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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강론
연중 11 주일(가해)

185 양권식 [ysimeon] 2008-06-14

연중 11 주일(가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연중 11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파견의 동기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었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가서‘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견된 제자들이 선포해야 하는 것은 먼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서 백성들과 함께 계시니 무서울 것이 없다는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 메시지를 다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목자와 양떼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하는 비유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목자는 하느님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양떼는 목자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야훼는 나의 목자”라는 성가는 이스라엘이 애송하던 시편(23)입니다.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께서 목자로 곁에 계시기에 아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신앙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신뢰로써 시작된 신앙은 시간이 흐르면서 율법과 성전이라는 제도화에 의해서 변질되게 됩니다. 성전 일을 전담하는 제관들이 생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율사들이 나타나면서, 이스라엘이 신앙 초기에 깨달았던,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사라졌습니다. 제관과 율사들은 하느님을 성전에 받칠 것과 율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못 할 때는 벌하시는 두려운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목자처럼 다정한 하느님은 이제 지킬 것을 지키지 않고 받칠 것을 제대로 받치지 않는 사람들을 벌하고 심판하는 두려고 편협한 하느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원초적 신앙내용이 사라지고, 하느님이 두렵고 무서운 심판관으로 보여 진 상태에서, 군중은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고 허덕이게 됩니다.
    법은 그것을 어기는 자를 징벌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도로교통법을 예로 들자면 이법은 위반자를 잡아 벌금을 물리자고 있는 것이 사람들이 도로 위에서 모두 원활하게 또 안전하게 움직이면서 살게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 법을 위반한 사람이 처벌을 받는 것은 모두가 그 법을 잘 지켜서 원활히 또 안전하게 도로를 이용하며 사는 데에 협조하라는 권고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에 율법이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자각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겠다는 뜻과 약속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성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건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짐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고 성전입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제관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의 준수와 성전예물 규정들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적인 생활고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성전규정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들을 단죄하였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성전에 예물을 받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죄의식을 심어주고, 그들만이 의인인양 백성 위에 군림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내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율법학자들과 제관들과 논쟁을 벌이시고 타파하고자 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유대교의 의인의식과 편협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율법과 성전은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이나 성전을 구실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의 품으로 끓어 안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그들에게 파견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이란 바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소외된 일반 백성들입니다. 앓는 이, 죽은 이, 나병환자, 마귀 들린 이들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불행들이 그들의 죄나 하느님의 벌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나 제관들이 사람들에게 심어놓은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이것이 바로 살아가면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놀랍게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랑의 복음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죄 짖지 말라는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복음인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병고와 실패와 죽음과 같은 불행은 있습니다. 병과와 실패와 죽음은 인간의 삶에 당연히 들어 있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수없이 마주하는 불행들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그런 인간 운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무병장수나 만사형통과 같은 초인(超人)적 삶의 조건을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 듯이 인간은 그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성숙합니다. 인간은 고통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절망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하느님 나라는 고통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 고통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고통 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 모든 고통이 끝나야 만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 현재의 산 사람이 사는 희망의 나라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는 희망을 지향하도록 구원 되었습니다.”(8,24)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절망을 거슬러서 희망하는”(로마 4,18) 길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은 사람을 체념하고 죽게 합니다. 절망을 거슬러서 희망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사람들이 자비한 하느님을 희망하며 살도록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 신자들의 죄 고백을 듣는 고백소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듣습니다. 주일의 의무를 지키지 못 할 만큼 힘들게 사는 이들의 아픈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를 느낍니다. 부끄러워 집 축성도 청하지 못 하는 내 본당 신자들의 위축된 모습에서 하느님 나라를 봅니다. 제가 듣고 보고 느끼는 하느님 나라는 목이 메게 힘들게 사는 우리 본당 신자들의 거친 손 안에 있는 나라입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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