐라"-[레위 27, 30]) 즉 성서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일종의 신앙행위였습니다.

  이렇게 십일조로 바쳐진 봉헌 물들은 사제 직분을 담당했던 레위 인들의 생활을 위해서, 또 가난한 고아나 과부들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신자들은 헌금과 교무금의 형태로 교회에 일정액을 납부하면서 십일조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교무금 책정과 관련해 십일조를 그대로 강조하지만 가톨릭에서는 개신교와는 달리 그 정신과 의미를 더 강조해 교구와 본당에 따라 책정하거나 신자들이 자유롭게 정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교회법에서도「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가 하느님 경배, 사도직과 애덕의 사업 및 교역자들의 합당한 생활비에 필요한 것을 구비하도록 교회의 필요를 지원할 의무가 있음(222조 1항)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교무금은 교회의 발전과 선교사업, 사회복지 기금, 성직자들의 생활비, 교육 그리고 교회의 운영 등을 위해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이 봉헌하는 교무금은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필요성 때문이라도 교회에서는 교무금을 반드시 내도록 의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무이기]에 앞서 교무금은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기 봉헌 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수확을 먼저 주님께 바쳤듯이 자기  스스로 최선을 다해서 만든 최고의  것을 먼저 하느님께 바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밀린 교무금이 신앙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 으로 인해 교무금을 내지 못할 경우에는 본당 신부님이나 사목회와의 면담을 통해 삭감 또는 면제받을 수 있으며, 교회 또한 어려운 이들을 향한 세심한 관심과 사목적 배   려가 더욱 필요합니다.

 

 헌금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어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벌어들인 돈 중에서 그 일부를 하느님의 일과 교회 사업을 위해 바치는 정성이며, 교무금과는 별개입니다.

 

 

         

 

                                                   ❍ 황당한 무지 ❍

   

  오랜만에 미팅에 나갔다.

  한 명이 눈에 번쩍 띄었다.

  미팅에선 보기 힘든 괜찮은 여자애였다.

  당연히 우리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갔고 다들 내심 그녀와 파트너가 됐으면 하는 눈치였다.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 되었고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미모만큼이나 목소리 또한 애교가 철철 넘쳤다.

  “전 만혜진이라고 하구요~.”

  순간 ''''''''''''''''''''''''''''''''어. 우리나라에 만 씨도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뭔가 관심을 끌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물었다.

  “어, 우리나라에 만 씨도 있었어요?”

  순간 항상 나서기 좋아하는 한 친구넘이 그녀를 변론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했다.

  “에라~, 이 무식한 넘. 만씨가 왜 없냐…? 넌 한해 만용운 선생님도 모르냐?”

 

 

 

[영적 먹거리 ]

 

 

오늘의 묵상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바느질도 하고, 수도 놓고, 심지어 옷을 내다 팔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했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은 함께 머문다”고 그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훗날 마더 테레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가진 것을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 힘든 가운데도,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함께 나눌 때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가르쳐 주었다.

 

 

❍ 매력의 수단 ❍



 인간에게 절대적인 매력의 기준이 있을까?  예를 들어 남성이 경험하는 성적 욕망의 빈도와  강도는 자신의 신체적 조건에 달려 있지만,  그러한 욕망을 야기시키는 사례들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규약에 의해 결정 된다. 초기 빅토리아 시대의  남자에게는 여성의 발목만으로도 충분한 자극이었지만  오늘날의 남성들은 넓적다리에 이르러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의복에 있어서의 유행의 문제일 뿐이다.  만약 나체가 유행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자극시키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여성들은 어느 원시 부족처럼 옷을 성적으로 매력적인 수단으로 채택하게 될 것이다.


                                   버트란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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