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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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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착한사마리아인 비유.(루카10,25-37)

169 김종업 [rlawhddjq] 2019-07-14

 

 

 [연중 제15주일]착한사마리아인 비유.(루카10,25-37)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 곧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신명30,10-14)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1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14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한다 (콜로 1,15-20)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를 드시며,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이르신다.(루카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신명30,10-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1)

 

신명기 30장 15-20절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촉구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명기 30장 11-14절까지 마지막으로 율법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때문에' 라는 뜻을 가진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본문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도록 요구하시는 율법은 지키기 어렵거나

일상 생활로부터 괴리된 낯선 것이 아님을 밝힌다.

 

여기서 '너희에게 명령하는'으로 번역된 '메차웨카'(metsaweka)는 '명령하다'

뜻을 가진 '차와'(tsawa) 동사의 강조형 분사 능동태와 2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말로서, '너에게 명령하고 있는' 이라는 뜻이다.

 

분사형은 행동의 계속됨을 나타내기 때문에 여기의 '명령'은 과거에 모세가 내린

어떤 명령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계속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든 율법의 말씀을 가리킨다.

 

한편, '힘든 것도'로 번역된 '니플레트'(niphlleth)'능가하다', '특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팔라'(phalla) 동사의 수동형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 '놀랍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너희에게'로 번역된 '밈메카'(mimmeka)는 '~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민'(min)과 2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전치사구로서 '너에게'라는 뜻이다.

 

따라서 '로 니플레트 히 밈메카'(lo niphlleth hi mimmeka)'그것은 너의

영역 밖에 있을 만큼 어려운 것이나 놀라운 것이 아니다'로 이해할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고 있는 명령 즉 율법은 그들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 29장 28절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감추어진 것은 주 우리 하느님의 것이지만, 드러난 것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것이니, 우리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율법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영구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It is not hidden from you).

 

그리고 '멀리 있는 것도'로 번역된 '레호카'(rehoqa)의 원형 '라호크'(rahoq)인데,

거리적으로 이스라엘로부터 멀다는 의미보다는 이스라엘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율법이 결코 난해하거나 심오하지 않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따라서 신명기 30장 11절은 율법이 우리가 지키기에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전한다.


 

연중 제15주일 제2독서 (콜로1,15-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2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시어 만물로 하여금

당신 자신과 화해하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평화를 이룩하시어'로 번역된 '에이레노포이에사스'(eirenopoiesas)의 원형

'에이레노포이에오'(eirenopoieo)'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eirene)'행하다',

'~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포이에오'(poieo)의 합성어로서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쓰였다.

 

그 의미는 '평화를 만들다'(make peace)이며, 본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의 구속사업을 통해 하느님과 만물 및 만물안의 모든 생명체 상호간에

평화를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오로의 다른 서신인 로마서 5장 10절과 에페소서 2장 15절과

16절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인류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무죄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죄는 인간들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취하고 이 땅에 내려오시어 흠없으신 당신 몸을 자원으로 희생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본문의 전치사 '디아'(dia) '~을 통하여'(through)라는 의미로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십자가의 피가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독생 성자의 피를 흘리게 하셔야만 했는가? 

 

이것은 이 땅에 첫 사람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계명을 어겨 죄가 들어오고, 모든 인류가

첫 사람안에서 죄를 지어 죽음으로 치닫게 된 이후로 그 죽음을 막는 유일한 원리가

바로 '피흘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 마음이 아프듯이,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명을 어겨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며, 그 선성(善性)에

누를 끼치고 성성(聖性)을 모독하며, 공의(公義)를 거스려 일어나게 된 하느님

아버지의 의노는 당신과 위격과 레벨이 같은 하느님만이 풀어 드릴 수 있고,

죄는 인간이 지었기 때문에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속죄를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이 원리는 하느님 아버지 당신 자신이 세우셨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다'(레위17,11;

히브9,22)선언하셨다.

 

구약 시대에 수없이 흘려지고 뿌려졌던 양과 송아지의 피는 해당 제사 한가지 죄에

대해서만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제사였지만(히브7,27), 저주의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신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단 한번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여 죄사함 및 화해를 위한 더 이상의 피흘리는 제사가 필요없도록 만드신 것이다

(히브10,10.11).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원문은 새 성경의 번역과 조금 다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성혈의 구속 공로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셨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죄를 범한 인류와 화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간절한 희망이요, 기쁨이었다.

 

여기서 '화해시키셨습니다'로 번역된 '아포카탈락사이'(apokatallaksai)의 원형

'아포카탈랏소'(apokatallasso)끝마침과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

(apo)라는 전치사와 그 자체로 이미 '화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탈랏소'

(katallasso)의 합성어이다.

 

사도 바오로'화목하게 하다', '화해시키다'라는 의미를 전달할 때 주로 '카탈랏소'

(katallass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로마5,10; 2코린5,18.20).

 

그러나 여기 콜로새서 1장 20절과 22절, 에페소서 2장 16절에서는 '아포카탈랏소'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완전한('아포'; apo) 화해('카탈랏소'; katallasso)의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카탈랏소'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여기서는 죄를 범하기 이전에 가졌던 평화의 관계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

말하기 위해 이같은 강조형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과의 완전한 화해를 기뻐하시며

간절히 희망하셨던 것이다.

 

한편 '유도케센'(eudokesen)이라는 단어는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신다'는 뜻인데,

원문에는 콜로새서 1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새성경에는 '기꺼이'로 번역했다.

 

이 단어의 원형 '유도케오'(eudekeo)'잘하다', '좋다'라는 뜻의 부사 '유'(eu)와

'생각하다'(마태3,9), '여기다'(2코린11,6)란 뜻의 동사 '도케오'(dokeo)의 합성어로서

'좋게 생각하다', '기쁘게 여기다'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이것은 기대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에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마태3,17; 갈라1,15.16).

 

이 단어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인간과 다시 화해하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셨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느님의 이러한 바람이 그리스도의 육화(강생)과 십자가상 대속적 죽음을 가능케했다.



 

너무 쉬우면서도 너무 어려운 것 (연중 제15주일 복음.루카10,25-37)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손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은 향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덕을 높이 쌓으려고 애쓰는 한 젊은이가 산골짜기에 있는 고승을 찾아가서 스님, 이 고통스럽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참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께서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스님, 그것은 세살박이 어린 아이도 다 아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세살박이 어린 아이도 다 아는 것이지만 여든 노인도 다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해야 한다.용서해야 한다.’,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이웃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손발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함으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실천하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는 율법교사의 물음에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되묻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분명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행함으로써 아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이어 율법교사는 자기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길을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을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길을 가던 한 사제가 그 사람을 보았으나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레인인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를 돕는 일을 도맡아보던 사람으로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사제나 레위인은 아마도 그 사람을 도와주어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사람의 후광으로 내가 빛나지도 않으니 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강도 맞은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 주고는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그를 간호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떠나갔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굽니까? 당시 사제나 레위인등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취급도 안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며 부정하게 살아간다고,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이라고 여겼고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돌보았습니다.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당연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묻자,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가10,3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 안에는 아직도 사마리아인을 입에 담기 싫어하는 마음이 배여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못한 것을 대신 행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의 대답을 듣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풀어라!”

 

결국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여러 모임을 다녀 보면 거기 모인 분들의 성향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서 색깔이 드러납니다. 많은 경우에 교육수준이나 여러 가지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과만 이웃으로 지내고 싶어 합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율법교사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아무런 이득도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처지와 상황 안에서도 서로 돕고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에게는 강도를 만난 사람이 외면하고 지나가도 될 이었습니다. 사랑에 관해 많은 말을 해온 그들이 정작 사랑을 증명해야 할 순간에 등을 돌려버렸습니다. 입으로 선포된 사랑이 위선과 거짓으로 판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는 결코 그가 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행할 수 있는 모두를 행했고, 줄 수 있는 전부를 주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희생과 헌신으로 사랑의 마음을 모두 다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랑은 말보다 행함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주는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으로 한정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이웃이 되어 주기를 작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스승과 제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스승께서 제자에게 밤의 어둠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온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가 동창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아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제자가 고민하다가 창문을 열어 모든 사물의 형체를 구별할 수 있으면 새 날이 밝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스승께서 다시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제자가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스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너의 형제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밝아온 것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사랑을 소리 높여 외쳐도 이웃을 형제로 여기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간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시선이 어디 있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나의 이웃이 누구냐?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지 말고 내가 모두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그 안에서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열 가지를 아는 것에 만족하기보다 알고 있는 한 가지를 실천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당신의 모두를 내어줌으로써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셨고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해야 합니다. 환자방문이나 봉사활동, 재능기부 등 이웃을 향한 마음이 활짝 열리기를 희망합니다. 행동은 입보다 크게 말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이웃을 향한 구체적 사랑의 표현을 확실히 하는 하루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무엇인지 아시죠?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데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1독서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30,11.14).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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