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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마르타와 마리아 (루카10,38-42)

170 김종업 [rlawhddjq] 2019-07-21

 


 

[연중 제16주일]마르타와 마리아 (루카10,38-42)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환대를 받으시고, 내년 이때에 부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창세 18,1-10ㄴ)
그 무렵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3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드러났는데, 그 신비는 그리스도이시라고 한다. (콜로 1,24-28)
형제 여러분, 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보시고,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하신다. (루카10,38-42)
그때에 38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제1독서 (창세18,1-10ㄴ) 

 

그 무렵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거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1~5)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마므레'는 아브람과 동맹을 맺었던 아모리족의 한 사람인 '마므레'를 가리키는 이름(창세14,13.14)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개인 소유지로서 아브람이 롯과 헤어져 정착한 장소(창세13,18)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창세23,17.19; 35,27).

 

한편 '참나무들 곁에서'에 해당하는 '뻬엘로네'(beellone)'참나무'(상수리나무)뜻하는 '알론'(allon)의 복수형'속에', '~사이에', '곁에'를 뜻하는 전치사 '뻬'

(be)가 결합하여 당시 아브라함이 '참나무들 사이에', '참나무들 바로 가까이에 (곁에)' 살았음을 보여준다.

 

'나타나셨다'에 해당하는 '와예라'(wayera; and appeared)에서 '보다'(창세7,1)라는 뜻이 있는 '라아'(rah)의 단순 재귀형이 사용되어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보여준다.

 

'한창 더운 대낮에'에 해당하는 '케흠 하이욤'(kehm haiyom; in the heat  of the day)에서 '날'(창세1,8; 탈출6,28)을 뜻하는 '욤'(yom)정관사 '하'(ha)가 결합하여 '그날'(the day)이란 뜻의 '하이욤'(haiyom)이 쓰였다.

 

그리고 '한창 더운'에 해당하는 '케흠'(kehm)'입다'라는 뜻을 지닌 '하맘'(hamam)에서 유래하여 '더위'(창세8,22), '따뜻함', '따끈함'(1사무21,7)이라는 뜻을 가진 '흠'(hm) '~같이', '~처럼', '~할때'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케'(ke)가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날의 그 더운 때에'(in the heat of the day; while the day was growing hot)가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오전 일을 모두 마치고 가장 더운 때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였음을 알려 준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제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에 해당하는 '와잇사 에나이우 와야르 웨힌네'(waissa  enaiu wayer wehine; and he lift up his eyes and looked and saw)에서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발견한 것을 자연스럽게 묘사하지 않고, 감탄사인 '힌네(hinne)를 통해 묘사한 이유가 '잇사 예나이우'(issa enaiu; he lift up)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문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을 들어 보게 된 경우를 묘사한다.

아브라함은 정오의 햇볕을 피하기 위해 천막 앞에 앉아 졸고 있던 중에 언뜻 눈을 들어 보는 중에 세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에 놀라움을 가지게 된 것이고, '힌네'(보라)라는 감탄사는 이러한 당황스러움을 묘사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왜 달려나가 그들을 맞이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이것은 그가 졸고 있었다는 사실을 만회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보게 된 대상은 '세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혀 사람 이상의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달려 나가'에 해당하는 동사 '루츠'(ruts)'달려들다', '돌진하다'(욥기15,26), '급히가다'(1사무20,6) 라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계속적 '와우'(wau)와 함께 쓰여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보자마자 곧바로 달려 나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맞으면서'에 해당하는 동사 '카라'(qara)는 '만나다'(창세46,29; 탈출4,27) 라는 뜻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급히 나갔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낯선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서둘렀음을 말한다.

 

이것은 손님을 맞이하는 고대 근동의 관습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졸고 있었기에 눈앞에 까지 그들이 왔어도 알아채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만회하기 위해 평상적인 모습보다 더 과장된 행동으로 나그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에 해당하는 '샤하'(shaha)는 재귀형으로 쓰여 외부의 간섭없이 자의적으로 '엎드리다'(창세23,7; 이사51,23), '절하다', '경배하다'(탈출11,8; 신명8,19) 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몸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이런 인사는 귀한 방문자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었다.

 

성경에서는 야곱이 에사우를 맞이할 때(창세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하며

맞아들일 때(창세48,12), 그리고 예언자 무리(생도들)가 엘리사를 맞이할 때 (2열왕2,15) 등 여러 시대에 걸쳐 이런 인사 풍습을 보여 주고 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나리'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원래 '주'(창세19,18; 여호3,11), '주인' (창세18,12; 판관19,11), '소유주'(창세42,30; 이사24,2)를 뜻하는 '아돈'(adon)의 강조형이며 남성 복수형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에 대하여 '나의 주여'(my lord)라고 하면서 1인칭 단수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 중 한 사람이 하느님이심을 즉각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의 기본 어근이 '아돈'이며, 이 단어는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창세18,12), 종이 주인(상전)을 부를 때 (창세24,12) 상대방을 지극히 높여 부를 때 사용되었고,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점(히브13,2) 등을 들어 아브라함이 그들 중 한 명이 하느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지극히 높여 부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들을 발견했을 때 '세 사람'이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되며, 아브라함은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 이들 중에 한 명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은 확실하다(창세18,17.22절).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에 해당하는 '임 나 마차리 헨 뻬에네카'(im na matsathi   hen beeneka)는 직역하면 '만일 제가 당신의 눈속에서 은혜를 찾아냈다면(발견했다면)'이다.

 

여기서 '입다'(창세6,8; 탈출33,12)에 해당하는 '마차'(matsa)'얻다'(창세19,19;  신명22,3), '발견하다'(창세36,24; 민수24,1), '만나다'(민수35,27; 여호2,22)라는 뜻을 지닌 '임'(im)과 함께 쓰여 '발견했다면'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은혜', '은총'에 해당하는 '헨'(hen)'불쌍히 여기다'(2사무12,22)라는 뜻의 '하난'(hanan)에서 유래하며 '은총'(탈출33,12; 잠언3,4), '호의'(신명24,1; 탈출39,21)로도 번역되었다.

또한 '뻬에네카'(beeneka)에서 '아인'(ain) '눈'(창세3,5; 1사무2,30)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서 '당신의 눈들 속에'라는 뜻이다.

 

'내가 당신의 눈들 속에서 은총을 발견했다면', '내가 당신의 눈들 속에서 나에 대한 사랑을 찾아냈다면, '내가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면'하면서 아브라함은 지금 나그네들에게 쉬어 갈 것을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명령형과 함께 사용되지만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부드럽고 신중한 요청을 할 때 혹은 더 나아가 간청할 때 쓰이는 '제발', '부디'라는 뜻이 있는 부사 '나'(na)창세기 18장 3절에는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세 명의 나그네에게 자신의 거처를 그냥 통과하여 지나가지 말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특히 아브라함은 자신을 '종'에 해당하는 '에베드'(ebed)이라고 까지 표현하며 손님들을 최대한 예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손님 접대에 대한 열성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씻으시고'에 해당하는 '라하츠'(rahats)'발'에 해당하는 '레겔'(regel)을 목적어로 하는 명령형으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처럼 히브리어 부사 '나'(na; 부디, 제발, 청컨대)명령형과 함께 쓰일 때에는 명령보다는 애원의 의미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제발 당신들의 발들을 씻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쉬십시오'에 해당하는 '샤안'(shaan) '의지하다'(2사무1,6; 2열왕5,18)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지팡이(에제29,7),(2사무1,6)  혹은 팔이나 손(2열왕5,18; 7,2.17)과 같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의지하여 기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동작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재귀 명령형으로 쓰여져 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며 식사하기에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어 왼팔로 몸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식사 관습을 반영하는 표현으로서 식사 대접을 편안히 받으라는 의미 지니고 있는 것이다(요한13,23).

 

창세기 18장 4절에서 아브라함이 제공할 발 씻을 물과 나무 그늘에서의 휴식은 더위에 지쳐 있는 여행자가 가장 고마워할 것들이다.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로 번역된 '웨싸아두 립베켐 아하르'(wesaadu libbekem ahar)에서 동사 '싸아드'(saad)'지탱하다'(이사9,7), '강하게 하다', '만족시키다'뜻하는 말로서 명령형으로 쓰였는데, 보통 '레브'(leb; 마음)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서 마음을 강하게 지탱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여행으로 인한 피곤한 육체를 쉬게 하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쇠잔한 기력을 힘있게 회복하고 재충전하라는 말이다.

 

한편 창세기 18장 3절과 5절'종'에 해당하는 '에베드'(ebed)'노동하다', '일하다'라는 뜻의 '아바드'(abad)에서 유래하여 '노예'(창세43,18), '종'(창세9,25) 이란 말로 사용되거나 낮은 신분에 처한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아브라함은 이미 거대한 부자였으며, 한 가문을 대표하는 족장이었다.

그런 그가 신분조차 모르는 나그네들 앞에 자신을 낮추어 '종'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 아무리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크나큰 겸손의 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복음 (루카10,38-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2)

 

루카 복음 10장 38~42절'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앞의 10장 25~37절'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함께 루카 복음에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루카 복음 10장 27절에서 언급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보기를 역순으로 하나씩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의 교훈'이웃 사랑의 모델''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의미하고, '하느님 사랑의 모델''마리아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대의 랍비의 문헌들여자들을 탐욕스럽고 호기심 많고 허영심이 강하며 수다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여, 여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 랍비들'불신자나 야만인이나 노예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예수님 당대의 여자들은 그렇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들과 이야기하고'(요한4,27), '여자들을 가르치고'(루카10,39), 그리고 '병든 여자를 치유하기도'(루카13,10; 마르1,31)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버림받고 소외받은 대표적 계층인 여자들을 수용하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표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남녀 빈부에 관계없이 오직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루카19,10).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마르타라는 여자가'에 해당하는 '귀네 데 티스 오노마티 마르타'(gyne de tis onomati martha; a woman named martha)에서 '여주인'이라는 뜻의 '마르타'라는 여성형 고유명사 외에 '한 여자'에 해당하는 '티스'(tis; certain)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여기서 '여자'로 번역된 '귀네'(gyne; a woman)는 처녀든, 기혼이든,  그리고 과부든 모든 연령 계층의 여자를 일컬들 때 사용된다. 

말하자면, 루카'한 여자'라는 기록을 첨가해서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이 바로 '여자'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0장 39절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나온다. 

여기서 '앉아'에 해당하는 '파라카테스테이사'(parakathestheisa; sat)'옆에 놓다'를 뜻하는 '파라카티죠'(parakathizo)의 수동태 분사이다.

 

수동태가 여기서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발치에 자리잡고 앉은 후에 말씀을 들었음을 나타낸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은 것은 당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행동이었다.

당대의 통념을 따를 경우, 이스라엘에서는 여자들이 랍비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대받던 여인들의 지위가 회복되기 시작하고, 예수님에 의해 복음인 하느님의 말씀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제 민족 등의 모든 구분과 한계를 뛰어넘어 만인에게 전달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되는 '에쿠엔'(ekuen; and heard; listening)'듣다'를 뜻하는 '아쿠오'(akuo)의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마리아가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또한 능동태가 사용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억지로가 아니고, 매우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루카 복음 10장 40절에서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나온다.

 

여기서 '분주하였다'에 해당하는 '페리에스파토'(periespato; was distracted; was cumbered)의 원형 '페리스파오'(perispao)'둘레', '주변'을 의미하는 전치사 '페리'(peri) '당기다'를 뜻하는 동사 '스파오'(spao)의 합성어로서,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는 말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어 마르타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고, 분주하고 들떠 허둥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르타는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먹을 음식 준비를 하는 일로 마음이 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10장 41절과 42절의 말씀을 유추해 볼 때, 마르타는 음식 준비도 하면서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싶은 열망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마르타의 마음은 현재 하고 있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곳에도 신경을 뺴앗겼던 것이다.

 

루카복음 10장 40절'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의  말 속에는 음식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혼자서 편안히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동생 마리아에 대해 얄미운 심정이 들어 있다.

 

마르타의 이러한 요청의 뉘앙스는 몹시 바쁜 와중에 있는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 책망과 이 사실을 알고도 침묵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마리아에 비해 지금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하고 연민을 품은 애정 가지고(반복된 호칭의 의미), 마르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여기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에서 '염려하고'로 번역된 '메림나스' (merimnas; you are worried; you are careful)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마르타는 음식을 무엇을 준비할까, 좌석배치는 어떻게 할까, 그리고 지금 마리아는 왜 나를 돕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몹시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걱정하는구나'로 번역된 '토뤼바제'(thorybaze; upset; troubled)'어수선하다', '어지럽다'를 뜻하는 '토뤼바조마이'(thorybazomai)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서, 음식 준비로 인해 분주하고 어수선한 마르타의 심적 상태를 보여 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택한, 말씀 경청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당시 마르타가 했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으므로, 그 시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주도록 일러달라는 마르타의 요청이 거부되고, 오히려 마르타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다.

 

루카 복음 10장 42절에서 '선택하였다'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ekseleksato; has chosen)은 항상 중간태로만 사용되는 '선택하다'는 뜻의 '에클레고마이' (eklegomai)의  부정과거 직설법으로서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혹은 '그녀 자신을 선택했다'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에는 마리아가 '좋은 몫'('아가텐 메리다'; 'agathen merida'; what is better; good part)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된 '우크 아파이레테세타이' (uk aphairethesetai; will not be taken away)는 부정어 '우크'(uk; not)'제거하다', '가져가 버리다'의 뜻을 지닌 '아파이레오'(aphaireo)미래 수동태 직설법이 나란히 쓰였다.

 

이것은 마리아의 선택이 마르타의 항의조가 담긴 요청이나 예수님의 권고로 인해 빼앗기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해 스스로 좋은 몫을 선택하여 집중하고 있는 사람의 유익을, 외부의 어떤 것이 박탈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말씀 경청은 마르타의 음식 준비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것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 행복을 위한 최상의 투자는? *^^* *♥* -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행복하게 잘 지내셨나요? 5호 태풍 다나스가 예상보다 빨리 소멸되어서 그나마 좀 다행이었죠? 그래도 비가 많이 내린 제주도와 남부 해안지역은 물피해가 많네요. ㅠㅠ 형제 자매님 댁에는 피해가 없으신가요?


형제 자매님, 오늘 1독서는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세 천사를 영접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유목민들은 자기를 찾아오는 손님을 환영하고 친절히 대접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했습니다. 유목민들의 주된 생활무대인 사막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을 자기가 데리고 와서 극진하게 대접을 합니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손수 시중을 들면서 그들이 하는 말도 아주 귀담아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진정한 복음을 듣게 됩니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손님으로 맞아들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마리아가 마르타보다 더 좋은 몫을 택했어!” 혹은 “예수님께서는 활동보다 기도를 더 좋아하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런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습니다. 

  마르타는 유대민족의 전통에 따라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 접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특히 마르타는 예수님께 음식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온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의 시중을 드는 것이 완전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나봅니다.


  내가 누군가를 온 사랑으로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한다면 다른 사람이 도와주려고할 때 오히려 말릴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온전히 담은 음식을 대접해 드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따라 손님을 접대하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말씀을 경청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머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마리아는 마음에 새겨진 말씀에 따라 살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가 하는 행동은 온전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모범적인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먼저 스승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마음에 새긴 상태에서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말씀을 듣고 새기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가족들을 위해서 봉사하기 전에, 내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직장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복음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그 말씀에 따라서 하루를 산다면 우리가 매일 수행하는 일이 똑 같다 하더라도 매일 매일이 새롭고 행복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참으로 행복할 수 있음을 당신의 경험을 통해서 증언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행하는 일들은 단순히 내 인간적인 일상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내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우리의 생활 자체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우리가 매일 아침에 복음의 한 구절이라도 읽고 마음에 새긴다면, 하루 생활 중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실천하면서 지내는 하루의 생활은 참으로 행복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이렇게 가장 쉽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하루에 5분은 기꺼이 투자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이번 한 주간은 매일 단 5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그날의 복음을 읽고 마음에 새기도록 해봅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제로 살아봅시다. 그러면 참으로 행복한 한 주간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삶은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듯이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이끌어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울릉도 도동성당에서 박영봉안드레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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