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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나해-03)

152 전창문 [cmjun] 2003-05-04

부활 제3주일(나해-03)

                                                                      2003. 05. 04

 

    캐나다 제일의 도시인 토론토에 가면 규모나 높이에 있어 우리의 남산 타워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세계 제일의 웅대하고 높은 토론토 CN타워가 있습니다. 높이가 553m로 건물로 따지면 한 180층 정도의 높이가 됩니다. 총 무게가 13만톤이고 비상 계단이 2750개로 되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람이 올라가서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346m(114층-엘리베이터로 58초) 높이에 있습니다. 타워 바로 옆에는 토론토의 홈구장인 스카이 돔 야구장이 있는데 전망대에서 야구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개미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전망대에는 한 20평 정도를 투명한 유리로 바닥을 깔아 놓아 346m 아래 땅 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어갈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절대로 깨지지 않는 투명한 특수 강화 유리로 바닥을 깔았지만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어른들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고소 공포증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투명한 유리 위를 밟고 지나가기를 꺼려하고 용감한 어른이라 하더라도 혹시나 유리가 깨질까 조심해서 엉금엉금 기어갑니다.

 

   그렇지만 땅바닥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이 위를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걸어서, 또 어떤 어린이는 뛰어서 유리를 밟고 지나다닙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왜 어린이들은 잘 밟고 지나다니는데 어른들은 두려워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른들은 아무리 깨지지 않은 유리로 바닥을 깔아 놓았지만 유리는 깨진다는 고정관념이 머리에 꽉 차 있어 혹시라도 깨지면 떨어져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유리 바닥 위를 걸어가지 못하지 않나 생각됐습니다. 반면 어린이들은 그런 고정 관념이 적기 때문에 비교적 두려움 없이 뛰어다닐 수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정관념 말고도 혹시나 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즉 이런 시설을 만들어 놓은 사람에 대한 불신도 깔려 있지 않을까 생각됐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정관념이나 불신으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고정관념에 매여있는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믿지를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은 제자들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그들은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그들은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한 것은 아마도 제자들의 관념으로는 죽은 사람이 부활한 일이 없었고 그래서 죽은 사람은 절대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런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비 신앙인들은 주님의 부활은 허구 맹랑하고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제자들마저도 주님께서 그렇게도 여러 번이나 '원로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지만 사흘만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실제로 부활하여 나타나셨지만 믿지를 못했습니다.

 

   사람은 가끔 너무 큰 사건이나 진리 앞에서는 어안이 벙벙해 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그 사건이나 사실이 이성과 감성의 한계를 뛰어넘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부활 사건은 역사 속에 유일한 사건이기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십자가에 무참히 죽으시자 실망과 슬픔에 잠겨있던 제자들에게 몇몇 사람이 예수 부활 체험 얘기를 들려주지만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혼란 속에 있는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무척 놀랐고 당황했습니다.(루가 24,37). 그래서 예수님은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하고 물증을 보이십니다. 그래도 어리둥절해하자 주님은 인간적으로 다시 접근하십니다.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이 말씀에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주님은 그것을 받아 제자들 앞에서 잡수십니다. 그 때서야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이처럼 부활신앙을 확신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함을 미리 대변해주는 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계시지만 그분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성서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눈과 마음을 뜨고 열어주셨을 때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현존하심을 확신하는 삶은 물증이나 현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을 믿고, 그분의 말씀인 기쁜 소식을 가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나누는 삶을 살아갈 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복음 정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면 누구보다도 주님의 부활을 믿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또 이런 이들을 주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증언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바와 같이 부활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은 그 사건의 증인으로서 역사의 현장에 당당히 나서서 용감하게 전합니다.(사도 3,13-19) 세상이 무서웠고 자기 동족이 두려워 밖에 나가지 못했던 그들이 이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부활을 용감히 선포했습니다. 이 선포를 통해 사도들은 자기 동족을 회개시키고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자비와 용서를 외치며 회개와 성실한 삶, 즉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촉구했습니다.

 

   제자들처럼 이제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삶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증언이 힘을 지니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 미사 때마다 부활하신 주님은 구체적으로 성체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지만, 그러한 주님의 현존이 자동적으로 체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적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에 대해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응답할 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매일매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이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자비를 본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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